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생명에 대해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 속에 있다. 낙태와 안락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생명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성경과 정반대가 되는 사상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 즉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 이해를 정립해야 한다. 이에 도움을 얻고자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을 교수하신 심창섭 박사의 글을 소개해 본다.
I. 서론
생명신학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공의적 해석으로 생태신학적 관점에서 생명신학을 이해하고 있다. 즉 생명을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적 질서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개념은 생명에 대한 외경 사상으로 모든 자연세계의 생명체의 보존과 보호를 인간의 책임으로 강조하면서 생태신학이라는 용어를 창출했다.
생명신학의 다른 한 부류는 자연 환경적 생명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의 영원한 영적 생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은 자연세계의 생명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지는 영생에 대한 이해이다. 이 생명은 인간의 속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다. 성경에는 예수를 믿는 자는 새 생명이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하였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라고 하므로 예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그리스도를 떠나서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생명은 원천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므로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사망을 가져온다. 인간은 타락을 통해 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생명을 되찾게 되는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을 가져오는 은혜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의 회개라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의 결과로 새 생명을 사는 삶의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되찾은 자는 중생의 삶을 통한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화의 과정을 확대하면 생명신학의 수평적 관점인 상태신학으로 발전한다고 볼 수 있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이와 같이 중생을 통한 영적 생명의 회복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실천적 삶 속에서의 생태신학의 과제를 동반하고 있다.
최근에 이런 생명신학의 양면성을 조명하는 신학적 작업이 한국신학계의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졌다. 생태적 생명과 생명공학에 대해 연구한 학자는 숭실대 김영한 교수를 들 수 있고 서정배 교수도 생명공학적 관점에서 생명에 대한 견해를 잘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반해 생명신학을 영적생명에 초점을 둔 연구가 백석대 개혁주의생명신학연구소에서 발표된 생명신학에 대한 논문들에서 나타난다. 특히 본 학술 포럼에서는 생명을 복음적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영적생명을 강조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칼빈은 어떻게 생명신학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생명신학이란 용어가 칼빈에서는 생소한 용어이지만 기독교 신앙자체가 생명의 종교이므로 칼빈의 개혁신학 사상 속에서 생명신학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신학적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논자는 이런 의미에서 칼빈의 생명에 대한 이해를 조명해 볼 것이다. 칼빈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3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생명의 출처, 둘째, 생명의 실존적 삶, 셋째, 생명의 종말론적 이해이다. 이 세 가지 분야를 다룬 후 칼빈의 관점에서 생명공학적 생명과 영적생명에 대한 이해를 종합적으로 조명해 볼 것이다. 생명신학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그의 신학적 대적인 기독교강요를 중심으로 연구될 것이다.
II. 본론
1. 생명에 대한 성서적 이해
생명에 대한 정의는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생명을 생리적 유기체의 현상으로 본다. 이것은 자연과학분야의 생명에 대한 정의이다. 그래서 생명을 생화학적으로 해석하면서 물질과 에너지 대사를 통해 복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조직체로 정의한다. 이런 견해는 생명을 하나의 생화학적 과정의 산물로 보는 생물학적 관점이다. 둘째, 생명에 대한 종교적 정의이다. 이는 생명은 유기체의 생화학적 과정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시적 영역에 두는 견해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생명에 대한 이해이다. 성서는 모든 존재하는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
즉 기독교적 생명은 자연적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성서는 모든 생물학적 생명뿐 아니라 근원적으로 영원한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영역에 두고 있다. 그리고 영원한 영적 생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성서는 이와 같이 인간의 생명을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치부하는 자연주의적-일원적인 생명관과 차별화 한다. 이것은 성서가 생리적 물질적 생명과 영적 혹은 정신적 생명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가 추구하는 궁극적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는 영원한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성서적 생명의 개념에서 생명신학을 출발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생명의 근원이심을 전제하고 있다.
2. 생명의 기원에 대한 칼빈의 이해
칼빈은 생명의 근원을 생명의 본체론적 논증에서 말하고 있다. 생명이란 하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의 실체가 또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주입되었다는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며 하나님 홀로 생명의 본래적 원인으로 자신의 본래적 힘에 의해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태동시키시며 소생시키신다. 그래서 비밀스럽고 숨겨진 이 생명의 근원인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은 그리스도로부터 열린 생명의 샘물을 갖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생명이 그 자신에게 숨겨져 있길 원치 않으셨기에 그리스도 안에 자신이 생명으로 존중하였고 우리에게 흘러오도록 하신 것이다.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에서도 이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생명의 원인과 원천이 하나님 자신 안에 없다면 생명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홀로 본래적인 자신의 힘에 의해 존재할 뿐 아니라 그는 자신 안에 생명의 충만함을 가지고 만물을 소생시키시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라고 말한바 대로 이것은 하나님께 특별한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멀리 있는 하나님의 위엄은 비밀스럽고 숨겨진 샘물과 같은 것이므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까이에서 끌어낼 수 있도록 열린 샘물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은 숨겨진 생명을 가지길 원치 않으시며 그것이 자신 속에 묻혀 있기를 원치 않으시므로 그의 아들에게 주입시켜 우리에게 흘러오도록 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주입했다는 사실을 반대하지만 요한복음 주석에서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주입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말한 정황을 살펴보면 칼빈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 칼빈이 생명이 주입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단인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즉 세르베투스가 존재론적으로 생명의 주입을 주장하는데 대해 칼빈이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주석에서 칼빈은 본체적인 견지에서 생명의 주입을 말하고 있다.
칼빈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었고 그 생명을 예수에게 존재케 하셨기에 예수 자신도 우리에게 생명의 원천이요 공급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자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사실을 요한복음 주해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통한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으면 신앙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무리 철학자들이 훌륭한 말을 한다 해도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신학은 혼돈될 뿐 아니라 텅빈 것이고 미친 것이고 속임수라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논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속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죄 받고 사망에 이른 상태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바로 생명이 아니라면 죽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요 동시에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가진 생명은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생명이란 헬라어는 조에라는 단어로 단지 육체적 생명에 대한 표현일 뿐 아니라 초자연적 생명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표현은 육체적 생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지속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생명은 자존하는 생명으로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생명이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헬라인들이 추정하는 것과 같은 추상적 성격의 정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를 나타내는 생명인 것이다. 이는 죽거나 소멸됨이 없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즉 칼빈은 생명의 기원을 철저하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있다. 그래서 생명은 성부와 성자께 속한 것이며 영원한 실체인 것이다. 칼빈은 생명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예수님에 관해 사용된 메타포적인 용어인 빛, 길, 진리와는 달리 그리스도안에 실재하는 삶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또 그리스도가 인간의 생명의 원천일 뿐 아니라 만물의 생명의 원천이며 동시에 그의 능력으로 만물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힌다. 칼빈은 무생물에게 생명이 주어졌든 생물에게만 생명이 주어졌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모든 생물의 상태는 그로 말미암아 유지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한 칼빈의 생명의 원천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며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이름으로 육화되었기 때문에 생명이 또한 예수 안에 있다. 이는 예수도 생명의 원천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주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 육화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공학이 생명을 경시하는 방향으로 연구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개인적인 타살이나 자살행위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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