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주차. 히브리서 결론 2018. 12. 30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3)
“그러므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울 수 있느니라”(2:17-1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13:25)
유대교와 기독교
히브리서는 한 마디로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하나씩 설명해 봅니다.
첫째, 유대교는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민족종교이지만 기독교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백성들을 총칭합니다.
~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의 기초는 오직 구약성경에 의지합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를 믿고 추종하는 자들을 나사렛파라고 분류하고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이단의 교주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천사들이나 모세를 비롯한 선조들을 절대시합니다. 한 마디로 유대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유일신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의 종교생활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교의 관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집중되어 있고 그 영역도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변증합니다.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2:7-8)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3:3)
둘째, 유대교는 여전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새로운 구속의 성취와 역사적 관점을 소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유대인들의 종교적 신념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형성되거나 존재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적으로 형성되어왔습니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유대교의 모든 근거는 구약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좋은 전통들과 관습들, 그리고 매우 탁월한 종교적 해석들과 가르침들도 유대교를 이루는 재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유대교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의지하지만 자신들의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쌓아온 좋은 전통들도 자신들의 신앙의 기초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상적으로 보면 유대교는 ‘세미 펠라기즘’(신인협동설)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런 사상은 모두 인본주의라는 큰 범주에 속한 것들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이런 논리는 그럴 듯 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행되고 그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 더욱이 히브리서는 이러한 인본주의는 믿음과 결부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4:2)
셋째, 유대교와 기독교는 동일 선상에서 비교되어질 두 종교가 아닙니다.
~ 유대교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차원에서의 종교관이자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유대교는 구약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신약의 종교라고 하는 분류는 옳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약의 완성이자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이자 신구약 성경이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모든 구원의 법칙과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었고 그 계시는 성경으로 모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대교를 포함하지만(물론 전부를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포함하지 못합니다. 유대교는 구약의 계시만을 믿고 더 이상 새로운 계시를 수용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구약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신약의 계시로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안식과 대제사장을 예로 들며 구약의 일들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증명합니다.
“이미 믿는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4:3)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으로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5:8-10)
2.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다음으로 히브리서는 훌륭한 조직신학이자 교리서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매우 탁월한 변증서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자 만유의 상속자이자 창조주이십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2)
2) 만물의 통치자이십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느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2:8)
3) 구원의 창시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
4) 십자가 죽음으로 구속을 이루시고 속죄를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1-1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10:18)
5) 영원한 안식처이십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이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4:9-10)
6)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울 수 있느니라”(2:17-18)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7)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8:6)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8:13)
8)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10;31)
3.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첫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11장)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 앞에 사신 모든 선진들이 믿음의 증거를 얻었습니다(11:2). 믿음만이 고난의 삶을, 역경의 파고를 헤쳐 나갈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권력으로, 잘난 사람들의 지혜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우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으며, 이삭을 통하여 믿음이 곧 순종이라는 사실을 깨우치셨고, 야곱을 통해 지혜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셨고, 요셉을 통해 믿음이 오랜 인내 끝에 가질 수 있는 소망이라는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 한편으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11:6).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고 나아갈 바를 모르고 나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누구를 기쁘게 생각합니까? 오직 믿음으로 사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죄와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12장)
~ 히브리서 12장은 온통 죄악에 빠진 인생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우리가 거듭난 신자라 해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없습니다. 죄의 뿌리는 깊고 튼튼합니다. 죄의 물든 습관은 무섭도록 우리의 행위를 지배합니다. 이에 대해 잘 연구한 분이 존 오웬(1616~1683)입니다. 그의 책 <죄 죽이기>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오웬은 이 책에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롬8:13)는 구절을 근거로 다음을 몇 가지를 주장합니다.
1) 죄 죽이기와 구원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성이 있다
2) 죄를 죽이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본분이다
3)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
이러한 죄 죽임의 상태를 오웬은 “육신의 생각”(롬8:6)과 “정욕과 탐심”(갈5:24)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롬6:6)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에 바탕을 둡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주권과는 별도로 비록 구원받은 신자라 해도 끊임없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죄를 죽이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오웬은 이 책을 통해 ”살기 위해선 죄를 죽여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러한 그의 외침은 이후 청교도들의 경건한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믿음의 본이 되었던 오웬과 청교도들의 경건한 삶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 죄는 추악한 존재입니다. 죄는 더러운 존재입니다. 죄는 지옥의 문으로 인도하는 거짓 안내자이자 교사입니다. 죄의 결과는 영원한 고통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해 히브리서도 동일하게 그 참혹함과 비참함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12:1)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자신의 죄를 벗어버리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죄와 피를 흘리며 싸우셨고 우리 도한 그렇게 싸우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안일한 태도로 일관한다고 꾸중하십니다(12:4). 그래서 주님은 게으르고 방탕하며 무사 안일하게 사는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12:6). 만약 이 징계를 받지 않는 신자는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12:8)고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징계를 가하시는 것은 이런 연단을 통해 “의와 평강의 열매”(12:11)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어떻게 훈육하고 바르게 성장시켜야 하는가 하는 지침이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화평과 거룩을 추구하라
~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모든 불화의 현장에서 화목을 이끌어 내는 주체들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그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어떻게 이끌어낸다는 것입니까? 세상은 모두 자기의 것을 먼저 주장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 결과 모든 이익의 추구는 다른 사람의 이익추구와 부딪치게 되고 그 결과 둘 사이에는 화목이 깨어지고 분쟁만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양보하고 헌신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명확히 아시고 자신을 전부 희생시켰습니다. 자기와 자신의 유익을 모두 포기하는 일은 인간적인 차원에선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모범에 따라 세상에서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늘 손해보고 살아야 합니다. 늘 양보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앞에서 우리가 가장 거룩한 삶의 태도를 보이는 증거입니다. 물욕을 포기하는 것이 거룩해지는 비결입니다. 사람이 물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돈에 인색한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 살면 다 잃어버릴 것 같지만 끝에 가보면 늘 남는 장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장사를 해도 그리스도인은 주일 쉬고 수요예배 드린다고 일찍 가게 문 닫고 하는데 이상하게 매출은 365일 문을 열고 장사하는 옆 가게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결과요 하나님이 신비한 방식으로 도우신다는 증거입니다.
~ 오늘 히브리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12:14)고 충고합니다. 화평과 거룩은 같이 가는 친구입니다. 누구든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목사가 거룩을 잃어버리면 아무도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말이 먹히지 않으면 화평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일단 그의 말이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신뢰가 없는데 어지 화평할 수 있습니까? 저와 우리가 세상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라는 존재가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내는 아름다운 존재인지 각성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려라
~ 다음으로 히브리서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자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13장에서 언급한 대로 “형제 사랑”(13:1)이요 “이웃 사랑”(13;2-3)이며 나아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13:10-16)입니다. 특별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기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13:16)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진정한 예배냐 하면 삶 그 자체가 예배라는 것입니다. 입술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진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선행으로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일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다섯째, 언제나 은혜 안에 거하라
~ 마지막으로 히브리서는 모든 말씀의 결론을 “은혜”로 마감합니다.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13:25)고 마무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고 구원을 공짜로 얻고 천국 백성으로 이 당에서 살고 잇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 순간도 바로 서지 못하며 어떤 일도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육체가 공기를 마셔야 호흡하고 살 수 있듯이 신자의 영혼은 은혜를 먹고 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숨 쉬는 공기와 따뜻함을 주는 햇빛입니다.
~ 종교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황이나 교회가 제정한 법규를 지킴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점을 천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직 은혜”(Sola Gratia)였습니다. 단 미국의 칼빈주의자인 칼 트루먼은 “은혜는 본질상 죄와 맞서 싸우고자 하는 ‘대결적인 성격’을 가졌으므로 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이는 은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생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죄악 된 세상을 다루는 틀로서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로 택함을 입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노래한 바울처럼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올해에도 변함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그 영광을 찬송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만 홀로 존귀와 영광을 받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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