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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보 안에 있는 성도들의 기도!] 박동근목사

기도

by 김경호 진실 2018. 9. 1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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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보 안에 있는 성도들의 기도!]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기도의 열심을 품고 기도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기도할 수 있는 자와 기도할 수 없는 자로 나뉘고, 이 세상에는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사람들과 기도할 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큰 복과 비참 사이의 경계는 그리스도의 중보 안에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 속에 있기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진노와 정죄와 저주의 대상이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일반 은총이라는 것이 있어 세상에 속한 것들을 긍휼로 베푸시기도 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사랑, 은혜에 속한 구속에 있어 그들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베푸시며, 구속에 속한 것으로 누리는 삶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뿐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여러 종교에 속하여 기도에 전념하고 열심을 품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속인들도 40일, 100일 지성이라고 하여 깊은 산속에서 기도의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에 열심을 내지만, 결코 자신들의 기도의 대상이 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기도자들입니다. 기도 생활이 성숙한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기도의 대상을 알고 기도하는 그런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대상이 되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성숙하든 그렇지 못하든 모두가 불완전한 기도를 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 가운데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를 알게 된다면, 우리가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기도하는 일이 즐거워질 것입니다.

기도에 게으르다면 더 깨어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 기도한다하더라도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엄밀히 모두 완전하지 못한 기도입니다. 죄인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심지어 구할 것을 다 알지 못하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한 기도가 응답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중보하시는 가운데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들려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들어 올린 우리의 손도 불결이 있고, 부르짖는 우리의 입술과 혀도 불결이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자께서 당신의 흘리신 보혈의 공로와 능력으로 우리를 덮으시고 씻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불결한 우리의 기도에 눈길을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용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의 효력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려주시고 기도할 바를 성경을 통해 깨우쳐 주시므로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우리에게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충만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 성취와 예수님의 효력있는 중보 사역을 통해서입니다. 성령 강림과 그 이후에 온 세상에 흩어진 교회와 성도 안에 주어진 내주와 충만은 예수님의 속죄 성취에 근거해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따라 드려진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도우시며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가 구원의 길을 걸을 때, 험한 세상 속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우리는 죄와 세상의 어두움과 그 싸움의 치열함을 경험합니다. 성도들은 그 때마다 탄식하고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부르짖듯 마음으로 생각으로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집과 교회의 고요한 장소에서 혹은 성도들과 힘을 합하여 공적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 때마다 느낍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을 알지 못했다면, 내가 기도할 수 없는 존재로 여전히 남아있었다면, 그래서 내가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않으시고, 그분과 나 사이에 오직 적막한 침묵과 진노만이 가로막혀 있었다면, 그것은 지옥 자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속죄하시고 중보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의 뜻을 잘 알지 못해 헛된 기도를 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NO!, 아니다. 그 길이 이니다!라는 답으로 응답하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때는 Yes!, 바로 그 길이다!라고 답하시므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이루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한 기도에 그리스도의 중보의 강력한 간구가 함께 하므로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고 역사합니다. 성도들은 이런 확신을 갖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공로가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중보자 없이 기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된 기도를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무리 짓습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 이치를 깨달아 이렇게 비유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은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열납하기 위해 드리는 제단이고, 그리하여 그 기도들이 이기는 것이다. 기도는 성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연약하고 힘이 없다. 그러나 성도의 기도의 화살이 그리스도의 중보의 활에 채워지면, 그것은 은혜의 보좌를 꿰뚫는다.” Thomas Watson, 325.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님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대하시며, 용서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새롭게 하시며,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신앙과 현실에 필요한 것들을 적절히 공급하십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는 한, 우리의 자녀 됨과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분을 부정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를 부정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밖에 있는 자, 예수님을 불신하여 예수님께 부정된 자에게 기도의 은혜와 응답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3).

불신자들의 기도는 결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는 사람들의 기도는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요 17:9).

죄인인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하여, 사람의 변호도 헛됩니다. 천사의 변호도 헛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만의 변호가 하나님을 우리로 아버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부정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중보자 삼으려 하는 자들도 하나님과의 불화와 저주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로만 응답됩니다.

by 박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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