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사마리아여행>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는 사람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다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가서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57-62)
무신론자들의 시대
현대는 점점 무신론의 시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초과학 문명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운운하면 정신 나간 친구처럼 바라봅니다. 이들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인지, 이 세상의 삶을 마치면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상태입니다. 한 마디로 현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무신론자들의 천지로 돌변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사상적 무신론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 무신론이라 합니다.
1) 사상적 무신론
~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면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10:4)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또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였으니”(롬1;28)
~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은 거짓된 우상을 섬깁니다.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3)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5)
~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이 없다 하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나 도덕적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앞뒤가 맞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달리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택하고 주장합니다.
~ 영국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이라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인본주의협회를 창설한 사람으로 종교퇴치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무신론을 홍보하기 위해 기부금을 받아 광고를 했습니다. 그 광고 문구는 이렇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
(There i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 무신론자 중에 이렇게 사상적으로 무신론으로 무장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부류입니다. 그 자체가 불신앙을 가졌습니다. 이런 자들은 분명한 증거가 있어도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완고한 고집쟁이입니다. 명백히 유기된 자들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사상은 마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 사과하지 않습니다. 마귀와 마귀에 미혹된 그의 자녀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마귀(바알세불, 디아불로스)는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귀신의 왕’(마9:34)이요,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요8:44), ‘훼방자’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삼킬 자를 찾기 위해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고’(벧전5:8) 있습니다.
~ 모든 성도는 마귀의 궤계에 미혹당하지 않도록 늘 근신하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엡4:27). 마귀를 적극적으로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엡6:11). 우리의 씨름은 마귀와 그가 부리는 악한 영들입니다(엡6;12). 사도 바울은 마귀의 자식으로 자신을 대적한 박수 엘루마를 소경이 되게 하였습니다(행13:10). 이런 점에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슨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지 궁금합니다.
2) 실천적 무신론
~ 다음으로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실상 사상적 무신론자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들은 우리와 같이 자신의 거처를 교회 안에다 삼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와 같은 모습, 같은 말,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틸(C. VanTil)의 분류로 치자면 ‘미스터 그레이’(회색분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있기에 잘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 이들은 신앙의 껍질만 유지한 채 실제로는 무신론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매주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부르고 헌금도 하지만 대부분은 습관적인 행위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나왔으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합니다. 가끔씩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 일부러 신앙을 고백하고 애써 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10, 20년이 지나도 이들의 삶은 변화가 없습니다. 늘 자기식대로 인생을 해석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예수를 믿으니 진리 안에 거하고 거듭난 사람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라 생각합니다. 자기는 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산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화가 없습니다. 본질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눈도 그대로이고 마음도 그대로이고 태도도 그대로이고 성격과 기질도 그대로입니다.
~ 주님 안에 있다면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교만이라는 장벽이 변화의 물결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식대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행동하는 모든 근원은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교만은 가장 완고한 고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집은 자기중심주의를 낳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중심주의로 변화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삶이 이중적입니다. 이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몸이 따르지 못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원대로 살고 싶어하지만 몸은 늘 자기 원대로 살고 맙니다. 계획은 세우지만 실천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온갖 구상을 하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이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난 어쩔 수 없어” 혹은 하느라고 하는데 안 되는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라는 푸념입니다. 정말로 이들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을 했을까요? 정말 주님에게 나아와 간절히 기도하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하고 몇 번이고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며 변화의 열매를 맺겠다고 몸부림을 쳤을까요? 아뇨. 이들은 하는 시늉만 합니다. 몇 번 시도해 보다가 안 되면 바로 포기합니다. “꼭 이렇게 해야 돼?”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늘 이런 식입니다. 언제나 작심 3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 이런 자들은 왜 이렇게 살아갈까요? 그것은 그 속에 성령이 내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도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는 일을 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중간에 멈추어 버립니다. 끝까지 완주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무슨 일이든지 마무리가 됩니다. 성령이 책임을 완수하도록 도우십니다. 육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도우십니다(롬8:26). 한 마디로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결국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무신론자들이 제아무리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우겨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 계신‘ 이라 하시지 않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도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잠시도 사라질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존재론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존재’(existence)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나머지는 존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존재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자들은 언젠가부터 인간을 하나의 ‘존재’로 부각시켰습니다. 인간이 존재가 된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동굴에 갇힌 자들이 이제 빛이 사라졌다고 말해도 빛은 사라진 것이 아닌 것처럼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해도 계시는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독교회를 싫어하고 안티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무너뜨리자고 시비를 걸고 탄압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지구상에 숨 쉬는 공기가 사라지는 편이 훨씬 더 쉬운 일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전하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귀가 지금 어떤 전술전략으로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못살게 구는지를 지혜롭게 파악하고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마귀의 손에 붙들려 그의 도구가 되어 악한 일을 일삼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회심을 참고 참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당키 어려워 눈을 감거나 회피하거나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주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기도하며 세상의 일에 관심과 참여를 지혜롭게 행하면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의무입니다.
3. 세 종류의 불신자들
오늘 주님은 세 사람의 불신자들을 여행 중에 만나 그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1) 첫째 사람
~ 먼저 한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실로 이는 대단한 고백이자 결심이요 다짐입니다. 이 고백은 이제부터 주님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선언이자 공개적인 서원이며 맹세입니다. 주님은 아마 이런 제자들을 원했을 것입니다. 마땅히 주님의 제자는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첫 걸음일 것입니다.
~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람이 “무슨 일이든 함께 하겠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시든지 함께 가겠다”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앞의 것은 목숨까지도 불사하겠다는 뉘앙스가 있지만 뒤의 것은 주님이 가시는 곳에 함께 가겠지만 혹시 나쁜 곳이라면 가지 않겠다는 속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게 유익하고 좋은 일에는 함께 가겠지만 나와 관계없고 내게 유익하지 않은 곳에는 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 물론 이런 속내를 평범한 우리는 금방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사람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이 사람이 왜 주님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는가를 주님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이 사람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 일행이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이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 온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까지 이렇게 대규모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드디어 예루살렘에서 무슨 거대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것은 기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일행에 묻어가면 자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예수님의 행차에 동참하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붙잡는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 주님이 이 사람의 속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세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사람의 의도를 다 알고서 지금 내가 가는 곳은 네가 기대하는 그런 좋은 곳이 아니라 잠잘 곳도 없이 초라한 곳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호텔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 자고 사막에서 밤을 지새우고 못 먹고 헐벗고 추위와 배고픔에 몸을 떨어야 하는 고생길이라는 것을 일러준 것입니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말해준 것일 뿐입니다.
~ 이런 자들을 가리켜 기회주의자라고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입니다. 좋은 일에는 동참하지만 조그만 힘들다고 판단되면 슬쩍 꽁무니를 뺍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가짜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고상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일에 성경책을 옆구리에 기고 자녀들과 함께 좋은 건물과 시설을 한 교회당을 다니는 것은 하나의 로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정도 되는 사람이야”라고 으스대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런 것을 ‘추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추태야말로 가장 천박한 행동입니다. 자신은 교양이 있는 체 하고 제법 갖춘 것처럼 꾸민다 해도 천박함을 절대로 숨길 수 없는 부패요 타락입니다.(경상도 여자가 서울에서 살다 성공을 해서 명절에 고향에 와서는 사투리를 쓰지 않고 ‘그랬니? 안 그랬니’하고 서울말을 하다가 개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물자 갑자기 “엄마야 우짜노?”했다고 합니다. 숨기고 꾸민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 신앙은 ‘고상함’(luxe)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당은 교양을 가지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자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2) 두 번째 사람
~ 이번엔 두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먼저 말을 겁니다. 아마 첫 사람의 옆에서 주님과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지켜보던 사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도 궁금증이 많은 사람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일에 함께 관심을 갖습니다. 세 사람만 모이면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는 첫 번째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면박을 받자 속으로 시원해 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당하는 것을 목격할 때 기뻐합니다. 애들도 왕따 당하는 친구를 구출하기보다 그것을 구경하는 것을 더 즐긴다고 합니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잘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첫 번째 친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머쓱해 하자 순간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이를 알고 그에게 불시에 불쑥 하나의 제안을 던지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전혀 예상치 않았을 때에 주님이 툭 치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때 이 사람이 얼마나 당혹해 했을까 상상해 봅니다.
~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즉각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핑계나 변명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응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 혹은 ‘자기보호전략’(self-protection strategies)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프로이드의 딸 안나 프로이드가 개발한 10가지 방어기제는 유명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타락한 인간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범죄자들을 수사하고 심문하는 수사관이나 검사들은 거의 모든 범죄자들은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증거를 보일 때까지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변호하기에 급급하다고 증언합니다.
~ 마찬가지로 이 사람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는 당황스러운 가운데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마 이 대답은 그가 사전에 준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의 대답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의 아버지는 지금 죽은 것이 아니라 임종의 순간에 있었을 것입니다. 죽었다면 이 사람은 지금 장례를 치루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온 것은 추측건대 아버지의 병환을 고쳐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부탁을 할 새도 없이 갑자기 주님이 자신더러 주님을 따라가자고 하는 요청을 듣자 본인도 모르게 죽지도 않은 아버지 장례를 치루어야 한다는 대답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 이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죽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몸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 즉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하고 유기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우리는 누가 택함을 받고 버림을 받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감추어 둔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조건 사랑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 그렇다고 주님이 부모님의 죽음을 무조건 무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존 마틴은 이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장례를 무시했다면 그 마을과 유대인 공동체에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진짜 의도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세상에 그 어떤 일보다 최우선적인 일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장례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기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금 예수님은 마지막 지상 사역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죽은 자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보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도 전쟁 중에 모친상을 당했지만 국가의 일이 더 중요했기에 장례식에 참석도 못했습니다. 불신자들의 윤리도 이럴진대 주님을 쫓는 일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정녕 믿음이 있는 자는 이런 순간에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쫓아 결단하고 복음의 일꾼으로 자청할 것입니다.
3) 세 번째 사람
~ 두 번째 사람이 즉시 따르는 것을 주저하자 이번엔 주님은 옆에 있던 세 번째 사람에게로 눈을 돌립니다. 이 사람은 주님이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주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앞 사람의 변명을 유심히 들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앞 사람은 죽은 자를 거론하여 주님으로부터 면박을 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산 자들과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주를 따르겠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먼저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한 다음에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도 앞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은 주님을 따르는 일을 회피하고 싶어서 다른 이유를 둘러대는 자입니다.
~ 혹시 그는 이것을 말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엘리사가 밭을 갈 때 그의 부모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을 허락한 것을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열두째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쟁기를 끄는 열 두 쌍 곧 24마리 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고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를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야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더라”(왕상19:19-21)
~ 그러나 엘리사의 경우와 주님의 경우엔 다른 경우입니다. 주님에겐 실제로 이럴만한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조금 있으면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정이 긴박함에도 이 사람은 매우 한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불순종의 한 형태입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있지만 진짜 이 사람은 주님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를 가려 말을 해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불순종에 대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일침을 가한 말입니다. 이 사람의 속내를 다 간파하시고 핵심을 찔러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농부가 밭을 갈다가 뒤를 돌아보면 우선 밭고랑을 제대로 맬 수 없고 또 밭고랑을 가는 일보다 딴 생각 즉, 밭으로부터 얻을 수확을 먼저 생각하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고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이건 얼마짜리이고 저건 얼마짜리이고 하며 오직 돈으로 가늠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땅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의 일을 궁구하고 추진합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제자는 오직 복음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4. 교훈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에서 참 재미있는 것은 세 사람이 그 뒤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 결과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누가로 하여금 이 결과를 기록하지 않도록 하신 걸까요? 미루어 살펴보건대 세 사람의 반응이 기록할 가치도 없을 만큼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만약 이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했다면 하나님은 누가를 통해 그들이 “주님을 따랐다”고 반드시 기록했을 것으로 봅니다.
추정해 보면 첫 번째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일이 안락한 길이 아님을 깨닫고 은근슬쩍 꽁무니를 빼고 무리에서 종적을 감추었을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실용주의자이며 기회주의자입니다. 자신에게 유익하면 참여하고 불리하면 입을 다무는 사람입니다. 대학 시절 한 창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 한 어머니가 다짜고짜 자기 아들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창피하다면서 버티자 어머니가 “나라가 썩어지든 말든, 남들이 데모를 하든 말든 너는 하면 안 된다”고 소리쳤습니다. 물론 그 모정을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십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어머니만 있다면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그 친구는 4년 내내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잘못된 모정으로 그 아들은 큰 상처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고 집으로 다시 돌아갔을 것입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죽었을 것이고 장례식도 치루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에게 왔을 때엔 뭔가 주님에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프니 아버지를 고쳐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참으로 효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효도가 무의미한 일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실제로 가장 큰 불효자들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추정컨대 사랑하는 육신의 가족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나치게 가족주의자인 줄 모릅니다. 믿을 건 가족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육신의 가족이 진짜 가족인 줄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부모와 형제마저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주의 길을 따르기 위해 육신의 가족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당장 육신의 가족에 대한 애착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장로님이 자기 딸이 목회자 될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자 쌍수를 들고 반대를 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자기 자식은 고생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천박한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육체의 수준에 함몰된 사람에게 하늘의 복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한 주간 동안 묵상하시면서 주님에게 우리의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과연 우리는 전적으로 철저하게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가 반추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멘.
[출처] 3주. <사마리아여행>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는 사람들 (바로선개혁교회)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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