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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9:1-10)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7. 11. 2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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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다릅니다. 인간들은 권세 앞에서나 돈 앞에서 정의에 대한 기준을 바로 세우지 못합니다. 이미 세워진 법도 타락한 인간의 탐심으로 권세자들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할지라도 단 번에 심판하시고 그 나무와 가지를 잘라 버리십니다.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그 저주가 이제 음녀인 예루살렘성에 속히 임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던 신약교회의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하는 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의 심판은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구원을 이루시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의 증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속경륜 가운데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멸망시켜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을 통해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통해 들은 것처럼 이제 예루살렘에는 구원의 소식이 없습니다. 비록 오늘날 예루살렘 주위에서 통곡의 벽을 향해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간의 소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피를 통해 이루신 구원역사가 세상 모든 이방나라까지 증거되고 그곳에서 그 피를 믿는 백성들을 부르시고 교회를 이루어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사는 신앙의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서 이러한 진리가 우리들에게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계19장에는 할렐루야가 네 번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할렐루야라고 하는 의미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임을 압니다. 하지만 할렐루야 라고 하는 이 단어가 어떠한 상황에서 사용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와 모든 인간들, 그리고 라고 하는 인생에 있어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면서 그 모든 행하시는 역사를 찬양하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라고 하는 할렐루야가 언급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이곳 계19장에서만 할렐루야라고 하는 이 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4번 나오는데 여기에 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의로우시며 정당하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이 의로우며 정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곡된 할렐루야 외침과 화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는 자들이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마치 판소리에서 나오는 추임새를 가미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용하지만 결코 이 할렐루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할렐루야를 외칠 때 아멘을 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고 침묵하면 복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이 거짓 가르침은 강단에서 당장이라도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할렐루야를 보면 그 의미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할렐루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자신의 백성들의 피를 유대인들에게서 갚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복수에 대한 찬양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원한을 갚으시는 것에 대한 찬양이 아닙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자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피를 부인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할렐루야 하는 것입니다. 15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사건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린양의 피가 그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핍박아래에서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음을 찬양합니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비록 신약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피를 신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지만 그것을 실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일을 이루십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나라와 권세자들을 주권하시고 역사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 나오는 할렐루야도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3절에 나오는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사용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심판을 받을 때 그 연기가 계속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나 신약, 그리고 오늘날에도 심판을 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악인들이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그렇게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느낄 때도 있지만 때론 느끼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 지구가 얼마나 빠르게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돌아가고 있는지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거의 800km의 속도로 돌아가는 이것을 느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죽음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고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노화가 되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면서 그것을 알지만 물리적으로 세포가 늙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 몸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마저도 찬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면 그것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력이 떨어져서 돋보기를 쓰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가 늙어가고 있으며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심판자이십니다. 그 분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렐루야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이 찬양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시며 통치자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문자적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에게 더 유익을 준다고 조상들에게서 배웠습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내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며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순종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지만 할 수 있으면 하나님 앞에 이러한 외적인 형식이 때론 우리의 마음을 바르게 이끄는 일도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형식은 위선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진실하다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좋은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멘 할렐루야 찬양하며 경배하는 자들에게 보좌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이 음성은 분명 주님의 음성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 지위 고관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분명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고 하는 식으로 지상에서 큰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목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큰 자나 작은 자 모두가 찬양하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이 핍박과 환난으로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들이 결국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를 신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음녀 바벨론,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할렐루야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인들도 다 몰아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은 교회의 멸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심판은 신약 교회를 충만하게 설립하고 새 성전으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음녀인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새로운 하나님의 신부로 세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 나오는 어린 양의 혼인이 이르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혼인을 하신다고 합니다. 누구와 혼인을 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피를 믿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즉 교회를 이룬 성도들과 혼인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신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어린양과 혼인한 자들이 참된 신부들입니다. 참된 신부들이 되는 길은 오직 어린 양의 피를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한 것을 알 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오순절이 바로 새로운 신부들과 혼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날입니다. 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께서 어린양의 신부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신부는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입술로는 부르고 있고 시편에 따라 노래는 부르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자들이 바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신약의 백성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신부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린 양의 신부로 사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랑을 잡아 죽였습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자신을 준비합니다. 무엇을 준비합니까? 9절을 좀 더 깊게 연구하면 그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슬기있는 다섯 처녀들이었습니다. 신랑이 올 때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끝까지 기다리고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슬기로운 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어떤 일에 지혜나 이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연관된 것입니다. 반드시 자신들의 신랑이 올 것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2513절을 보면 그것은 심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신부들에게 하나님은 세마포 옷을 입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기에서 세마포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의의 옷입니다. 하나님은 이 의의 옷을 신부들에게 입혀주십니다. 그래서 의의 옷을 입은 자들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들은 옳은 행실을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의롭지 못한 인생들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의 옷을 입혀주셔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옷을 입는 자들은 결국 옳은 삶을 향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의롭게 된 자는 거룩하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믿는 의인들을 혼인 잔치에 청할 것입니다. 이 청함을 받은 자들은 정말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 자신들에게 충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들도 하나님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마지막 날에 우리들에게 베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이미 우리들이 맛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찬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비록 성찬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지만 이 고난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자들이 새로운 신부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아니지만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어린양의 피를 먹고 마시며 자신들의 죄를 용서 받은 것을 기뻐하며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성찬을 시행하면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신부가 된 우리가 어떻게 신랑을 따라 살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계속 음행을 저지를 것입니다. 이 말은 신랑 되신 주님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이 살았던 과거 방식, 세상의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 예수를 자신의 구주,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은 반드시 주님의 새로운 신부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고 신랑의 음성 듣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저스틴 마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성찬이 항상 있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그의 글 속에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성도들이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여 성찬을 행하지 않았다면 교회지도자는 참석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집사를 보내 성찬에서 나눈 떡과 포도주를 보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날 왜 성도들이 교회에 참석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를 통해 성도들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이미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완성되지 못한 것이지만 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교회가 드리는 예배에 참여 하는 모든 성도들이 맛보는 거룩한 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예배는 결혼 잔치인 것입니다. 이 결혼 잔치에 성도는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오직 신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신랑의 음성을 듣기 위해 신부는 그곳에 모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강단에서 성도들, 즉 신부들이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랑을 만나러 와야 하는데, 신랑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그 목소리는 듣지 못하고 세상의 이야기만 가득한 설교라고 하면 그것은 결혼잔치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들의 교제를 위해 모이는 모임 밖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교인들에게 그렇게 소개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바울은 자신을 중매자로 소개합니다. 중매자는 처녀를 신랑에게 맺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모든 목사는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께로 인도해 주면 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목사를 교회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분명 목사가 성도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면 가장 탁월한 은혜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와 진리가 있는 예배를 우리는 등한시 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오직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는 상황에서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랑의 음성을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신념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성도의 교제를 통해 서로 사랑하고 위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믿음은 오직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환난과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신랑의 음성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믿은 조상들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믿음 위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늘 변합니다. 그리고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랑께서는 변하지 않고 일향 미쁘십니다.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할렐루야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마땅히 할렐루야 찬송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 찬송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늘 불려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이 있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551&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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