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편견이다. 독서는 카프카의 주장처럼 도끼가 되어 독자들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카프카의 도끼를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이들이 있다. 편견과 오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이들을 공격하고 비판한다. 집요할 만큼 비판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고신대와 총신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보수교단의 진수다. 재건까지 들이댄다면 한발자국 물러날 수는 있지만 대체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보루인 셈이다. 느지막하게 고신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위한 첫발을 디뎠다. 신학이란 말을 하기가 쑥스럽지만 보수교단의 진수를 배워 나갔다. 고신대학교는 화란개혁주의 전통이 강하다. 적지 않는 교수들이 화란계열의 포체스트롬 출신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바빙크, 리델보스, 게할더스 보스 등의 개혁주의를 배웠고, 책을 읽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의 청교도 계열의 책들도 꾸준히 읽어 나갔다. 로이드 존스로 시작하여,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워필드, 메이천 등의 책들도 읽었다. 특히 로이스 존스의 책은 60권 가까이 읽고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은 대부분 읽었다. 신대원에 올라가서도 그러한 독서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주된 공부는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이었다. 책을 읽고 정리하며 자료를 찾아가는 수준이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조직신학에서는 벌코프, 웨인 그루뎀, 안토니 A. 후크마 등의 개혁주의 노선의 조직신학자들의 책만 읽었다. 다른 책을 읽을 여력도 없었지만 굳이 읽어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변증학은 어떤가. 합동교단은 철저하게 코넬리우스 반틸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반틸적 변증론에 함몰되어있다. 교리사를 통해 배운 것은 이단에 대한 성경적 판단, 정통성의 권위와 가치 등을 세뇌 당했다. 보수교단의 교회사는 교리사요, 교리사는 이단척결에 관련된 것이라 봐야 한다. 교리사의 주된 관심은 '그들은 무엇이 틀렸는가!'이다. 즉 자신과 다른 것, 잘못된 것, 바르지 못한 것을 본다. 이런 의미에서 보수교단의 교리적 사고는 철저히 이분법적이고 구약적이다. 보수교단은 이단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혼합주의와 다원주의, 심리효과나 철학적 사유를 거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기만의 잣대로 열심히 분석하고 해석하고 제단한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책은 바로 이런 책이다. 한결같이 세속주의와 혼합주의에 대하여 근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교리의 순수함과 올바름을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만은 예외다. 권력이다. 권력에 대해서는 한 없이 자비롭고 자상하고 친밀하다. 한국 교회 역사상 권력과 투쟁했던 적은 단 한 번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고 순교를 거부하지 않았다. 극히 일부의 목회자들만-이 단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는 보수주의자다. 혼합주의와 세속주의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동성애나 종교 간의 대화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보수교단이 가진 시대적 착오에 대해서도 역시 거부한다. 보수교단에 몸담고 있으면 불가피하게 보수에 관련된 신앙서적을 읽게 된다. 합동교단에 머물면서 몰트만이나 바르트에게 상냥한 미소를 보낼 수 없다. 반틸이 그들을 잘못된 교리를 가진 이들로 정죄했기 때문이다. 칼빈이 정죄한 재침례파를 친구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배교한 카톨릭이나 혼합주의에 물든 진보주의와도 대화를 불가능하다. 더 날카로운 날을 세워 그들의 정체?를 까발리고 비판하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진리의 말씀을 드높여야 한다. 이곳에서 독서의 프레이밍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다. 프레이밍 효과는 먼저 받아들인 정보에 다음 정보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처음 마음에 간직한 사고의 틀, 사유의 틀로 인해 모든 것이 판단되고 구별과 차별이 이루어진다. 독서도 자동차와 같아 한 번 속도가 붙으면 관성의 법칙에 의하여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계속하여 동일한 방향으로 나간다. 궤도를 벗어나려면 상당한 외부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통섭적 독서가 필요하다. 교리에 파묻히거나 자신의 교단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사고를 뛰어 넘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필자의 경우 고신대와 총신을 다니면서 재세례파에 대한 지식은 철저한 칼빈적 시각이다. 개혁주의자들의 관점에 입각한 눈으로 그들을 받아 들였고, 그러한 이들의 책을 읽고 재세례파를 판단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그 생각은 성경적인가? 개혁주의의 모토 중 하나는 오직 성경으로이다. 최종 권위는 반틸도 아니고, 워필드도 아니고, 칼빈도 아니다. 어거스틴도 역시 아니다. 오직 성경이 최종 권위다. 문제는 최종권위인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는 관심 밖이고 교단을 설립하거나 이론적 모토가 된 이들의 이해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모함은 결국 올바른 시각을 갖지 못하게 할뿐 아니라 그릇된 시각을 더욱 고착화 시킨다. 재침례파가 쓴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카톨릭 신앙을 간직한 카톨릭학자의 관점에서 저술한 책을 읽어야 한다. 누군가의 관점에 의해 재해석되고 짜깁기된 견해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야 한다. 이것이 공평하지 않을까. 이처럼 독서는 편협한 시각으로 일관하는 프레이밍 효과를 주의해야 한다. 필자의 오만인지는 모르지만,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치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소수의 목회자들과 교수들만의 전유물이다. 보스의 성경신학은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없다. 신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책도 공부도 중단하는 게 허다하다. 기껏 공부라는 건 교회성장 세미나 등에 참석하여 전도법과 프로그램 운영법을 배우는 게 전부다. 세미나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래와 같은 독서법을 추천한다. 1.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으라. 2. 자신의 교단 중심의 필독서를 읽어라. 3. 타교단의 책도 읽어라. 4. 인문학 고전을 읽어라. 5. 베스트셀러는 빌려서 읽어라. 정현욱 목사(도서평론가,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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