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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보여준 기도의 본질과 모범 III> 박동근목사

기도

by 김경호 진실 2018. 9. 14. 10:07

본문

<바울이 보여준 기도의 본질과 모범 III>

가장 힘써 구해야 할 것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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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신 약속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기도를 창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행위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바른 목적을 지향하고 드려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온통 구속과 구속의 성취에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목적이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가 재림하셔서 그의 구속을 완성하실 때 나타날 일들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의 기도의 목적과 내용의 중심추는 구속에 있습니다. 바울은 구속의 시작을 이미 가졌지만, 아직 구원의 완성을 경험하지 못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즉, 나그네 삶을 살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고단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에베소 성도들이 목적지에 이르기 전까지 가져야 할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시작된 구원이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갈 때 공급받을 은혜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구원의 완성을 향한 노상에서 분투하고 있는 에베소 성도들의 신앙 보존과 유지를 위해 염려하고 염원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구속 안에 있는 교회의 보존과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구속 안에 있는 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에 속한 한 지체 한 지체들은 아직 죄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넘어져 실족지 않기 위해 바울이 구한 네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강건함’, ‘사랑’, ‘앎’, ‘충만함’입니다(존 스토트).

교회도 각각의 성도 개인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존속하고 진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성도들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을지라도, 그들을 삶을 교란할 만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내면에는 아직도 죄의 잔재가 꿈틀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은혜가 없이는 한 발짝도 하나님의 길을 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 성화의 길 자체가 전투장인 것이며, 이 피 흘림이 있는 전투는 종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성도도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교회도 성도는 강해져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사랑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와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진리를 아는데 이르러야 합니다. 그들은 넘치는 은혜, 충만함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세상에서 동요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성도들과 교회를 위해 시작되어 완성됨을 향해 진행하고 있는 전투하는 교회에 ‘강건함’, ‘사랑’, ‘앎’, ‘충만함’ 약속하셨습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구원은 이러한 은혜를 통해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의 약속 안에서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랑하는 교회와 권속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구속과 교회의 보존과 진보라는 기도의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울의 전 관심사를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하고 충만한 은혜를 받기 위해,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17)

바울은 속사람이 강건해 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들의 충만함을 또한 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구함에 있어, 그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기도는 파편적으로 방향을 잃고 산만해 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 밑에는 수많은 지류의 지하수들이 존재하고, 또 인위적으로 시공한 수도관들이 얽혀 묻혀있습니다. 그러나 물 근원이 마르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만 가지 은혜를 구하더라도 그 근원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근원을 붙들어야 합니다.

기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기도의 최고의 목적은 그분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16-19절에 나타난 몇 가지기도 제목들 가운데 우리가 주목할 기도의 내용은 17절로 보입니다.

16절의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는 말씀은 이 땅에서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필요한 기도 제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 즉 그의 속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신 성품에 의한 것이며, 특별히 성부께서 성자의 구속 성취를 통해 보내신 성령의 사역에 의해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 진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더욱 세밀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시키고 교제케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키고 교제시키는 띠가 된다고 칼빈은 교훈합니다.

만 가지 은혜를 받는 비결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놓여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17)

구원의 길을 잘 걷기 위해 교회와 성도들이 만 가지 은혜를 받기 원한다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셔서 연합과 교제 안에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 진다는 의미는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부릅니다. 성령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시키시는 영이시기에, 그리스도의 영이라 부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시고,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영화롭게 하시며, 그를 신자의 마음에 확신시키고,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과 그리스도께서는 존재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사역에 있어 동일시됩니다(싱클레어 퍼거슨).

만세 전에 예정되고, 십자가에서 획득된 구원에 속한 모든 은혜와 은사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보존과 진보의 기초와 터는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만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지 않으면 교회와 성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교회 사역에 있어 최고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분이 성도 마음속에, 몸된 교회 안에 계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믿음 안에만 예수님을 주십니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그에게 의탁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의 최고의 화두는 공동체와 개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관심사, 염원이 예수 그리스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과 공동체 안에 믿음으로 계시도록 붙들고 있는지 개인과 교회는 점검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고단하고 분주한 삶을 살 때, 그곳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칼빈은 그래서 우리 인생 최고의 기도 제목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 교훈을 받은 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에게 없는 것이 모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있게 하셔서(골 1:19; 요 1:16), 마치 우리가 넘쳐흐르는 샘물에서 물을 퍼내듯 은혜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얼마든지 얻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 아는 그것을 찾으며, 기도로 그에게 구해야 한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믿음으로 모시되, 우리는 예수님을 나그네나 손님처럼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우리의 영원한 소유주로 모셔야 합니다.

“계시게 하옵시고”에서 계신다는 말은 헬라어에서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됩니다. 하나는 “파로이케오”이고 다른 하나는 “카토이케오”입니다(존 스토트).

“파로이케오”는 “나그네로 거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이 단어는 본향이나 정착된 거주를 의미하지 않고 일시적이고 임시적 거처로 거주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카토이케오”는 일시적 거주가 아니라 영구적 거주를 의미합니다. 핸들리 모울 주교의 말을 존 스토는 인용합니다. “바울이 택한 단어(카토이케오)는...셋방이 아닌 자기 집, 내일 떠날 숙박객이 하룻밤 묵어 가는 곳이 아닌 자기 집에 있는 주인의 거처를 명확하게 나타내는 말이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우리 마음 안에 영원히 계시도록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최고의 관심사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내주와 임재에 있습니다. 그분과 동행하는 삶에 있는 것입니다.

by 박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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