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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24-29, 광야로 나가자.

믿음

by 김경호 진실 2018. 7. 3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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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지난 수련회에서 광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야는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이지만, 그 광야에서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려 그리고 정결케 하시려하셨고, 더 나아가 우리의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곳으로 사용하셨다.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신명기8:2)라고 광야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심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신명기8:3)셨고, 광야에서의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고, 발이 부릍지 않았다고 모세는 이야기한다(신명기8:4).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광야에서는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고 강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가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을 놓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 즉 자신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시면서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탕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엘리야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갈멜산에서 승리한 이후 탈진한 상황에서 광야로 나갔고, 바울도 광야로 나가야 했던 것이고, 아주 상징적인 것이지만, 광야로 살던 요한은 유대인들을 광야를 거쳐 자신에게 나오는 자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누가복음3:8)라고 말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세례를 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라는 권면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깨달아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2. 광야로 나가는 삶은 라는 삶의 근거를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 ‘는 제한된 삶의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 제한 된 라는 삶의 한계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후 하나님의 심판에 담긴다. , 아담은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의 정황과 만나게 된다. 그런 삶의 정황을 하나님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3:18-19)라고 말씀하셨다. 삶을 위해 싸워야 할 뿐 아니라,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즉 죽어야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다 이렇게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죄지은 아담의 실존을 갖고 태어난다. 이런 아담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를 예수님은 집을 나난 탕자의 이야기로 다시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아버지의 것을 갖고 집을 나왔지만,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소비했고, 결국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무능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만 살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버지께 돌아가는 모습은 아담적 실존을 가진 우리들의 삶의 모습일 것 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심으로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아담적 실존을 믿음으로 깨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복을 입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을 향해 가는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3. 수련회 때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광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광야로 나갔을 때 예상되는 삶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아닌 맘몬에 의존된 삶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6:24)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서 재물은 맘몬을 의미한다. 맘몬은 재물의 신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과 재물을 의미하는 삶과 비교할 때 서로가 비슷해 보인다는 데 있다. 어떤 면에서는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더 나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현대 교회도 혹은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마태복음6:25)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런 삶은 광야로 나갈 수 없고, 맘몬을 섬길 수밖에 없다. 아니면,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려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를 이야기하신다.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는 것처럼, 혹은 들의 백합화처럼 우리를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는 아담적 실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사는 원리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1:2)는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 아담처럼 땀을 흘려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 즉 광야로 나가는 삶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하자.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선교회 대표)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942&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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