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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나 자문해야 한다

목회

by 김경호 진실 2018. 1. 2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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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에게 희생과 봉사는 특권이며 본질 … 죽을 힘 다해 성경을 보고 설교 준비에 힘써야
성경적 삶과 영혼 사랑이 교회를 살려 … 성경 교훈과 책망으로 바르게 하시는 유익 얻어라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폭력과 억압으로 해결될 국면이 아닌 위기상황이었다. 노마지지(老馬之智), 노마식도(老馬識道)라고 하지 않았던가! 솔로몬과 함께 했던 원로들은 시국을 읽는 지혜가 있었고, 르호보암에게 길을 일러 주었다. 그러나 상황은 비극으로 이어졌다. 미련함에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 .박희천 원로목사는 ‘희생’과 ‘설교’는 목회자에게 주어진 특권인 동시에 사명이라고 강조한다. 목사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할 때, 교회와 시대를 살릴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은 아흔에 도달한 나이에도 성경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애쓰는 삶이 있기에 무게감은 달랐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였던 작년 경제정의실천운동에서 시행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20.2%에 불과했다. 전국의 남녀 1000명에게 전화로 조사한 결과인데, ‘교회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응답은 51.2%에 달했다. 어떤 변명과 설명도 이 상황에 대한 해명과 위안이 될 수 없는 부끄러운 성적표다. 한기총, 한교연, 한장총 등 난립하는 연합기관들, 그리고 그들 간의 심각한 대립과 갈등, 세상 정치 뺨치는 교단정치의 추한 면모, 그리고 이해와 관용이 사라진 개교회 안에서의 대립과 분쟁의 처참함을 돌아보면 그러한 점수라도 받은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길은 어디에…”라는 심정으로 하늘을 보게 되고, 목사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신자로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스러운 마음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새해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 이런 고민을 안고 내수동교회의 원로이신 박희천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박 목사님은 1975년부터 1998년까지 23년간 내수동교회를 담임하시고, 28년 동안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헬라어와 설교학 등을 가르치신 한국교회의 원로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고 연구하는데 남다른 애정을 가진 분이시다. 본인은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인하시지만, 오정현 오정호 송태근 김남준 박성규 화종부 이관형 박지웅 목사 등 걸출한 목회자를 길러내신 목회자이다. 올해 92세가 되신 고령이시지만 한국교회와 후배들을 위한 대담이라는 말에 일종의 사명감을 지니고 만남을 허락하셨다.


그의 자서전 <내가 사랑한 성경>에서도 언급하셨듯, 오랜 시간 박 목사님을 도와 함께 교회를 섬긴 사모님께서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햇볕이 잘 드는 거실 창가 작은 책상 위엔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성경을 필사하던 노트와 낡은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누가 쓰시는 노트냐?”는 질문에, 사모님은 소녀같이 부끄러운 대답을 하셨다. 가난한 전도사의 아내로, 또 남편이 유학을 간 시기에는 어린 세 자식들을 부양한 어머니로, 수많은 성도들의 어머니와 같은 사모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오신 이력을 그 온화한 미소에서 읽을 수 있었다.


▲ 내수동교회 박희철 원로 목사

박 목사님과의 대화는 ‘목사’, ‘설교’, ‘교회’를 주제로 이어졌다. 오늘의 현실에서 목사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고, 목사에게 있어서 특권이자 무거운 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설교, 그리고 목사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교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의 자질과 관련하여 박 목사님은 ‘희생’과 ‘봉사’라 강조하셨다. “오늘날 교역자들에게 이 정신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50년대에는 목회자와 가난은 동의어였습니다. 목회자들이 어떻게 옷을 해 입습니까! 미군 구호품 받아서 그것을 줄여 입는 것이 목사들의 정장이었어요. 보리밥에 된장이 주식이었고, 자기를 희생하며 교인들을 돌보았습니다. 교인 가운데 임종을 맞은 사람이 있으면 사흘 밤도 그 곁을 지켰습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희생과 봉사로 그들을 돌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목회자의 자질이라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자기인식, 즉 어떤 자화상을 가지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한때 한국교회는 목사를 기업의 CEO(Chief Executive Officer)와 같이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오늘날도 마케팅 처치(Marketing Church)에서는 그러한 인식이 남아있다. 정책을 결정하고,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추진해 가는 경영인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러나 목사는 희생과 봉사의 심정으로 양 떼를 돌보고, 양육하는 목회자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 교인의 수가 많아 담임목사가 일일이 성도들을 돌보지 못하고 부목사에게 위임하더라도, 그 중심에는 양 떼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부교역자들이 귀담아 들을 말씀이 있었다. 박 목사님은 웃음을 띠시며 심방에 관한 말씀을 하셨는데, 심방에는 네 종류가 있다고 하셨다. 첫째, ‘우편배달부 심방’으로 편지만 문 앞에서 전달하지 그 집의 사정이나 형편은 돌보지 않은 형식적인 심방을 의미한다. 둘째, ‘사교적 심방’. 영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심방하는 것이 아니라 밥을 얻어먹고 교통비 받는 수준의 심방을 말한다. 셋째, ‘정치적 심방’으로, 교회의 유력한 사람들을 찾아 만나는 심방을 의미한다. 넷째, 영혼을 돌보는 참 심방인 ‘목회적 심방’이 있다는 것이다.


박희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한다. “오늘날 예수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덕을 보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받고 희생하고 봉사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과거 우리 선배들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생과 멸시, 희생, 망신, 모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목회를 하셨다. 일제시대,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전국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피난 대신에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순교함으로 교회를 지켰다. 순교신앙이 교회에 있었다. 최근 정부는 목회자들을 ‘종교인’이라고 부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영리활동을 하는 ‘기업인’ 혹은 ‘봉급생활자’로 규정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 즈음에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 대전남부교회 류명렬 목사

나는 원로에게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목사가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노력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거침없이 ‘성경’이라 하셨다. “성경을 예사롭게 봐서는 안 됩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요즘 인터넷이 사람을 죽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만만한 책이 아닙니다. 제가 70년 동안 성경을 읽었지만, 겨우 태산의 한 귀퉁이, 한 자락을 긁적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과 신학이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학교 3년 동안 성경을 배우지만, 졸업하면 성경유치원에 입학하였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목사가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노력해야 할 부분은 단연 성경연구과 설교라고 박희천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내수동교회가 청년과 젊은이로 유명했고, 교회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었기에 “교회의 생명력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느냐?”는 질문을 드렸다. 그는 직답을 피하셨지만, 대답의 핵심은 성경과 말씀에 있었다. “주의 궁전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시편 84편 10절 말씀처럼, 주의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는 주일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 보다 나아야 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말씀을 준비하고, 성도들을 양육하셨다고 한다.


그는 말씀에서 어긋나고, 본문과 관련이 없는 강론, 성경을 무리하게 뒤틀어 왜곡하는 오늘날 강단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깊이 있는 성경연구와 강론의 중요성을 말씀했다.


목회 초기 토요일 아침부터 주일 새벽 2~3시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설교 준비를 위해서 노심초사하면서 고생하셨다는 박희천 목사님은 설교의 한 가지 비결을 깨달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책 <성경적 설교론>에 나와 있지만, 핵심은 2가지 기둥에 있다. 첫째는 ‘자료 발굴’이요, 둘째는 ‘전개’이다. ‘자료 발굴’이란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박희천 목사님의 ‘자료 발굴’은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의지함에 있다. “성경을 읽다가 성령께서 내 눈을 밝혀 까맣게 인쇄된 글자 속에 숨어있는 성령의 숨은 뜻을 나에게 보여 주세요. 그것이 설교의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이용하여 성경의 권위를 배경으로 자신의 뜻과 논리를 펼치는 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대언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전하는 것이다. 전령의 권위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낸 자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박희천 목사님의 설교는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의지하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전달하는 바른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젊은 날 박 목사님께서 경험했던 고난을 똑같이 겪고 있다고 고백한 나에게 그는 동병상련의 측은지심을 가지셨는지, 방에서 노트 한 권을 가지고 나오셨다. 거기에는 자신이 성경을 읽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었다. 마치 암호와 같이 기록된 수많은 성경 구절들 가운데 아직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수많은 보물들이 묻혀 있었다.

그의 설교론의 두 번째 기둥은 ‘전개’이다. ‘자료개발’이 무엇을 전할 것인가의 문제라면, ‘전개’는 어떻게 전할까의 문제이다. 설교의 논리적인 부분과 전달에 대한 고민이다. 박희천 목사님은 그 부분을 비현실적인 예화나, 비역사적이고 비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논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전개방식을 말씀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말씀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성경에서 찾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세상적 지식이 증가하고, 설교 기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목회자들에게는 크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을 강조한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호랑이를 보고, 또 동물원에서 본 호랑이를 본 것을 전하는 것과 산에서 직접 자기 눈으로 본 호랑이를 전하는 것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은 결코 신비주의자가 아니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 생명력 있는 설교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 지금 교회는 사회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초두에 언급한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신뢰도는 20.2%에 그치고,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10%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교회를 살릴 방법으로 박희천 목사님은 ‘성경적인 삶’과 ‘영혼 사랑’을 말씀하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가운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을 받는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도 오늘까지 성경의 교훈과 책망으로 바르게 하시는 유익을 얻었습니다. 지금의 교회 위기는 어떤 변명이나 목소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모습만이 살 길입니다.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시 34:18)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처럼, ‘말하는 벙어리’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말씀대로 살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내수동교회를 담임할 시절, 주일에 결석한 성도들을 청년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 보살폈던 열정. 그리고 가난한 성도라 하여 소홀하고, 부자나 힘이 있는 사람이라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두 존귀한 자로 여겨 섬겼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교회의 생명력이 어디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판잣집에 사는 사람이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사랑해야 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은 사회에서 차별받는 것도 억울한 데 교회에서까지 차별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교회는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목사가 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쳤다. 우리가 이 시대에 착념(着念)할 것은 무엇인가? 이탈리아 북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기울어져 가는 내 집을 세우라!”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생명력을 탕진한 교회를 새롭게 하였다. 교회는 500년 전 종교개혁의 심장과 같았던 원리로 돌아갈 때 생명력을 회복할 것이다.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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