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개신교 예배 과연 정상적인가??

예배학

by 김경호 진실 2017. 12. 10. 23:11

본문

개신교 예배 과연 정상적인가??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는 심각한 세속화를 겪고 있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예배를 사람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허다하다.

각종 개강예배, 신입생 환영예배, 출판 기념예배, 각종 헌신예배, 개업예배, 추도예배, 생일예배, 이전예배, 직분 임직예배, 각종 절기예배, 돌잔치 예배 등 수 없는 성도의 일이 예배의 목적이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일이 목적이 되자 결혼 축하예배 등으로 사람의 의식을 예배로 만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배당 신축예배 그리고 교회 몇 주년 예배 등은 하나님만이 홀로 받으시는 예배를 사람들의 행사로 바꾸어버리고 사람이 하는 목적에 따라서 예배가 만들어지게 된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자연히 감사의 공적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만들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른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적예배가 되려면 예배에 어떤 개인이나 사람의 조건이 없어야 한다. 사람의 일이 조건으로 붙으면 예배는 사람의 공로로 드리는 행위가 나타난다. 자기 건물을 지었으니 감사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행위는 예배에 그 사람의 건물에 대한 행사목적이 추가된다.(개인적으로 감사하고 찬양할 수는 있으나 공식적인 예배는 될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을 만들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요구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마음으로 몸으로 드리되 시와 찬송과 감사의 고백과 기타의 행위로 경건하게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순수성이다.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런데 예배에 사람의 일이 추가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예배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의 순수성을 상실한 것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에서 출발한다.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공적예배의 장면을 살펴보라! 사람의 일이 추가되는 장면이 있는가??
대부분 시와 찬송과 경배와 감사와 기쁨의 고백 등이다. 이렇게 예배는 성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자의 영적인 신앙행위이다. 계시록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장면은 인간의 어떤 것도 추가되지 않고 그가 홀로 영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몸으로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헌금이 예배의 한 요소라면 물질만이 아닌 마음을 드리게 된다. 즉 헌금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에 예배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기도가 예배의 요소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입술로 하는 마음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찬송이 예배의 요소가 되는 것은 찬송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목적에 의해서 찬송과 기도와 감사 등으로 구성된 것이 정상적인 공적예배이다. 이와 같이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하나님의 예배이다.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목적이 바꾸어지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이 이상한 찬송대회이다.(행사로 전락)

하나님께서 먼저 예배의 목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조건은 사람의 행위나 기타 어떤 것도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예배는 하나님의 요구이며 명령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땅히 예배의 조건이 하나님의 요구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요구에 순종해서 드리는 것이 순수한 예배이다.

우리는 예배의 조건이나 의미를 만들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받으신다는 것이 참 목적이며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는 하나님의 요구보다 사람의 요구와 목적이 앞선다. 축하예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굴 축하한다는 말인가? 예배에 사람을 축하하는 것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예배의 회복은 우리의 출발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의 회복이다. 사람의 축하할 일이 있어서 예배가 되거나 예배의 제목이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는 분이며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입장이다.
예배를 드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임으로 예배의 목적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요구하는 것 외에 우리가 어떤 목적을 정해서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추도예배와 장례식예배 등 사람이 죽은 것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이상한 예배이다. 추도식이며 장례식은 될 수 있지만 예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서 죽은 자들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했는가?? 예배당을 건축해서 봉헌 건축예배를 드리라고 말했는가?? 지교회가 오래되었다고 몇 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명하셨는가?

이미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벌써 시작되었다. 모든 지 교회와 미래에 오는 모든 교회는 이미 사도로 세워진 교회의 터 위에서 나타나는 것뿐이다. 그런데 지 교회 들이 예배를 지교회들의 목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면 사도들이 세운 교회를 두고두고 예배를 드려도 된다는 논리가 정당화 된다. 혹시 그래서 오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성령이 오신 것을 두고서 예배를 드린다니 말이 안 된다.

카톨릭도 이미 우상화가 되어서 예배를 사람의 목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의 업적에 의해서 거룩한 자라고 성인으로 호칭하면서 부르게 된 것이다.
개신교는 신약성경에서 거부하는 온갖 절기를 만들어 놓고 또 예배가 아닌 것을 예배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상당히 벗어난 한국교회가 스스로 잘못을 찾기는커녕 개혁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이다.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는가??

십일조가 성경적이지 않는 것이라고 외쳐도 교회의 절대적인 예산으로 십일조 주장한 사람을 제명시킨 한국교회이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한국교회 총체적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것에는 누구도 의심이 없지만 막상 현실이 그렇게 어려우니 타협하자는 식이다.

예배도 타협의 대상인가?? 하나님께 진실로 드리는 헌금도 타협의 대상이라는 것인가?
특히 교회를 나누는 행위는 정당화 하면서도 개혁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는 한국교회이다. 참으로 개혁을 원한다면 우리가 스스로 나서야 한다. 혹시 성령이 홀로 개혁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가? 하나님이 교회를 스스로 정화시킬 것으로 믿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는 믿음이라고 했다. 행함이 없는데 하나님이 홀로 교회를 살려주신다고 보면 착각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 한국교회는 거짓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서야 한다.
이방의 종교도 한국교회 정도는 충성을 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슬람과 회교 국가를 보라 그들의 열심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교회 참으로 종교적인 열심을 버리고 참으로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종교적 열성은 이미 유대인과 카톨릭에서 우리가 익히 보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진 자들로 살아있는 믿음과 신앙이 나타나야 한다.

실재로 그렇게 나타나면 이방의 종교들과 엄격하게 구분되고 그들은 감히 우리의 참 신앙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진정으로 한국교회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세상에서의 나그네 된 삶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신앙 그리고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신앙과 종교생활은 이방의 종교들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참으로 변화할 것이라면 성도들에게 이 세상은 잠간이며 하늘에 소망을 품게 해야 한다. 우리가 어찌 하늘의 구원과 세상의 향락을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성도가 진정으로 하늘에 소망을 보면 그는 오늘 죽어도 소원이 없는 영적인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신앙이 있다면 그는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제 아시아 최대의 복음 선교지인 중국이 서서히 문을 걸어 잠그려고 한다. 우리는 몇 년 동안 중국에 대한 물적 질적으로 선교에 투자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회가 없어져 간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교회의 헌금을 자기 교회의 운영이나 방만한 지출로 대부분 사장시킨 것이 범죄가 아니라고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것인가?

물론 한국교회 선교비가 얼마 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생색을 낸 것이 사실이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과 행위로 나타나는 헌금은 분리될 수 없다
교회세우고 짓는데 열심인 한국교회가 무슨 선교에 대해서 얼마나 믿음으로 투자를 했다는 것인가?? 교회 예산의 70%를 선교비로 사용해도 아쉬워하는 마음이 선교의 마음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전체 헌금의 예산에 2%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선교했다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이 비웃을 것이다.(국내선교를 제외하면 더 적을 것이다. 그리고 성도 개인에게 적용시키면 개인의 선교헌금은 자신이 여가지출에서 사용하는 것에서 겨우 약 0.5%나 될까??=개인적 추정?) 지금이라도 교회는 스스로 가난한 자처럼 되어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나라에 식량을 무기로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다. 지금까지 미루어왔던 것도 억울한데 언제까지 국내선교에 목숨을 걸려는 것인가??

이제는 70년 동안 목사배출 그만해야 한다.(70년 이후는 100세 이상 장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방의 종교처럼 성직으로 생계를 누리는 것이 성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헌금이 비상식적인 이유로 허비되고 있어도 목사배출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20명의 성도가 1명의 목사를 책임져야 되는 이상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어차피 성직의 길을 가려한다면 최저 생활비로 생활하게 하는 극단의 처방이 요구된다.
한국은 이미 포화상태이다. 해외로 나가서 선교사가 된다면 몰라도 목사가 되는 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이 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거짓을 벗고 진정한 개혁으로 나간다면 지금의 헌금보다 배는 증가할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세상이 깜짝 놀란 만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열정과 헌신이 나타난다면 헌금의 액수는 믿음으로 따라오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교회의 헌금예산보다 수배는 될 것이고 선교비는 70% 이상을 하게 된다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선교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단순히 선교를 위해서 또는 예배를 위해서 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 스스로 살아나는 축복이고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통해서 세계를 품으려는 원대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스스로 깨우치고 일어나야 한다. 더 이상 세상의 것에 교회가 종속될 이유가 없다. 교회는 최소한의 경비를 제외하고는 세계의 넓은 선교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반쪽나라 한국교회에 거는 기대가 아닐까??

한 순간에 나라가 망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에 한국이 언젠가 망한다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심판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단들이 돌아오는 것과 지금 나누어진 교회가 하나로 화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은 것이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
우리가 잠자든지 혹은 깨어있는지 하나님은 아신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다.
한국교회 무엇을 거두고 있는가?? 교인 수를 거두었다고 자랑할 것인가?

종교의 확산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다. 우리가 빠른 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경제성장도 그렇고 종교성장도 그렇다. 적절한 때에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복음전파는 우선 기회가 좋았다. 반공사상으로 다른 기존 종교나 사상들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는 것이 적절했고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과 서방의 경제와 군사원조가 절실했다는 것은 기독교를 확산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물론 해방이전부터 기독교의 뿌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제의 학대와 남북전쟁은 한국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고 기독교사상이 쉽게 내린 결과이다. 하나님의 작정이었다. 이러한 결과와 함께 한국인의 종교적인 열성도 한몫했다는 것은 부흥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서방에 대한 비판보다는 오히려 서방에 의존하려는 것이 강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의존적인 한국인에게 기독교외에 다른 종교는 없었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개척정신과 같은 새로운 민주사회 개발논리는 새로운 기독교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 치열하게 싸웠으니 그들의 혼란이 얼마나 크게 나타났겠는가? 그런 혼란은 기존의 것보다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데 충분한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성장은 이렇게 환경적인 조건을 하나님이 예비한 것이 사실이다. 과거 이성계 시대에 복음이 들어 올수 없었던 것은 환경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이 쉽게 들어오게 하는 기초로 일제의 압제를 이용한 것이고(기독교의 특성은 압제 속에 오히려 저항하면서 뿌리를 내림) 그리고 전쟁으로 사회가 개방에 대해서 급물살을 타게 되면서 기독교도 함께 강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스스로 잘해서 부흥했다고만 자랑한다면 오늘의 교회가 과연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과는 별개이다. 예수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들 수 있다고 한 것을 기억하자.

 

 

 

https://www.cjob.co.kr/mission/2217.html

 

 

 

한국교회 예배의 세속화와 선교의 현실/김인찬목사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