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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진리 회복으로서 개혁은 역사적 실천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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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진실 2018. 1. 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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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진리 회복으로서 개혁은 역사적 실천이어야 한다

[특별기고] 개혁사상 부흥운동 인사이트 (insight) 개혁주의 역사관

① 진리 회복으로서의 근본적 개혁





개혁자들의 과제는 단순한 외형의 개선이 아니라
담대한 복음의 선포를 통한 근본적 개혁이었다



1. 개혁주의의 역사적 배경


▲ 김요섭 교수
·총신신대원·역사신학
·개혁사상부흥특별위 전문위원

개혁주의는 항상 개혁적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개혁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분명한 신앙고백과 그에 입각한 실천을 통해 교회사 속에서 전개된 역사적 전통의 사상체계와 실천 노력들을 의미한다. 주로 취리히를 시작으로 스위스의 독일어권 연방 도시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개혁파 종교개혁은 불어권 스위스의 도시 제네바에서 칼빈이라는 탁월한 개혁자를 통해 그 완숙한 형태를 제시했다.

이 전통을 이어받은 개신교 내의 후계자들이 칼빈주의라는 명칭보다 개혁파(Reformed Church)라는 명칭을 더 선호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루터파처럼 그들이 기념하는 영웅적 지도자의 인명이나 로마가톨릭처럼 전통과 법통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특정 지명이 아니라, 마땅히 올바른 신앙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목적을 반영한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2. 종교개혁의 의미


 개혁파 교회가 제시하고 실천하려 했던 ‘개혁(reformation)’은 무엇이었을까? 역사적 개혁주의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16세기 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종교개혁’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살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에게 개혁의 문제는 인문교양 증진이나 교세 확장, 혹은 사회의 변혁보다는 종교(religion)의 문제였다. 16세기 종교란 곧 ‘경건’이며 ‘신앙’이었다. 칼빈은 기독교 종교의 핵심을 설명하기 위해 저술한 <기독교강요>에서 순전한 신앙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진지한 두려움과 하나가 되어 이로부터 마땅한 공경심이 나타나서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개혁의 대상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이해와 합당한 태도의 문제였던 것이다.


①단순한 개선 아닌 근본의 개혁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이 원했던 종교의 개혁은 무엇이었을까? 15세기 말에 이르러 새로운 사회적 변화와 영적 필요에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고 판단된 로마가톨릭의 위계와 스콜라적 세계관에 대한 변화의 시도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위클리프와 후스, 사보나롤라와 같은 중세후기 선구자들보다 실제로 16세기 종교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선도적 비판과 대안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부응해 이에 적합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미래지향적인 세계상을 그려냈다.

먼저 이탈리아의 신지식인들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교황청의 그늘 아래 진행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관의 내용과 방향은 여전히 로마가톨릭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비해 알프스를 넘어서 전달된 북부 유럽의 인문주의는 더 진지하고, 더 현실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당시 서구 문화가 기초하고 있는 원자료에 집중했다.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단연 신구약 성경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라틴어로 변조되었다고 여긴 스콜라 신학의 벌게이트가 아닌 그 원본 헬라어 신약과 히브리어 구약을 파고들어 그 본래의 메시지로 당시 왜곡된 종교와 타락한 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에라스무스는 탁월한 성경 연구와 신랄한 비판적 수사법, 그리고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활발한 국제적 활동을 통해 북부 유럽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517년 95개조를 통해 면죄부 판매의 오류를 지적했던 루터는 어떤 의미에서 인문주의의 아들이었다.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루터가 대표하는 종교개혁자들의 길은 에라스무스가 대표하는 인문주의자들의 길과 달랐다. 두 진영의 충돌은 1520년대 두 사람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분명해졌다. 평화를 사랑했던 에라스무스는 긍정적인 인간상 위에서 종교의 ‘개선(Improvement)’을 원했다. 그는 자유의지는 타락해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잘 가르치고 따른다면 신앙의 개선과 사회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루터는 다른 인간관을 가졌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의 의지는 타락 이후 더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뜻에 따라 전가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 외에는 어떤 변화도 불가능하며 심지어 깨달을 수도 없다. 루터의 이런 비관적인 인간관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강조는 자신의 신앙 체험의 산물이 아니라 성경에서 다시 발견한 복음의 진리였다. 개혁자들의 과제는 단순한 외형의 개선이 아니라 종교와 신학의 근본의 개혁이었다.

기독교 종교의 근본적 개혁에 대한 이해는 루터파만의 것이었다. 개혁파 역시 같은 이해를 공유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 논쟁이 벌어진 20년 뒤 제네바에서 칼빈은 로마가톨릭 논객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긍정론에 맞서 논쟁을 전개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돌이키거나 깨달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의인은 하나도 없다. 구원과 변화의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개선의 촉구가 아니라 담대한 복음의 선포를 통한 개혁이었다.

‘이신칭의’는 단순한 사자성어나 신학적 논변을 위한 화두가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믿음만이 성경이 가르치는 온전한 신앙과 참다운 종교의 토대임을 선언하는 고백이었으며, 당시 종교가 보여주고 있는 오류의 근본을 비판하는 개혁의 초석이었다. 인문주의의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인간론과 결별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철저하게 고백했을 때, 종교개혁이 추구하는 ‘개혁’의 내용과 방향이 분명히 드러났다.



②급진적 재건이 아닌 진리의 회복


16세기는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 모든 것은 일단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세력도 등장했다. 비록 다양한 의견과 방향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보통 ‘재세례파’로 불린다. 급진세력의 대부분이 유아세례가 구체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여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문제로 삼은 것은 유아세례만이 아니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제도나 형식을 갖춘 예배제도도 거절했다. 세르베투스 같은 인물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며 이 교리를 공인한 ‘니케아 신조’ 등 성경적인 신앙고백도 부인했다. 그들의 성경해석은 직설적이었고, 행동은 과격했다. 많은 재세례파들은 성경에서 읽고 느낀 내용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세계관은 극단적 종말론이었다. 그들은 이제 곧 임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악한 세속 사회로부터 전적으로 단절되어 온전하고 순수한 공동체를 유지하려 했다.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교황청이건 개신교이건 모두 적그리스도로 규정했다.

재세례파의 급진적인 재건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위험했다. 순수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실천은 단편적이었으며 주관적이었다. 급진세력의 편협한 주장과 과격한 행동은 종교개혁자들이 볼 때 자신들이 추구했던 개혁의 취지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었다. 큰 위기감을 느낀 루터와 츠빙글리는 각각 독일의 농민반란 세력이나 스위스 재세례파를 비판하면서 이들에 대한 세속 정부의 탄압을 옹호했다.

재세례파가 취리히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20년 후 칼빈은 차분하게 급진세력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했다. 칼빈이 볼 때 재세례파의 급진적 주장은 지나치게 당대의 문제를 비판하다가 성경의 가르침과 달리 소극적으로는 전적인 단절, 적극적으로는 과격한 혁명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들이 바랐던 완전한 순수함을 바른 신앙과 성경해석의 기준으로 삼아 버린 데 있었다. 결국 재세례파의 문제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읽어내려는 데 있었다. 이와 달리 개혁신학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로부터 스스로와 시대를 바라보며 해석하려 했다.



3.지속해야 할 개혁의 기초


 종교개혁자들이 표방한 개혁은 일종의 타협안이나 중도의 길이 아니었다. 역사적 개혁주의가 말하려 한 개혁은 바른 신앙의 회복(recovery)이었다. 그리고 이 회복이 돌아가야 할 기초는 기록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를 계시한 신구약 성경이었다. 지켜내야 할 기득권에 눈이 어두운 자들이나 반드시 뒤엎어야만 하는 자기 의에 빠진 자들에게는 성경 진리의 회복으로서의 개혁은 너무 이상적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개혁주의는 바로 이런 개혁에 대한 이해에 충실하려 한 역사적 고백이며 실천이어야 한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있어서도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죽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보다 선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확실한 길이 될 것뿐 아니라 우리의 피가 지금 사람들로부터 경멸받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확산시키는 씨앗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회개혁의 필요성>(1543)에서 칼빈이 말한 종교개혁에 대한 고백으로서, 개혁주의가 지향했던 개혁의 목적과 방향을 잘 대변해 준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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