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의 분리와 연합
로마 카톨릭교회는 중세기로 오면서 두 번째 분열의 위기를 겪게 된다. 직접적인 동기는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가 제기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에 있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는 면죄부 사건과 관련해 로마교회의 구원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의 가르침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 원칙이 되기보다, 그 권위를 인간인 교황에게 둠으로써 제도와 전통적 권위를 우선하는 카톨릭교회는 많은 문제를 낳게 되었다. 루터는 시간이 지나면서 중교개혁의 기치 아래 더 많은 동조자를 얻게 됐고, 종교개혁은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과 연관돼 구라파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수차례에 걸쳐 로마 카톨릭교회는 교회일치를 위한 프로테스탄트들과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끝내 연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교황의 절대적인 통치제도와 성경의 권위, 그리고 성만찬의 화체설이 서로 간에 좁혀지지 않는 논쟁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인 독일의 루터교회가 로마 카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된 것은 1555년 9월 칼 5세에 의해 소집된 아욱스부르그 국회에서 이끌어진 아욱스부르그 종교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다. 물론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1618~1648년에 있었던 30년 종교전쟁을 치른 후 베스트팔리아 조약을 체결하면서 로마 카톨릭교회는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교회로서 루터파교회와 개혁파(칼빈)교회를 인정했다.
프로테스탄트교회 역시 하나의 교회로 통일되었거나 교리에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루터파와 칼빈파교회로 나누어지는 불행을 겪게 된다. 교회의 통일을 방해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성찬에 대한 이견들 때문이었다. 1529년 말브르그에서 루터와 쯔빙글리가 프로테스탄트의 연합을 위해 서로 만났으나 성찬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좁히지 못하고 서로 분열했다.
칼빈은 역사적으로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거와의 사이에서 성찬에 대한 입장을 통일시키고 서로 신앙고백서에 합의 서명했다. 그러나 이것이 다시 독일 루터파교회의 대표들 사이에 논쟁으로 이어진다. 루터파의 대변자였던 베스터팔은 칼빈을 비난했고 이로 인해 서로는 나뉘어졌다. 특히 그 당시 루터파교회에서는 루터의 후계자인 멜랑히톤과 ‘루터의 순수 직계파’로 자칭하는 대표자 베스타팔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 그 원인은 멜랑히톤이 이미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 부쳐, 칼빈과 함께 아욱스부르그 신조를 약간 변화시킨 콘페시오 아구스타나 바리아타에 서명한 데 있었다. 즉 그것은 멜랑히톤이 루터 성만찬의 가르침인 공재설을 부쳐와 칼빈이 공감하고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는 그가 종교개혁 무리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파의 직계들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교리적인 변절로 보였고, 멜랑히톤을 루터파에서 축출하기에 이른다. 물론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성찬에 대한 논쟁은 역시 베스트팔과 칼빈 사이에서도 심각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칼빈이 죽고 난 후 루터파에 대항해 불링거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연합을 위한 성만찬 이해의 통일을 추진하고 마침내 1566년 헬베틱 신조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스위스 개혁교회의 일치를 보여준 중요한 신앙고백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심각한 분열에도 불구하고 부쳐와 멜랑히톤처럼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정신을 가장 많이 보여줬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과 입장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특별히 칼빈이 교회의 하나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트리엔트 종교회의를 통해서였다. 약 18년 간 계속됐던 트리엔트 종교회의 기간 동안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자로 활동했다. 칼빈은 이러한 종교회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4권 제1장의 제목에서 벌써 교회의 하나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것은 참된 교회에 관한 설명으로 참된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므로 우리가 그 교회와 더불어 하나됨을 유지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칼빈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말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교회관은 교회를 제도나 기구로 보는 개념적 이해에서 출발해, 루터와 다르다. 그리고 화란의 칼빈신학자 보아텍은 칼빈 교회론의 특징을 유기체 개념과 신자의 양면을 연결시킨 점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 때문에 교회의 하나됨의 노력은 칼빈에게는 성취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켜야 할 법으로 이해됐던 것이다. 그는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갈라놓을 수 없듯이 교회가 둘 혹은 셋으로 분열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나누어질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분열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서로 분열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다는 결과”라고 그는 덧붙였다.
이와같이 칼빈은 교회의 하나됨에 있어서 분명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됨의 실현을 위해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칼빈은 마지막까지 카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1540년 하게나우(Hagenau)와 1540~41년 개최된 보름스 종교회의, 레겐스부르그 종교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다. 이 모든 노력들이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과의 하나됨을 위해 힘썼던 노력의 역사적 사건들이다. 이 외에도 칼빈은 교회의 분리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에 대해 처음부터 신경을 쓰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첫째는 프랑스의 황제 프란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다. 둘째는 1539년 사돌렛 추기경 앞으로 보낸 그의 유명한 답변서에서 칼빈의 교회 하나됨의 입장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로마 카톨릭 사람들은 내가 교회를 버리고 떠났다고 비난하지만, 나의 양심은 전혀 나를 고발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패잔병들이 패주하고 흩어지며 대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부대장의 표준을 높이 들고, 이들에게 원대복귀하라고 부르는 탈영병과도 같기 때문이다. 오 주님! 이처럼 당신의 모든 종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당신의 명령을 전혀 들을 수 없고 거의 자신들의 부대장, 자신들의 의무 및 군 입대시의 서약을 잊었나이다. 나는 흩어진 이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낯선 표준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백성으로 머물기 원하는 한, 따라야 할 당신의 고상한 기치를 높이 들었나이다. 그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열 안에 계속 있게 해야 할 자로, 이들을 흩어버린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내가 전혀 단념하지 않고 있을 때 이들은 폭력으로 나를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서글픈 소요가 일어났고 싸움이 불붙어 폭발했습니다. 오 주여! 과연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할지 당신이 판단하소서. 나는 일치추구의 열정 때문에 항상 말과 행동으로 항변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교회의 일치란 당신으로부터 시작해 당신 안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우리들에게 펑화와 일치를 천거하실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이 일치와 평화를 유지케 하는 유일한 결속의 끈이심을 보이셨습니다.”
이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칼빈은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다스리시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이며, 그 참된 교회 안에서만 하나됨이 가능하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칼빈에 따르면 유일한 참된 교회 안에 보편적인 교회와 개별적인 교회가 구분된다. 이 둘은 물론 가시적인 교회이다. 보편적인 교회는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고, 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하나님의 참된 교리에 동의하고 같은 신앙의 매는 줄로 뭉쳐 있는 교회를 말한다. 이에 비해 개별적인 교회는 마을과 도시에 사람들의 수에 따라 필요한 대로 나누어진 교회를 뜻한다. 그리고 칼빈의 교회에 대한 중요한 이해 가운데 또 한 가지는 구체적인 지역교회 내에서 교리가 일치해야 하지만 교회들의 상호관계에서는 교리적인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교리의 공통성이라 할 때 개개인의 신앙표현이 모두 동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매사에 확실하고 의심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교회들 간에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신앙의 하나됨을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계속>
정일웅 박사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44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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