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정암 박윤선과 개혁주의 언약사상: 구약신학의 관점에서

언약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9. 12. 3. 10:46

본문

들어가는 말

정암의 언약 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유영기가 개략적으로 잘 다루었다. 본고는 제목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개혁주의 언약 사상과 구약신학의 관점에서 정암의 언약 사상을 조명할 것이다. 특별히 개혁주의 언약신학이 정암의 언약 사상을 조망하는 참조점이 될 것이다. 또한 이번 강좌에서는 정암의 언약 사상을 신약신학의 관점과 조직신학의 관점에서도 다루느니만큼 중복을 피하고 주어진 주제에 충실하기 위하여 구약의 관점에 치중할 것이다.

논구를 시작하기 전에 자료의 특징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정암의 언약 사상의 주자료인 『성경신학』이 편저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정암은 전체적으로 게할더스 보스의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을 길게 인용하였고, 언약에 대한 체계적 이해에 관하여는 화란의 조직신학자 바빙크의 “개혁신학”(Geregormeerde Dogmatiek)을 즐겨 인용하였다. 이들의 성경신학과 언약 이해가 정암의 언약 사상에 녹아 있기 때문에 그 둘을 엄밀하게 구분하여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정암이 다른 학자의 인용문과 자신의 입장의 경계를 분명히 표시하는 경우에 그의 생각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반면, 정암의 전질 주석에서는, 그가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주해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주석 전체가 박윤선의 언약 사상의 주요 출처가 된다.

I. 박윤선의 언약 사상

먼저 정암이 히브리어 ‘베리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살펴보고, 다음에 그의 언약 사상의 윤곽을 알아보기 위하여 그가 언약에 대하여 정의하거나 요약한 경우를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언약 사상이 그가 이해한 ‘성경신학’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살필 것이다.

1. ‘베리트’의 의미: ‘언약’인가 ‘계약’인가?

정암은 히브리어 ‘베리트’를 어원적으로 ‘쪼개다’ 또는 “자르다”(to cut)를 의미하는 “바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아가서 그는 이를 고대 근동에서 사람들이 서로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죽이고 쪼개서 양쪽으로 나누어 놓았던 관습과 연결시킨다. 이 계약체결 의식은 계약당사자가 약속을 어길 경우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창 15:9-10 참조).

1976판 『성경신학』은 ‘베리트’의 번역어 사용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1) 전체적으로 계약을 언약으로 바꾸었다. 영원한 언약, 행위 언약, 은혜 언약, 구원 언약, 자연 언약, 언약 성취, 언약 축복 등, 신학적인 전문 용어도 계약 대신 언약을 채용하였다. 역사적 언약의 명칭도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등으로 모두 바뀌었다. ‘언약’이 ‘베리트’의표준번역이 된 셈이다. (2) 그러나 계약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이것이 모두 의도적인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어떤 경우에는 어원의 세속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함인 듯하다. 본고에서는 정암의 1976년판 『성경신학』의 용어에 따라 신인간의 ‘베리트’를 ‘언약’으로 통일하여 사용하되 때에 따라 뉘앙스를 살려 사용하거나 교차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현대 언약신학자들은 ‘베리트’의 어원적 탐구가 아직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관련어가 가리키는 풍습, 사회적 언어학적 관행에서 의미를 유추하는 편이다. 세속적인 계약 체결의 고대 관행을 출발점으로 삼을 경우, 언약은 관계와 의무를 나타낸다고 본다. 이 세속적 언약이 종교적 의미를 가질 경우에 함축된 의미가 다소 가감이 되겠지만 ‘관계 +의무’라는 기본적인 함축미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점은 언약의 파기 선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의무 불이행으로 언약 관계가 손상을 입었을 경우에도 근본적인 관계가 결정적으로 단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암도 언약의 내적 구성요소를 관계와 의무로 이해하는 때가 많이 있다.

2. 정암의 언약 정의

정암이 ‘언약’의 의미를 설명하거나 진술한 경우가 여럿 있다. 그것은 언약에 대한 단순한 설명에서부터 숙고된 신학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정암은 히브리 본문에 ‘베리트’라는 전문 용어가 나타나는 곳뿐만 아니라, 언약과 관련된 표현과 개념이 나타난 곳에서도 언약 사상이 나타난다고 옳게 본다. 정암이 명시적으로 제시한 언약의 설명 또는 정의를 살펴보자.

(1) 정암에 의하면 베리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취하신 솔선적인 언약의 행동이다.” 먼저 주목할 점은 언약을 ‘행동’이라고 칭한 사실이다. 이는, 전통적인 언약신학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언약의 관계(relationship)에 기초한 언약의 실행(administration)을 강조한 말처럼 보인다. 물론 ‘자기 백성’이란 말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간의 근본적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솔선적’이라는 말은 아마 주도성(initiative)을 나타내는 말로, 언약의 신적 주도권 또는 주권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은혜’는 언약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성격을 나타내며, ‘자기 백성’은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공식’에 나타나듯이 언약의 대상으로 선택된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진술은 정암의 언약에 대한 포괄적이고 압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가장 정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2) 정암은 또한 언약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부터 인간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며 언약하시며, 그 언약대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신다.”고 한다. ‘맨 처음부터’가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언약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표현을 볼 때 행위 언약을 가리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행위언약은 타락 전 아담을 상대하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맨 처음’은 범죄 후 인간을 찾아오셔서 ‘원시복음’을 주신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찾아오시는’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주도적, 주권적인 사역을 가리키고, ‘언약대로...... 구원’은 언약이 구원의 통로임과 구원이 언약의 목적임을 나타낸다. ‘이루시는 하나님’은 구원이 언약 또는 약속의 성취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언약이 구원의 수단 또는 통로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 곧 ‘언약신(계약신)’이다.

(3) 정암은 언약은 ‘신구약 성경의 내용’이라고 간단히 말하기도 한다. 이는 정의라기보다 언약과 성경의 관계를 보여주는 짧은 진술이다. 신약과 구약은 공히 언약의 기록이다. 정암은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상대하신 옛 언약이나 그리스도와 관계된 새 언약이 은혜언약인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거듭해서 말한다. 이 두 언약이 합하여 성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약(Old Testament/Covenant)과 신약(New Testament/Covenant)이라는 명칭에 내포된 내용을 밝힌 것이다. 이는 정암이 신구약의 공통점과 연속성의 근거를 언약에서 찾고 있음을 보이며, 언약이 성경 계시의 내용이라는 언약신학의 입장을 그대로 밝히는 것으로 생각된다.

(4) 정암은 언약이 “인격과 인격이 결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시고 언약적으로 관계해 오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서 “신인의 화합 관계는 언약 성립으로만 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방에 인격적 언약사상이 없는 사실을 들어 성경적 언약의 탁월성을 지적하면서, 언약 관계의 인격적 측면은 의지와 순종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곧, 사람이 하나님의 의지를 받들어 순종하는 때에만 진정한 관계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언약 파기의 시기는 곧바로 신인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나아가서 정암은 스킬더를 인용하여 “언약 이행이 없이는 진정한 연합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같은 표현들은 한편으로는 진정한 인격적 관계는 언약적 관계라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는 신인 연합을 정점으로 하는 언약 관계는 인격적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5) 정암은 시편(25:10) 주석15에서, 언약을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라고 규정한다. 그 약속 내용에 대해서는 “①신종(信從)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 ②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를 신종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서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가 택함 받은 자녀인 것을 확신할진대 이 약속을 믿고 자기 앞에 어떠한 고통과 위험이 올지라도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줄 알아 심령에 평안을 가져야 한다.”고 적용한다. 정암은 또한 언약의 “인자와 진리는 성도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신실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인자와 진리는 대표적인 언약의 용어로 언약적 사랑을 가리키는바, 이상의 인용은 언약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신종의 반응을 촉구하고 있다.

(6) 정암에게 언약은 관계이기도 하다. 언약이란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곧,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를 맺는 것”이다(신 29:5-9 주석). 하나님은 “택한 백성과 언약에 의하여 관계를 맺으신 대로(출 19:5-9; 신 7:9) 약속을 지키시며 그 백성을 판단하신다.”(렘11:2 주석) 정암에게 있어서 언약관계는 ‘언약 공식(covenant formula)’으로 잘 표현된다. 즉,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 그리고 ‘택한 백성과 언약에 의하며 관계를 맺는’ 것은 언약관계가 선택(‘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과 언약(‘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표현한다. 언약이 관계라는 정의는 언약신학의 중요 논제이다. 특히 개혁주의 언약신학에서 이 관계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깨트릴 수 없는 언약적 결속(bond)으로 이해된다.

(7) 언약과 구원역사. 정암은 모세 5경과 구약의 역사적 문헌이 “언약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며, 선지자들도 실질에 있어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이 언약을 지향하고 말한 것”뿐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약의 역사요 이스라엘의 선지운동은 언약운동이라는 설명이다. 혹은 언약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 언약을 전개하거나 지향하는 책들 중 잠언을 비롯한 지혜서가 빠진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빠진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구약신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정의는 구약역사와 선지운동의 지향을 언약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렇게 언약은 성경의 구원역사와 선지운동의 동인이다. 사실 역사적, 예언적 성경 문헌만 언약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언약적 성격을 가진다. 정암의 언약 연구는 단어에 대한 엄밀한 의미론적 탐색보다는 개념적, 신학적 이해를 우선으로 한다. 그러나 어떤 언약신학자들처럼 특정한 언약에 근거하여 정의를 내린 후 그것을 언약 전체와 성경 본문에 덧씌우려 하지 않는다. 정암은 개혁주의 언약 이해를 받아들인 다음, 본문의 맥락에 따라 성실하게 주해하되, 본문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하여 설명하는 경향을 보인다.

3. 정암과 언약신학의 언약 이해

이러한 정암의 언약 이해는 다른 언약 신학자들의 정의와 비교할 때 그 특징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구약학계에서 언약신학의 대부로 알려진 아이크롯트는 언약을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원리(fundamentals), 성경(구약)을 구성하는 원리로, 이스라엘 신앙의 통일성과 독특성을 드러내는 개념으로, 구약과 신약을 잇는 연결 사상으로 본다. 그에게 언약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자 구약을 조직하는 신학적 구조이다. 정체성, 신앙, 그리고 역사가 언약을 통하여 결정된다. 그의 정의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신축적이어서 언약이 사실상 종교의 정의에 근접한다는 비판이 있다. 언약 안에 많은 것을 무리하게 담으려고 하다 보니 언약에 고유한 의미가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자인 로벗슨(O. P Robertson)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틀 안에서 구약의 언약을 이해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직신학적 논리 때문에 본문해석을 왜곡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행위언약을 수용하면서도 이 용어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창조언약’이란 말을 대신 사용한다. 또 원시복음을 인정하고 이를 언약으로 받아들여 ‘아담언약’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두 경우에 난점은 해당본문에 ‘베리트’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덤브렐의 주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베리트’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고 언약적 표현과 개념에 주목하여 창조 자체가 언약이라고 주장한다. 노아 언약이 창조의 갱신이므로, 창조도 언약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다만 노아언약이 구속의 준비이기 때문에 언약이라고 불릴 수 있는, 또 다른 자격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언약의 개념이 단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관련 표현이나 가족 개념에 의해서도 표현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창조언약이나 아담언약의 명칭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은 언약의 의미를 광의로 보는 경우이다.

이에 반해 협의의 언약만을 언약으로 인정하려는 경향도 있다. 언약을 조약적 관계로만 국한하는 경우 조약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은 언약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이는 언약과 약속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다시 약속으로 규정된 관계를 언약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것이다. 이는 창2:16-17의 죽음 언급(죽으리라)은 유효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시 받게 될 형벌을 가리킨다. 즉, 그의 언약 정의는 행위 언약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또 피가 언약의 필수요소라고 하나 다윗 언약의 체결에서 피가 언급되지 않는다. 명백한 순환논법이다. 이 주장에 관련된 주장은 공적 관계만이 언약이라고 인정하고 사적관계라고 규정한 관계를 언약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스라엘만이 당사자가 되고, 다윗은 개인이므로 언약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같은 논리로 노아와 아브라함도 언약에서 제외된다. 이 협의의 정의는 거꾸로 모세 언약으로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시내산, 모압 평지, 세겜에서 맺은 언약은 격상되어 시내언약, 모압언약, 세겜 언약으로 불리게 한다. 명칭 자체는 그렇게 사용할 수 있겠으나 이들만이 언약이라는 의미에서나 아브라함 언약 등과 대등한 또는 우월한 언약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순환논법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정암의 장점은 그가 뛰어난 주경학자라는 점이다. 정암은 우선 개혁주의적인 언약신학의 틀을 받아들인다. 그에게 있어서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은 성경계시와 구원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언약을 넓은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대로 아이크롯트의 경우와 같은 단점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정암의 본문 주해 과정에서 그 틀과 용어가 내포한 취약성을 자연스럽게 극복되는 경향이 있다.

4. 박윤선의 성경(구약)신학과 언약 사상

정암은 『성경신학』의 머리말에서 자신이 개진하려는 성경신학의 성격을 밝힌다. 그는 먼저 성경신학이 주경신학의 부분이어야 함을 말하는데, 이는 성경신학이 주경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함을 시사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주경학자인 정암이 갖춘 최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암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시사적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계시사적 연구란 것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하고, 그 역사적인 위치를 중대시하는 것이다.” 정암이 성경신학의 역사 강조를 받아들이고 보스를 따라 성경신학을 구원계시의 신학으로 이해한 것이다. 정암에게 있어서 성경신학의 자료인 성경은 구원의 계시이다. 정암이 강조한 ‘계시의존사색’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계시의존사색은 자율 주의의 무능과 실패를 드러내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타율의 은혜로 주어진 계시임을 강조한다. 인간에게 계시의존사색이 절대로 필요한 까닭은 “계시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고, 계시의존사색으로만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의 목차도 정암이 성경신학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보여준다. 먼저 ‘성경을 바로 아는 성경신학의 기본원리’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성경신학은 성경을 바로 알게 해주는 일과 관련이 있다. 성경을 바로 알게 해주는 성경신학이 ‘좋은 성경신학’이다. 반면, ‘성경을 오해하는 신학운동’이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성경을 오해하게 하는 성경신학은 ‘나쁜 성경신학’이다. 이는 정암이 성경신학의 목적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정암에게 구약신학이 있는가? 정암에게는 보스의 성경신학이 있었다. 그에게 구약신학은 성경신학의 구약부분이었을 뿐이다. 오늘날 구약신학은 자체의 신학을 강조한다. 때로 구약의 중심 메시지가 신약의 중심 메시지와 다르거나 때로는 충돌하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암에게 있어서 신약계시와 구약계시의 중심 사상이 다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정암은 게할더스 보스의 성경신학의 구조를 통하여 구약신학을 개진하였다. 따라서 정암의 구약신학은 보스의 성경신학의 언약적 전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약 사상은 구약신학의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언약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구조인가? 이는 구약신학에서 구약의 중심(주제) 논의와 연관이 된다. 특히 개혁주의의 전통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언약의 강조가 성경 전체의 풍성한 계시를 축소하거나 이 개념이 절대시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언약의 중시가 계시 내용의 우열을 정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 성경신학에서 흔히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구약이나 신약을 조직할 경우 우려되는 축소주의적 위험과 배타적 적용을 경계하는 것이다. 정암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위 ‘정경 안에 정경을 두는’(“to run a canon within the canon”) 잘못이 나타나지 않는다. 언약의 의미를 확대하여 언약 고유의 의미를 희석하고 다른 용어의 내용을 축소하는 일이 없다. 이는 정암이 머리말에서 지적한 대로 본문에 대한 충실한 주석에 어긋나지 않게 성경신학 또는 언약신학을 전개한 때문으로 보인다.

II. 정암과 구약의 언약들

일반적으로 언약신학에서는 ‘베리트’ 등 본문상 증거가 확실하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언약으로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을 꼽는다. 각각의 언약은 학자에 따라서 언약의 모델로 삼을 정도로 중요한 언약이다. 노아 언약을 언약의 전형으로 생각한 존 머리와 덤브렐은 언약을 ‘은혜와 약속의 시행’으로 정의한다. 아브라함 언약 또는 다윗 언약을 언약의 모델로 삼는 이는 클레멘츠(R. E. Clements)로 시여(grant)로서의 언약을 강조한다. 모세 언약을 언약의 모델로 삼는 클라인(M. G. Kline)에게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의 시행이다. 여기에 행위 언약의 성경신학적 언약 사상의 대용어인 창조언약과, ‘원시 복음’의 대용어인 아담 언약에 대한 정암의 이해를 추가할 것이다.

1. 창조언약

최근 학자들이 사용하는 창조언약이라는 말은, 내용상 행위언약 및 문화명령과 상당 부분 겹친다. 창조언약이라는 말은 창조자체를 언약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이다. 행위 언약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제시된 대로 은혜 언약을 예상케 하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행위 언약의 주요 본문은 ‘선악과 금령’ 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1:17). 문화 명령은 ‘경작하다’는 뜻의 라틴어(cultur)에서 기원한 말로 인간이 창조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의무를 가리킨다. 여기서 주요 본문은 창 1:28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조언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암은 바빙크를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계명은 그 사건의 본질로 보아 언약”이라고 한다.

‘사건의 본질’을 언급한 것은 단순한 용어의 출현과 의미를 넘어 담겨 있는 신학적 내용으로 언약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말이다. 그는 행위 언약의 근거 구절로 호 6:7을 인증한다: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정암에게 행위언약은 아담이 순종하기만 하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언약인 것이다. 그는 또한 하나님이 그를 처우하심이 언약의 원리로 일관한다고 한다. 따라서 언약을 어길 경우 죽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정암은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영생에 이르도록 되었었다고 행위언약을 이해한다. 정암은 창조의 언약적 성격을 말씀 창조에서도 찾는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약속 체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정암은 창1:3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라는 말씀에 의거하여 단지 말씀하심으로써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2)말씀하신 때에 꼭 그대로 창조되었는데, 이는 창조가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창조가 약속 체계에 속하는 창조론을 보여준다.” 또한 정암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신 곧 하나님의 신실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실행하셔서 창조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가 약속 체계에 속한다.’는 말은 정암이 비록 그의 『성경신학』에서 ‘창조 언약’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창조언약의 내용을 인지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암의 창세기 주석도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한다. 그는 선악과 금령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만 상대하셨던 행위언약이라고 한다(창2:16-17 주석).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가지 계명만 주시고 그것을 어길 때에는 죽음에 이르도록 규정하신 것은 하나님이 ‘계명의 원리’를 처음부터 진리로 취급하신 증표이다. 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회개하면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은 이유는, “정녕 죽으리라”(17절)는 말이 다름 아닌 언약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행위 언약은 계명의 원리와 언약의 말씀에 따라 된 것으로 본다.

개혁주의 언약신학 논의에서 주해적으로 논란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정의와 상호 관계이다. 우선 호 6:7가 진작부터 논란이 되어 왔다. ‘아담’이 지명인가, 첫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가? 아담이 인명이 아닌 지명이라면, 행위언약은 성경적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서 창 1-2장에 언약이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으나 언약의 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특히 정암과 같이 말씀 창조를 약속으로 이해하고, 명령을 계명으로 이해할 때 언약 개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게다가 명령을 어길 경우에 따르는 처벌의 위협은 언약의 제재(sanction)로 볼 수 있다. 결국 현대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논의에서 행위 언약적 이해는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2. 아담언약

아담 언약은 ‘원시 복음(proto-evangelium; 창3:15)’을 가리킨다. 정암은 이를 ‘구원 언약’, ‘구원 약속’, 또는 ‘예언’이라 부른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 언약에 의해서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신다.” 즉, 한편으로 죄인들의 죄를 벌하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시는 것이다. 정암에 의하면 이 언약의 은혜적 성격은 (1) 범죄한 인간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 (2) 하와가 고통은 받으나 자식을 낳도록 된 것이다. 정암은 또한 동산에서 쫓겨났으나 땅에서 문화를 건설하게 하신 것도 은혜 안에 포함시킨다. 이렇게 타락 후에 인간은 진노뿐만 아니라 긍휼도 아울러 받는다(GD III 205).

정암이 창3:15를 ‘구원 언약’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마귀를 이기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암은 원시복음의 4 가지 중요 진리를 열거한다. (1) 사람과 마귀를 서로 원수 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다. 이렇게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역사(God’s monergism)이다. (2) 마귀와 원수된 사람을 구원 받은 자(영생한 자)로 간주한 것이다. (3)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적대 행위를 계속할 것이다. (4) 택한 백성의 승리는 그 백성이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 성립된다.

이렇게 정암은 ‘원시복음’에서 마귀를 이기는 은혜를 보기 때문에, 이 약속은 실질에 있어서 신약의 구원관과 같다고 말한다. ‘여인의 후손’은 직접 메시야를 가리키지 않으나 간접적으로 택한 백성의 대표자격인 메시야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마귀를 이김으로 영생을 얻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롬 16:20 참조). 이렇게 죄의 문제는 죄와 사탄을 정복함으로 해결될 수 있다. 정암이 또한 창 3:15를 메시아 예언 또는 약속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정암에게 언약은 인류를 두 종류의 백성으로 구분하는 시금석이다.

즉, 언약에 의하여 인류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나뉜다. 이것은 온 인류를 ‘혈통관계로 분류하지 않고 언약 관계로 분류’한 것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로 분류한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언약은 인류에게 사활적인 기준이 된다. 정암은 다른 곳에서 원시복음(창 3:15)을 ‘조종적(祖宗的) 은혜 언약’이라고도 부른다. 이 언약의 발전이 아브라함 언약이다. 모세에게 주신 언약,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모두 옛 언약에 속하면서 은혜의 성격을 띤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신약도 성취인 동시에 새 언약이다. 이처럼 모든 은혜 언약은 원시복음에서 흘러나온다. 여기서 두 가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정암의 은혜언약 논의에서 노아언약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노아언약의 논의에서 취급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암이 언약을 정의함에 있어서 폭넓은 관점을 취한다는 점이다. 그는 신구약에서 “언약 관계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지 않는 부분에도 언약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베리트’가 없어도 관련 표현이나 개념이 있다면 언약 사상도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3. 노아 언약

정암은, 노아 홍수 이전 시대에는 “인종이 번성하였으나 은혜의 역사는 많지 못했다”고 본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비로 홍수 후에 자연계를 상대로 자연 언약을 설정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노아를 상대로 한 언약이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6:18절). 그 목적은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19절) 하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류대로’ 는 한편으로는 창조의 회복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의 보존으로서 구속의 주요대상인 인류의 보존을 가리킨다. 즉 정암은 노아 언약을 창조의 회복이자 구속의 준비로 이해한다. 최근의 언약신학 논의에서는 노아언약은 ‘보존의 언약’으로 창조 언약이 아닌 은혜언약에 포함된다. 이 보존이 창조의 회복인 점도 사실이나 장차 구속을 위한 준비인 사실을 크게 보았기 때문이다.

위의 단락이 보여주는 것처럼 정암은 노아 언약을 자연 언약이라고 부른다. 나아가서 그는 자연 언약과 은혜 언약의 관계성을 논한다. ①자연 언약의 진실성은 은혜 언약의 진실성을 보장한다. ② 자연 언약에 의해서 은혜 언약이 준비된다. 하나님은 구원 얻을 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대로, 큰 무리를 이루는 것을 원하신다. ③은혜 언약이 완성된 후에 자연 언약도 완성되어 만물도 새로워진다. ④ 성경은 자연 언약을 은혜 언약의 모형으로 말한다. 이와 같이 두 언약은 서로 떠날 수 없는 관련을 가진다고 본다. 모형론에서는 자연이나 자연의 일부를 모형이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정암은 자연 자체가 아닌 ‘자연 언약’이라는 ‘제도’를 은혜 언약의 모형으로 말하는 것이다.

정암의 창세기 주석도 위와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9:8-11).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로 더불어 언약하신다. 이때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와 대비되는 창조의 하나님 엘로힘”이 사용된다. 정암은 후자의 성호는 자연계까지 관계된 능력의 하나님을 말한다고 지적한다. 정암은 이 언약이 하나님 자신이 주도적으로 맺으신 무조건적 언약이라고 묘사한다. 하나님은 “솔선하셔서 언약을 베푸시고 그대로 실행하실 것”이며, “인간 편에게 어떠한 협력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실시되는 것이니, 이것도 무조건적 긍휼로 성립되는 것이다.”

여기서 언약의 성격 및 창 6:8-9의 해석 문제가 대두된다. 이는 특히 고대근동의 언약 연구의 결과로 새롭게 대두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해석에 따르면 고대근동의 관습이라는 배경에서 볼 때 노아 언약은 제왕적 시혜(royal grant)로서, 언약이 의로운 노아에 대한 은혜로운 상급의 일종으로 주어졌다고 한다. 물론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언약이 성립되는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노아 언약을 지키실 것이다.

노아 언약의 증거(sign)는 물론 무지개이다(9:12-17). 정암은 무지개에서 언약의 확고부동성을 본다. 이후로는 인종과 자연계를 보호하실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무지개는 자연 언약의 징표로서 다음 사실을 보여준다. (1) 하나님은 신령한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자연물도 사용하신다; (2) 무지개가 나타나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계도 볼 수 있다; (3) 무지개의 아름다움은 은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4) 무지개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을 이루어 주신다.

후대 해석 가운데는 아름다운 무지개 대신 용사이신 여호와의 ‘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둘은 같은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겨눈 자기 저주적 맹세의 의미나, 하나님이 활을 창공에 걸어놓은 화해의 의미를 보기도 한다. 두 경우 다 하나님을 언약의 행위자로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사실 언약의 무지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에게 언약을 상기시킨다: “내가 보고......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16절). 물론 사람도 무지개를 볼 때에 하나님이 동일한 무지개를 보고 언약을 기억하시는 사실을 알고 이로 인하여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4. 아브라함 언약

정암은 아브라함 계시(언약)의 주된 내용을 큰 민족과, 모든 족속의 축복으로 본다. ‘큰 민족’은 육적 이스라엘의 신정국가를 예언한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중심한 영적 국가를 가리킨다고 한다. 또, 칼빈을 인용하여 많은 민족이 메시아 왕국에 참여할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한다. 아담이 범죄한 값으로 땅이 저주를 받았으나,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서 12:2-3에 5번이나 나오는 복은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축복을 가리킨다고 한다. 아브라함 언약을 메시야 약속으로, 사실상 메시아 예언으로 본다. 창세기 주석에서 정암은 아브라함 언약을 기반으로 약속 및 믿음과 연결시킨다(12:2). 신앙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을 내다보고 움직이기 때문에 믿음은 약속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실 때에는 축복약속을 주신다.” 또한 정암에게 약속은 믿음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신앙의 발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암은 또한 약속의 자증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아브람은 이 약속이 하나님의 것인 만큼 믿을 수 있었다.”

그래도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만 한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이때까지 무자하였던 아브람도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다.” 창세기 15장의 땅의 약속이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때에 17장의 후손의 약속으로 확대된다. 하나님은 언약의 징표로 할례를 제정하시고, 사라에게서 이삭이 날 것을 약속하셨다. 그들은 ‘내 언약’으로 인해 심히 번성케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4-8절)은 그들이 영생의 기업을 누리게 되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본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영생을 소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암은 할례(9-11절)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는 표로 본다. 나아가서 그는 할례는 순결을 이루기 위한 의식이라고 한다. 신자는 외부적 양피를 베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 할례는 또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본다. 후대 언약론에서 할례는 여호와께 대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헌신을 의미한다. 즉, 아브라함이 행한 자기저주적 맹세로 보는 것이다. 만일 ‘내가 여호와를 믿음 가운데 충성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여호와의 칼이 양피를 벤 것 같이 내 생명과 내 후손을 자를 것을 맹세한다.’는 뜻이다. 이는 15장에서 하나님이 쪼갠 동물 사이를 지나면서 행한 자기 저주적 맹세의 의식과 대조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적 헌신에 이어 아브라함의 언약적 헌신이 뒤따른다.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17:1), “내 언약을 지키라”(17:9)는 말씀도, 아브라함 언약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 순종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암은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하여 신앙을 강조한다. 정암은 하나님이 “이전 약속을 이루지 아니하시고 또 다시 약속으로 대신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불신앙을 구제하시기 위해 언약(약속)의 말씀으로 일관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사실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약속으로만 만족하고 그 약속을 받을 뿐이다. 이렇게 정암은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강조한다.

정암은 또한 할례의 의미로 순결을 강조한다. 정암은 언약의 표로서 할례의 1차적 의미를 순결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할례의 순결은 또한 그리스도를 내다본다. 왜냐하면 모든 순결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암은 할례에서 두 요소, 즉 순결과 그리스도의 대망이 결합되어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는 할례의 해석에서 순결은 2차적, 또는 함축적 의미로 본다. 정암의 순결 강조는 그의 경건적, 실천적 해석 경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브라함 언약은 역사에서 복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세운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왕하 13:23). 정암은 이를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아직까지는 이스라엘을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원수에게 내어주지 않고) 아끼신다는 뜻으로 주석한다.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긍휼을 입은 것이다. 대상 16:15,16에서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가나안 땅을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신 사건이라고 강조된다. 이렇게 정암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가 곧 땅의 역사를 이루는 역사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아니한다.

5. 모세 언약

정암은 모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모세 언약은 은혜언약인 아브라함 언약을 잇는 연속적 성격을 가진다. 즉, 둘 다 왕국, 국가의 성립, 피의 속죄 제도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언약은 단일 내용(동일한 진리)으로 내려온다. 정암이 이해한 모세 언약을, 1)아브라함 언약과의 관계, 2)시내산 언약, 3)모압에서의 언약 갱신의 순으로 살펴본다.

1) 아브라함 언약과의 관계

모세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의 연결고리는 출애굽이다. 하나님은 종살이로 말미암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듣고 언약을 기억하신다(출 6:5).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가리킨다(창 15:16; 45:4). 정암에게 있어서 출애굽 운동은 하나님이 오래 전 즉, 400년 전에 맺으셨던 언약을 그대로 이루시는 자로서 자신을 뚜렷하게 드러내신 구원사건이다. 이렇게 정암은 초지일관 구원을 언약의 실행으로 보았다. 즉, 출애굽이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구원은 선택과 언약에 근거한 약속의 실행이다. 이는 전통적인 언약신학에서 모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의 발전적 확대라고 보는 것과 일치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암이 ‘탄식’, ‘부르짖음’, ‘부르짖음’, ‘고통소리’(출2:23-24; 6:5)의 양면적 의미, 즉 기도와 언약에의 호소 중에서 기도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정암은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여호와라는 그의 성호의 내용대로 언약을 성취하시겠다고 하심을 언급한다(출 6:2-5). 다른 한편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간절한 기도로 보고(출2:23-4), 다니엘도(9장) 구원 약속을 믿고(1-2절)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정암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여정에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라고 출애굽 사건을 적용한다. 이렇게 정암의 주석은 기도를 포함한 경건의 강조를 보여준다.

2) 시내산 언약

정암은 언약체결의식에서 사용된 언약의 피(출 24:8)를 속죄의 피로 본다. 스미스의 생활(생명) 연합이란 주장을 반박하고 보스를 인용하여 죄의 장벽이 소멸되었다는 의미를 취한다. 이스라엘은 죄를 소멸한 후에야 여호와께 가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언약식에서 뿌려진 피는 쏟아진 생명, 즉 죽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고 보는 근래의 언약신학과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정암은 언약의 피를 언약을 확증하는 죽음보다 속죄의 피로 본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규정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그들이 지켜야 할 언약의 규정들(stipulations)에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배타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정암에게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상을 섬기지 말고 참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라는 말씀이다(출 23:32). 가나안 백성과 평화의 조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출 34:12).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모세 언약의 조건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는 일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의 구속을 위하여 필요한 제사장 나라(출 19:5)로 만들고자 율법(언약)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려고 하신다.

즉, 이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언약서, 출 20:22-23:19)을 지킴으로 성립된다는 것이다(출 24:7).62 모세 언약의 징표인 안식일도 사람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여호와께 속한 백성,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출 31:16). 언약은 또한 레위기의 제사법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정암은 언약의 원리를 통하여 제사의 법에서 놀라운 속죄의 은혜를 본다. 레위기의 소금 언약(레 2:13)은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을 접촉하시되 언약의 원리로” 하심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솔선적으로 사람을 찾아오신 것은 약속의 형식으로 제사의 법을 가르치셔서 하나님 섬길 길을 열어 놓으려 하심이다. 즉, 제사의 법이 약속의 형식으로 주어졌다는 것이 정암의 이해이다. 제사는 지켜야 할 율법이기 이전에 속죄의 약속이다. 이렇게 정암은 율법에서 복음을 보는 율법관을 보여준다. 모세언약은 물론 순종을 강조한다. 정암에게 있어서 순종의 대상은 율법 조문이라기보다 하나님 자신이다. ‘언약을 어긴 원수’(레26:25)의 주석에서 보여주듯이 정암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격을 배반하는 반역행동이라고 본다.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에의 참여는 여호와에 대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정암은 레위기 26장에서 언약을 이행하면 번성하고 창대할 것이라고 보응의 신학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대할 때에 언제나 그 언약을 기억하신다. 그의 언약은 우리 가운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그의 권위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언약을 믿고 그의 말씀을 지킬 때에 그 자신을 기쁘시게 한다. 그리고 그는 언제든지 그 언약대로 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언약은 거의 여호와를 대신하는 인격적 ‘말씀’의 성격을 가진다. 언약은 보이지 않는 그의 권위를 대신하고 믿음의 내용이 되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준다. 제사에 수종드는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하는 언약이 ‘평화의 언약’(민 25:12-13)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비느하스와 그 후손이 대대토록 제사장이 될 것을 보장하시는 언약이다. 그의 후손들이 대대토록 아무 분쟁 없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야 성립됨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렇게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은 신정(theocracy)이라는 언약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암에게 언약은 단지 신정국의 백성이 되는 것 이상이다.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으로 삼은 사실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실질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그 택한 백성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정암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최대의 축복이 하나님 자신을 그들의 기업으로 받음으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나아가서 정암은 모세 언약의 목표를 장차 오실 메시야로 본다.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을 제시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먼저 유대 민족을 택하셔서, 장차 온 세계에 메시야의 복음을 증거할 거룩한 국가로 훈련시키신 것이기 때문이다(출 19:5,6).

3) 모압에서의 언약갱신

신명기가 모압 평지에서의 언약갱신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에서 언약을 갱신해야 하는 필요성은 무엇인가? 먼저, 미래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가나안에서 받게 될 미래 유혹에 대비하여야 한다. 백성이 우상을 숭배함은 언약을 위반하는 죄악이다(신 17:2).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언약은 먼저 하나님만 섬겨야 된다는 것과, 다음 그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과거의 정리 차원에서도 갱신이 필요하다. 정암은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에 승리하는 기적을 체험하였으므로 사랑의 대상으로 모셔야 하나, 그렇게 못하였으므로 모압 땅에서도 다시 언약을 세움이 필요하였다고 본다.

정암이 강조하는 모압 언약에서 잊지 말아야 할 호렙의 교훈은(신4:12-13) 하나님이 말씀(음성)으로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며, 영원하신 진실성을 보여주시는 참된 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타나신 방식의 계시적 성격이 당시 상황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신4:23, 31). ‘찾으면 만나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들을 받으심은 그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일 중 하나이다. 이렇게 정암은 회개를 강조한다. 신명기는 이렇게 백성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순종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말한다(신7:6-8).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속량하심으로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성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 함(9-11절)은 그가 언약하신 대로 상선벌악 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 한다. 맹세하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신 12:12)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신자가 계명을 지킴은 사랑의 실천(12:9)이다. 계명은 규율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쁜 일로 여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축복하심(12:12)은 그들에게 의가 있음이 아니었고 그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가나안 땅을 그 자손에게 주시고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바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전에 약속하셨던 것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실행하신다. 축복의 성격에 대하여는 율법을 지킨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암은 축복과 저주를 말씀 순종을 위한 인센티브로 본다. 그러나 정암은 동시에 순종자가 복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모압 평지에서(신29:1) 세우신 언약을 호렙산에서 세우신 언약과 비교해 볼 때 두 언약은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정암은 전자가 후자의 언약을 확고히 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관계는 언제든지 언약적인 것이다. 곧,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백성은 그 말씀대로 믿어 순종하는 것으로 성립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시내산 언약 백성임을 기억시키고, 그 언약의 내용인 계명을 지키라고 부탁하신다(신5:1-6). 그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2-1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동기는 사랑이요, 목적은 축복이다. 참고로 정암은 이적이 하나님의 자기계시임을 강조한다(신29:5-9). 하나님의 이적들은 사람의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참으로 맺어주는 언약의 중심요소라고 정암은 강조한다.

4) 모세 언약과 역사 및 선지자.

(1) 언약은 역사의 동인

정암은 모세 5경과 역사서가 언약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언약신학의 주장대로 이스라엘 역사는 언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약은 역사의 동인이다. 언약의 바퀴를 따라 이스라엘의 구속사가 진행한다. 이스라엘은 땅을 주시리라는 언약에 따라 가나안에 정착하였다(렘11:5; 시 105:9,11). 정암은 당시 백성이 살고 있는 땅은 약속 성취의 증거라고 주석한다. 약속 후 400년 후에 가나안 일곱 족속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렇게 진실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약은 사건을 해석하고 기록하는 기준이요 틀이다. 여호수아 시대를 평가하는 틀도 언약 규정인 모세의 율법이었다, 여호수아 시대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사사시대에는 각자가 자기 소견대로 행하여 모세의 율법을 등 뒤로 던져버렸다. 왕조시대에 언약을 어김은 국가 분열의 신학적 원인이 되었다.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가 망한 것도 다 언약의 말씀을 어기고 돌이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선한 왕과 악한 왕의 차이도 언약의 준수 여부가 관건이었다. 반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때때로 나타나는 개혁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언약의 말씀을 따라 행하였다.

(2) 언약의 수호자 선지자

정암은 역사서뿐만 아니라 선지자들도 실질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언약을 지향하고 말했다고 한다. 선지자들은 언약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기억시켜야 한다. 선지자들은 함께 언약의 말씀을 모든 민중에게 기억시키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 선지자들은 한편으로 예언자(豫言者; fore-teller)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제시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먼저 유대 민족을 택하셔서, 장차 온 세계에 메시야의 복음을 증거할 거룩한 국가로 훈련시키셨다(출 19:5,6). 이 언약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목표한 것으로서, 필경 메시야에 의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구원받을 것을 지향하고 말한 것이다(창 12:3; 22:18).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메시아 예언을 주실 뿐만 아니라, 천국의 예표로서의 가나안 땅과, 거룩한 민족으로서 지킬 종교윤리의 제도와 교훈을 주시고 거기서 순종하라고 명하셨다. 정암은 결국 이 모든 것은 메시야와 그로 말미암아 실시될 구원을 가리키는 그림자였다고 주석한다. 다른 한편 선지자는 예언자(預言者; forth-teller) 또는 설교자의 역할을 한다. 정암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과 언약에 의하여 관계를 맺으신 대로(출 19:5-9; 신 7:9) 약속을 지키시며 그 백성을 판단하신다고 한다(렘11:2). 설교자로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순종이다. 결국 언약의 말씀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는 것이며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이다(렘11:4). 언약의 말씀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렘11:3). 저주란 말이 엄중한 이유는 (1) 언약의 말씀은 하나님의 무궁한 진실에 의한 것으로서 그 이상 믿을 만한 것은 천하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그것을 안 믿는다면 주님께로 돌아올 길이 아주 없는 까닭이다. (2) 언약의 말씀은 실상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주는 말씀인데 누구든지 그것을 좇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이 기 때문이다 (3) 언약의 말씀은 모두 다 옳은 말씀인데 누구든지 그것을 받지 않는 자는 멸망으로 떨어지게 하는 악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6. 다윗 언약

정암은 다윗 언약이 왕국을 중심한 언약이라고 한다. 다윗 언약이 왕국 언약인 점은 모세 언약과 같다. 정암에게 다윗 언약은 곧바로 메시아의 예언으로 연결된다. 즉, 예언자들은 다윗 언약에 ‘포함된’ 메시아 왕국을 예언하였다. 이들은 또한 메시아에 의한 속죄제도도 예언하였다(사 53). 정암은 다윗 언약(삼하 7장) 주석에서 다윗에게 약속된 집을 나라, 곧 이스라엘 나라로 주해한다. 이 약속은 궁극적으로 메시아 왕국을 예언하는 것이다. 솔로몬에 대한 직접적 예언(11하-17절)은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예언한 것이다. 솔로몬을 아들이라고 칭한 것도 그리스도를 예표하신 말씀으로 본다. 나라의 영원성은 세상 나라가 아닌 메시야 왕과 그 영원성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메시야 대망을 말한다. 정암은 예표(모형)를 일종의 비유로 본다. 1)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그리스도가 영적 성전을 지은 것과 형식상 유사하고, 2) 솔로몬이 다윗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과 형식상 유사하다. 나단의 약속을 언약으로 규정하는 삼하 23:5의 “영원한 언약”은 이 부분의 말씀이 메시아 예언임을 알려준다. 정암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그 백성에게 주실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때문에 설혹 신자들이 어느 정도 타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변치 않으시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구원하시도록 만전을 구비하셨다는 뜻이다.

왕국에 대한 약속이 과연 이루어졌는가? 정암은 다윗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복음 운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세대주의를 비판한다. 세대주의는 왕국 성취가 지연되고 구약에 예언되지 않은 교회가 세워지게 되고, 세계의 종말기에 유대인 왕국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다윗 왕국의 설립이 연기되었다는 말이 없다. 왕국을 이방인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신약의 복음운동을 가리킨다고 한다. 다윗 언약도 아브라함 언약과 같이 ‘역사적 복음’으로 작용한다. 다윗 언약 때문에 솔로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가 그에게 속하게 된다(왕상 11:11-13). 유다 왕 여호람이 아합의 딸을 아내로 두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데도 불구하고 멸망하지 아니한 것 역시 하나님이 다윗 언약을 지키시기 때문이다(대하 21:7: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심). 이렇게 정암은 주석에서 언약적 역사관을 잘 드러낸다. 시 89편은 다윗 언약을 언급한 대표적 시편이다. 다윗 언약(시89:3)은 실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 세계적 구원 축복을 예언한 것이다. 다윗 언약은 메시야에게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언약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 일반성도들도 다윗처럼 영적으로 능력을 받아 형통하며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가지며 영구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범죄하는 때에는 징벌을 받으나, 아주 내어버림이 되지는 않는다. 이 시는 다윗 언약에 기초한 기도를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하신대로 그 백성을 돌아보시지 않는 듯이 보이는 곤고 무쌍한 때에도, 성도가 실망하지 않고 기도함은, 하나님을 신실하신 이로 믿는 행동이다(시89:38-51).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하신대로 이행치 아니하시는 법이 없다. 이 구절들(30-37절)은, 우리 신자들이 징벌을 받을 때에 큰 위안과 소망을 주는 것이다. 이 시인의 기도가 근거한 약속의 내용은, (1) 다윗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위를 주시겠다는 것(12절), (2) 하나님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영원히 거기 계시겠다는 것(13,14절), (3) 풍족한 약속을 주시겠다는 것(15절), (4)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을 인하여 즐거워하도록 하시겠다는 것(16절), (5) 다윗에게 뿔(그리스도)이 나도록 하시겠다는 것(17,18) 등이다. 정암은 다윗 언약(렘33:19-22)이 하나님이 구원질서에 있어서도 언약하신대로 성취하셔서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를 약속하는 것으로 본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자초지종 언약운동에 의하여 실행되어 가는데, 하나님께서 구속 사업을 언약적으로 이루어 가심에 대하여 우리들이 받는 혜택은 다음과 같다. (1) 그가 언약하신 대로 독생자를 보내시어 구속 사업을 이루시는 것만큼, 우리는 그 언약 성취에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언약 성취의 사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며, 그 말씀에 의하여 거룩해지는 은혜를 받는다. (3) 언약 성취로 성립된 구원은 신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충만하게 하여 끝까지 견디게 하여준다.

7. 언약들의 관련성

정암은 언약들 사이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본다. (1) 옛언약은 행위언약이 아니고 은혜언약이다. 율법과 예언은 그리스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구언약에서는 율법 수행이 요구되었으나, 구원받는 조건으로 명하신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인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택한 백성답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2)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 또는 완성시키는 새로운 방도에 불과하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가 회복 또는 완성하셨다. 천국의 복을 누리려면 순종해야 된다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 공통점은 은혜 언약에서도 불순종의 죄값 지불과 율법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은혜 언약에서는 행위언약과는 달리 그 죄값 지불과 율법 순종의 책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아담의 자리에 대입되신 것뿐이다. (3) 노아 홍수 결과 맺어진 자연 언약과 은혜 언약을 대비한다. 정암은 자연 언약을 은혜 언약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4) 은혜와 율법. 율법은 구속받은 은혜를 전제로 주어진다. 정암은 이스라엘 백성은 은혜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후에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사실이 율법의 머리말에 나타났다(출 20:2).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자초지종 언약(혹은 약속)과 은혜의 원리에서 움직인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약 시대 사람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 시대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상이다.



성주진 교수


http://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3714§ion=sc9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