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이해
칼빈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을 쫓아서 삶을 이끌어 갈 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한 삶을 추구하므로 하나님과 연합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그 근거로 하나님과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한 삶의 결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악과 부정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삶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 삶의 당위성을 속죄와 구원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중생한 자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요 하늘에 소망을 둔 삶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목적의식이야 말로 올바른 삶을 세우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일반 철학자들의 도덕론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을 강조하는데 그치며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롬 12:2)고 권고하고 있다. 칼빈은 이렇게 함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각, 뜻이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을 주관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을 향한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생명에 이르는 관문이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그릿도인들이 소유한 생명의 존재의미와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일어나야 할 축복된 삶의 형태이며 이것은 곧 자기 비움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의 삶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이웃의 유익을 위한 삶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왜 자기 부인의 삶을 강조했는가? 칼빈은 자기 부인의 삶이 없이는 세상의 정욕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의 추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자기 부인은 주님의 명령이며 그것 없이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 대하 의무는 자기 포기라는 결단이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포기를 주장하는 칼빈은 인간 본성은 원천적으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무엇이든지 이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신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칼빈은 우리가 교회의 공동유익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태도는 청지기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이웃을 돌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물질관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청지기의 사역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면 칼빈이 이웃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가? 그는 인간을 단순한 생태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생명체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빈의 위대한 인간존중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사람들이 선을 받을 자격이 대부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서로 선을 행하라고 하나님이 가르친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원리에서 인간으로서 존귀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엄성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비천한 사람이든 불학무식한 사라미든 혹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그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빛나고 있으므로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언제나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마 5:44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이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
칼빈의 이웃 사랑과 존엄사상은 또한 인간 외형적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칼빈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인격적 내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이며 그것은 사랑의 수혜자의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간다운 감정이고 참된 동정심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귀한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칼빈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삶이 지속될 때 생명의 가치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의 성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칼빈이 추구하는 생명의 실존적 가치의 의미이다.
4. 생명의 종말론적 이해
칼빈은 생명의 출처와 생명의 실존적 가치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정리한 후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생명의 종말론적 견해를 정리한다. 그는 생명의 종말론적 입장을 피력하며 현실 세계의 삶과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첨예하게 대비하면서 설명한다. 그는 사후의 삶을 현실세계의 삶에 비교해 보면 사후의 삶이 초종적인 삶의 소망이며 목적임을 밝힌다. 즉 사후에 있을 영생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의 생명은 짐승보다도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세상의 온갖 부와 권력, 명예에 빠져 이 땅에서의 육체적 쾌락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욕망에만 매달리지 않도록 세상에 전쟁과 약탈 같은 고통과 악들을 허용하여 세상의 허무함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또 개인과 가족에게 닥치는 고통이나 환난도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일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이런 세상에서의 고통의 삶을 십자가의 훈련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인간이 이 세상의 삶에 집착하는 한 하늘아날에 대한 소망을 동경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의 삶도 훈련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최종목적은 미래의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장차 올 영생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생각하며 영생의 삶에 대해 사모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천국이 본향이고 현세의 삶은 유배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세의 삶을 영원한 삶과 비교해 본다면 이 땅의 삶은 죄로 얽매어 있으므로 주님이 부를 때에는 언제라도 이 땅의 삶을 마감할 준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현세의 삶에 대해 염세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가 이 세상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견해는 결코 이 땅의 삶을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칼빈이 갖고 있는 현세의 삶에 대한 멸시 사상은 하늘에서 누릴 영생의 삶에 비교해 무가치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또 이 땅의 삶이 얼마나 죄악 속에 있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자신의 주장이 이 땅의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이거나 염세적인 사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며 땅의 삶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땅의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영원한 삶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좋은 일들은 하나님의 축복, 선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하지 않고 도리어 감사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칼빈은 이 세상의 삶은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삶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곤고한 세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현세의 삶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는 죽든 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렇게 현세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규정하면서 세상의 삶에 대한 양극단적 오류를 지적한다. 첫째, 그는 물질에 대한 비관적 생각으로 현세의 삶에 대한 부정적 수덕주의를 지적한다. 칼빈은 동시에 물질을 자신의 사치를 위해 사용하면서 방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경계한다. 그가 밝히는 성경이 말하는 현세의 삶 속에서 물질 사용에 관한 원리는 물질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은 우리의 유익함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음식은 생필품으로 중요하나 동시에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즐거움, 기쁨을 주기 위해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의복과 각종 풀과 나무도 열매나 향기를 발하게 하여 생존의 문제를 넘어 그것들을 통해 미적 감각을 즐기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그것들을 즐기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즐거움의 소재로 주어졌지만 역시 인간의 욕심에 의해 남용되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물질의 즐거움에 빠질 때 영적 은혜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각자의 소명에 따라 만족하고 성실한 삶을 살 것을 주장한다. 만물을 통해 인간은 창조주를 깨닫게 되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오히려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육체의 정욕에 굴복하지 말고 억제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영혼을 오염시키지 않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경건의 의무라고 했다.
칼빈은 이 경건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최상의 길은 현재의 삶에 중심을 두지 말고 하늘의 영원한 삶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은 하늘의 영원한 삶에 목표를 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삶의 소명에 만족하는 삶을 살기를 주장한다. 우리가 처한 곤경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반대로 좋은 환경에 처한다 해도 교만하여 타락하지 말고 영원한 소망을 위한 삶에 충실히 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의 고귀한 자세라고 말한다.
칼빈은 결코 현세의 삶을 비관론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는 하늘의 영생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현세의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최종적 삶의 목적은 하늘나라의 불멸의 삶을 사모하는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종말론적 생명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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