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7:13-14 믿음의 눈으로 | |
1.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사람마다 자신이 겪는 일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다. 우리는 민수기13-14장의 12정탐꾼 이야기를 통해 같은 것을 본 사람들이지만, 한쪽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메뚜기’같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도리어 그들을 ‘우리의 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았다. 12명의 정탐꾼들의 이해가 이렇게 극명하게 갈린 이유는 당연히 ‘믿음’에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인간적인 눈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가가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다.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인 에베소서에서도 이런 해석의 차이를 보게 된다. 옥중에 갇힌 바울을 인해 에베소 교회는 낙심했던 것 같은데, 자신이 갇힌 것으로 낙심하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바울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에베소서3:13)’라고 말한다. 자신이 당하는 환난이 복음을 증거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환난이 도리어 에베소 교회에는 영광이 된다는 말이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바울이 당하는 환난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한 결과 광야에서의 삶을 겪은 모세는 40년 동안의 고난을 생각하며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신명기9:7)’해야 하는 삶을 위한 경계로 이야기하지만, 나라의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사는 이스라엘을 향해 선지자는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예레미아2:2)’다고 말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삶의 기준이 된다. 이런 태도는 바울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사람들에게 영광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믿음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원리가 된다. 따라서 믿음은 경험이나 이성을 통해 얻어지는 확신보다 더 강하다. 2. 믿음은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11:2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목자이신 것을 알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안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고, 그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르기를 원하고,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를,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기도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믿음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을 이끌어 가는 원리가 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함을 확실함으로 변화시킨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히브리서11:8)’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삶은 믿음으로만 해석되는 삶이다. 모세에 대하여도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히브리서11:24-25)’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모세의 삶 역시 믿음으로만 해석되는 삶이고, 바울의 삶도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3. 믿음은 오감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인식원리이지만, 그렇다고 오감을 초월하지 않는다. 믿음은 무턱대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과는 다르다. 믿음에는 믿음에 합당한 삶이 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에베소4:1)’하라고 권면하면서, 부르심을 받은 일에 대한 합당한 삶으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4:2-3)’라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는 세상적인 안목에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고, 믿음에 합당한 삶은 때로는 고통과 어려움도 동반하게 된다.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7:13-14)’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삶의 정황 속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11: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오감으로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믿음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희망을 볼 수 있고, 그래서 이사야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한 유다 민족 앞에서 사막에 대로를 내고, 포로로 잡힌 자들이 돌아올 것을 예언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말에 별 반응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오감으로 생각하는 것, 즉 경험과 이성적인 판단이 맞다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의 현실인식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기 원했던 길은 결국 넓은 길이고,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민수기14:35-37)’는 길이었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길은 협착하고 좁았지만‘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민수기14:35-38)’하는 길이었다. 믿음으로 가는 길이 비록 협착하고 차즌ㄴ 이가 적을 지라고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보자. 시선이 하나님께 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선교회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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