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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역(Ⅲ): 설교, 치유, 가르침

기독론

by 김경호 진실 2019. 9. 1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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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연재 시리즈: 예수사역(Ⅲ), 설교, 치유, 가르침

 

2. 권세 있는 가르침


1)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교훈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예수의 가르침은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다. 그는 단지 영혼의 평강을 위한 잠언과 지혜를 들려주는 현인이 아니라 그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사람들의 영혼에 감동을 주며, 내면의 고뇌와 질고에서 이들을 해방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나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가르침을 듣던 무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막 1:24). 이러한 그의 능력있는 권세의 가르침에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예수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능력의 기름으로 임재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갇히고 얽매인 자를 풀어주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었다.


기름부음(anointing)이란 감람 기름을 머리와 몸에 바르거나 그 위에 붓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유대인의 관습에 있어서 기름 부음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나 사람, 벧엘의 거룩한 돌(창 31:13), 광야생활에서의 회막과 제단, 예언자, 제사장과 왕에게 기름을 부었다. 기름부음은 기름 부음을 받는 자에게 성별과 능력부여를 의미했다. 예수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칠 때 성령의 능력이 함께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유대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일개의 나사렛 출신의 신흥 랍비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단지 교훈의 설법에서 끝나지 않고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고 절망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었다. 그리고 내면의 고통과 정신 질환자들과 불치병에 신음하고 있었던 자들을 치유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설교와 가르침은 듣는 청중으로 하여금 외면적으로는 보이지 않게 그들의 마음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게 했다. 예수는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의 멍에를 벗고 그가 주는 사랑의 멍에를 지도록 부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

 

2)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통치(평강)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 물질적인 처소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b-21).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말씀과 권능이 인재하는 하나님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서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비(非)가시적인 것이며, 영적이며 정신적 도덕적 실재이다. 오늘도 죄인이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고 헐벗은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과 인자가 선포되고 실천되는 처소에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인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 통치는 영적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드리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과 안디옥과 소아시아 각 지역(고린도, 데살로니가, 빌립보, 에베소 등)에서 이룬 인격적인 사랑의 공동체는 바로 지상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의 구체적인 실재이었다.


예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마 15:19)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이러한 세상적인 탐심에서 벗어날 때 마음이 가난해진다. 천국은 오로지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신비로운 내면의 실재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도덕적인 실재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통치의 성격을 다음같이 묘사한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거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평강이다. 찬송가 469장(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흘러나네, 내 맘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가 증언하는 것 처럼 우리 마음 속에서 강과 같은 평화가 넘치고 마음 속에서 쉴사이 없이 하늘의 곡조가 흘러나오고, 외부의 환경이 어렵다고 하드라도 마음 깊은 곳에 솟아나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적인 평강이 바로 그 구체적인 증거이다. 이 평강은 구약의 시편 저자들이 누렸고, 신약의 사도들이 감옥에서 누렸고, 교부 시대와 종교개혁 시대 성도들이 누렸고, 청교도 시대 성도들이 박해시절에 누렸고, 한국교회 초기 성도들과 오늘날 북한과 중국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누리는 평강이다.

 

3) 확장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다. 누룩은 반죽의 전체 양에 비해서는 작은 분량이나 누룩이란 효소에 의하여 반죽이 부풀도록 만든다. 이것은 날마다 복음의 능력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이 세상 속에서는 하나의 작은 실재이다. 그러나 하나님 통치는 이 세상에서 도피한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님 통치는 이 세상 안에서 그의 부르심을 받은 중생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영적 도덕적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겨자씨(mustard seed) 같으나 싹이 터서 자라게 되면 4-5미터나 되는 거대한 나무가 되어 새와 짐승들이 와서 거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밭에 뿌려진 씨는 역경을 거쳐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씨는 하늘의 새들이 와서 쪼아 먹히기도 하고, 가시밭에 떨어져 억눌리기도 하고, 잘 여물어서 많은 결실을 하기도 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씨 뿌리는자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눅 8:5-8). 그리고 예수는 가라지 비유를 하신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24-30).


기구로서의 종교모임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 알곡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요, 가라지는 쭉정이로서 그렇지 않은 자들이다. 역사과정에서 이 구분은 분명하지 않다. 역사의 종국에서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구별된다. 역사의 끝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최후의 심판이 있다. 알곡은 의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해 같이 빛나나 가라지는 풀무불 속에 던져진다.


종교인이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밤 중에 예수께 나아와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인정했을 때 예수는 그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쳤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중생한 자는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 그 마음의 문을 여는 자들에게만 들어오셔서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로부터 중생의 도리를 듣고 그 날 밤 중생의 경험을 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니고데모의 신앙은 나중에 확증된다. 예수가 후일에 십자가에 처형되어 누구도 예수의 시체를 찾아가지 않았을 때 그는 예수의 시신을 돌려받아 돌로 된 무덤에 안치한다. 이 용감한 행동 속에서 니고데모의 신앙은 확증되어진다. 니고데모가 그 날 밤 중생의 도리를 깨닫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했다면 그러한 용감한 행동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 통치의 실재는 사도 바울, 에디오피아의 내시, 고넬료,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슬리, 길선주,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등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구체적인 역사적인 실재로 성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그리고 그 가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들이 만드는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와 세계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리고 확장되고 있다. 우리는 보편사 속에서도 다윗 왕국, 느부갓네살왕의 회심, 니느웨 도성의 회개, 콘스탄틴 대제의 회심, 비텐베르그와 로마와 취리히의 종교개혁, 청교도 혁명, 청교도 순례자들에 의한 미국 건설, 1907년 평양 대부흥 등 하나님 나라의 파편적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저 천국에만 머무는 고정된 공간이나 어느 우주적 처소만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의 삶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지니는 역동적인 영적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지상 위에 수직적으로 초월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허시며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들의 눈물과 애통과 사망과 아픔을 친히 싸매시고 완전히 치유해주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사망과 이별과 고통이 지나간 곳이다. 사도 요한은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 21:1a),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계 21:2a) 라는 표현에서 공간적인 뉘앙스를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므로 단지 공간적인 이해를 너머서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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