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으로 모든 세상과 역사를 통치하신다(계19:10-21) | |||
타락한 유대인들의 신앙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천사를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으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탁월함을 선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보다 뛰어나고 모세보다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할 때 천사는 자신에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사 자신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주 예수를 증거하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듣는 시작부터 아무리 뛰어난 영적 존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가 천사입니다. 비록 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을 쫒아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지만 천사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한 택한 백성들을 섬기는 그런 뛰어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심성 안에는 거짓된 영적인 것을 늘 사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들이 만들어 지고 신들이 고안되어진 이유도 바로 영적인 것을 향한 동경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향성이 결국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도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이라고 하면 우리의 신앙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해서 은사를 받고, 남들이 모르는 예언을 하고, 무엇인가 체험을 해야 그것이 영적이라고 늘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신앙이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 영적이란 것은 결국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연관 되어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꼭 형상화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조상대대로 그렇게 믿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타락하면서 결국 자신들 안에서 일어난 비 신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사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유대교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면서 왜 천사에게 경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내용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천사숭배가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타락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형상숭배였습니다. 마리아를 섬기고, 예수님을 형상화 시키고, 급기야는 천사도 형상화 하여 섬기는 우상숭배를 자행하였던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게 되면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자신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며, 그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그렇게 시대의 가치관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잘 배웠던 성도들에게 표적의 사건을 보여주면 쉽게 무너지는 것이 현대 신앙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사도 요한 당시에도 너무 쉽게 자행되고 있었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계19장 후반부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표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복음을 쫓아갔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신부들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신랑이 되신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 19장은 혼인 잔치에 참여 하는 자들과 그 신랑이 누구인지를 자세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주 예수를 믿는 자녀들이 어떤 축복을 받고 있는지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복을 받았습니다. 이 복에 대하여 인간의 언어로 완벽히 말해줄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들이 이 혼인 잔치의 신부들로 청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신랑의 신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앞두고 느끼는 그 행복이 가장 행복하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해서 드디어 결혼을 하는데 얼마나 행복할까요? 말할 수 없는 행복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랑께서 우리를 신부로 부르시는 이 결혼은 그야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축복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느끼고 깨닫는다면 성도는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본문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나타나신 신랑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께서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심판을 행하기 위해 승리자로 오시는 주님을 먼저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백마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백마는 승리와 통치의 상징입니다. 이 백마를 타신 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백마를 타신 분의 이름 때문입니다. 11절에 그분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충성되고 진실하신 증인이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드림으로 끝까지 충성하셨습니다.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만 예수님은 아들로 아버지께 충성하였습니다.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시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통치 방식으로 할 수 있었지만 결코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때 마지못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순종했다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가르치지만 주님은 억지로, 또는 무엇을 얻기 위해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게 순종하였습니다. 자원하여 순종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기쁨으로 섬기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주를 의지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과 신앙을 성도가 갖게 되면 모든 주님의 일을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라도 해서 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백마를 탄자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 첫 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아주 정확하게 계시를 받아 기록하였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우주 만물이 이 말씀으로 인해 창조 되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영광의 모습을 죄인들이 보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보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자들인지 여기에서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인간의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무엇인가를 꼭 보아야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큰 은혜를 입은 것처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은혜를 소유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들이 생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어린 양의 피에 있습니다. 이 피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린 옷을 입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이 축복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는 의미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서 영광의 옷을 입고 관을 쓰고 계신다고 사도들은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 흘린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흘리신 그 피를 믿는 그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믿는 자가 어린양의 신부인 것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압니다. 12절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다”는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홀로 그 이름을 지니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이름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 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옷과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는데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시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신 분임을 자신의 신부들에게 말씀하여 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하는 이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주 예수께서 단순히 예루살렘만을 심판하시고 주변 나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분이 아님을 성도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으로 이제는 세상 모든 나라들까지도 통치하시고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1세기만 아니라 이후 모든 시대에 거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주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통치하시고 있는지 또한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들에게 주님의 통치 방식에 대하여 말씀하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온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이란 바로 복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 검에 비유하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고, 이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국을 말씀으로 다스리고 통치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기록된 성경을 읽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에 갇혀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늘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언제나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알았던 프란시스 쉐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늘 말씀으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능력보다 더 위대하고 뛰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대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통치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에 주님이 세상을 다스리신 방식은 오직 자신의 말씀, 즉 복음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것은 복음의 위대한 능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계속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여전히 불신 세상의 권력자들이 세워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역사하시는 분은 분명 주님이십니다. 복음으로 사람들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천사가 이 태양 안에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외칩니다.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자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맺을 때 저주에 대한 내용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28:26). 조금 어려운 부분이 될 수 있지만 우리가 구약의 성경을 이해하면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겔 39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한 이방나라에 대하여 심판하실 때 이와 같은 내용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공격한 모든 세상의 나라와 민족과 왕들과 장군들과 용사들을 다 심판하시고 다스리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민족을 이렇게 다스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 구약에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들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통치역사 입니까? 자신들은 늘 이단자들이라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방의 개보다 못한 자들이라고 그렇게 업신여김을 당하였는데 지금 사도 요한이 구약에서부터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이 동일하게 예수님을 통해 증거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으니 이 보다 가장 위대한 위로와 구원의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부분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 모든 권세자들을 다 통치하시고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단지 심판하시는 것으로만 깨달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정결과 회복을 위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땅의 시체들을 먹는 것은 저주의 심판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죽은 시체를 먹음으로 땅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세상을 통치하고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통해 정결함과 회복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늘 대적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합니다. 그래서 짐승과 땅의 왕들이 말 탄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위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늘 시대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나타나서 교회와 성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짐승이 잡히고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와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쫓았던 사람들이 유황불에 던져지고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승리하고 복음은 늘 이긴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을 행한다고 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심판에 때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해도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거짓 그리스도는 언제나 시대마다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표적과 함께 자신들이 정당한 하나님의 사도들이고 목사들이라고 계속 주장합니다. 표적이 없으면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쉽게 말해 별 볼일 없는 그런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이단집회에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이는지 그 이유가 바로 표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거짓으로 표적을 만들었든지 아니면 기적이 일어나든지 간에 사람들은 그런 현상에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늘 거짓 선지자들에게 표적을 나타내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이단인 이슬람에는 엄청난 표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은 말 탄자의 입에서 나오는 검, 즉 복음으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산을 옮길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심성에 불을 지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께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아들의 신부로 초청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큰 잔치 가운데 심판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이방나라들까지 심판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또한 1세기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린 분이 주님이십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세대에도 주님은 늘 살아서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며 심판의 주로 언젠가는 재림하여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복음의 검을 통해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의 통치 방식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주님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부들에게도 계속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 항상 복음을 듣고, 복음을 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끊임없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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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557&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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