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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달성경학교와 루터 맥커친

교회사

by 김경호 진실 2019. 12. 2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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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바른 눈 가진 인재 양성 진력
성경학교 운영 책임 맡아 올바른 시국관과 애국신앙 키워 … 80여 교회 세워 헌신


신앙의 길과 애국의 길이 다르지 않음을 일깨워준 루터 맥커친 선교사.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으니 여기서 인사합니다. 이번엔, 내가 하는 작별이오. 굿바이(Goodbye) 말고 씨 유(See you), 씨 유라고 합니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태극기가 사람들 손에 건네졌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거사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내일이면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그날 전주서문교회의 달성경학교 폐강일 분위기는 여느 때와는 달랐다.
달성경학교는 미국남장로교 전주선교부가 각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칠 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10년 전부터 시작한 교육과정이었다. 농한기인 매년 2월 각 교회에서 신실한 성도들을 모아 한 달 동안 집중적인 훈련을 실시했기에 ‘달(月)’ 성경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맥커친 선교사 60세 생일을 기념해 건립한 ‘마로덕 박사 기념비’는 현재 전주 호성교회 앞에 서있다.


운영 책임을 맡은 루터 올리버 맥커친 선교사(한국명 마로덕)는 이 소중한 시간을 알차게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달성경학교는 많은 일꾼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훗날 총회장을 세 차례나 지낸 김제 금산교회의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 무주의 교회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전일봉 장로와 김재순 영수 등 전설적 인물들이 바로 달성경학교 출신이었다.

이처럼 달성경학교가 단순한 성경전문가만 아니라 교회와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맥커친은 달성경학교의 커리큘럼을 성경교육만으로 채우지 않았다. 학생들은 달성경학교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바른 시국관과 애국신앙을 키웠다.

1919년 2월의 달성경학교는 조금 더 특별했다. 종강을 하는 마지막 날 맥커친은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굉장한 선물을 준비했다. 바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였다. 만세거사의 날짜를 맥커친이 직접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이 좋겠습니다.’


전주성경학원 학생 및 교직원들과 맥커친 선교사가 함께 한 1933년의 사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신호탄 삼아 곧바로 군산 전주 무주 익산 등 전북 각지에서 잇달아 만세운동이 번져가는 중에, 각 지역의 시위를 기독교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주도할 수 있었던 데는 달성경학교와 맥커친의 역할도 한 몫 한 것이다.

맥커친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1902년 한국에 들어와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던 1941년까지 그가 전북지역 일대에 세운 교회의 숫자는 무려 80여 곳. 북쪽 끝 무주에서부터 남쪽 끝 남원에 이르기까지 ‘설립자 마로덕’이라는 동일한 글귀로 역사를 시작하는 교회들이 끝도 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맥커친은 교회를 세우는 것만으로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립한 교회마다 성경학교를 일으켜 사람들을 가르치고 믿음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그는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맥커친 선교사 부부가 익산 서두교회 김성환 장로 부부와 촬영한 기념사진.


뿐만 아니라 1910년 전주남자성경학원을 세우고 교장직을 수행하며, 훗날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헌신했다. 달성경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맥커친은 자신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교회 뿐 아니라 민족을 책임지는 리더로 성장하기를 원했다.

과연 그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맥커친이 섬긴 교회와 학교에서는 수많은 목회자, 독립운동가, 순교자들이 배출됐다. 이들의 활약상은 최근 새롭게 발굴된 독립운동 비사 및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사적지로 지정되었거나 지정 심사를 앞둔 익산 서두교회, 진안 황금교회, 완주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 등의 역사와 더불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는 선교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까지 산악지방을 숨어다니며 전도와 교육사역을 계속하던 맥커친은 결국 일제의 추방명령으로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공들인 한국 땅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민족과의 영원한 작별은 아니었다. 추방 후 하와이로 거주지를 옮긴 맥커친과 그의 아내 조세핀은 거기서도 조국과 고향을 잃은 한국인 이주노동자와 전쟁 포로들을 상대로 복음전도와 인권보호에 앞장서며 남은 사랑을 다 바쳤다.

맥커친의 자취를 찾아


전주 최초의 양관인 ‘마로덕 선교사 사택’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역들로 바쁜 공간이다.


미국남장로교 전주선교부가 자리 잡은 옛 예수병원 건물(현 엠마오사랑병원) 곁에는 ‘마로덕 선교사 사택’(전주시 완산구 빙고리 2길 25/(063)232-8814)이 보존되어있다. 1910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맥커친 선교사 외에도 수많은 선교사들과 여러 한국인 사역자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어왔다.

2016년 예장통합 총회로부터 한국교회사적지 제29호 지정을 받았으며, 현재는 생동하는교회 기독교문화과학센터 전북기독교역사연구소 기독교전북원로회 전주주사모회 등 여러 단체와 기관들이 입주해 활동 중이다. 건물 입구에는 마로덕 선교사 부부의 과거 활동상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들과 각종 추모작품이 전시되어있다.

‘마로덕선교사기념비’는 현재 전주 호성교회(전주시 덕진구 호성신중길 6/(063)253-8288)에 세워져있다. 전북남성경학원 학우회에서 1936년 맥커친 선교사의 회갑을 기념해 건립한 이 190cm 높이의 비석 뒤편에는 한국전쟁 당시 총탄에 파손된 흔적이 남아있다.

당초 이 비석은 과거 예장통합 전북노회회관에 위치해 있었으나, 2007년 회관 매각에 따라 호성교회로 옮겨왔다. 맥커친 선교사가 1912년 ‘초곡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운 호성교회는 2013년 건립한 설립 100주년 기념관을 ‘마로덕기념관’으로 명명했다.


마로덕 선교사를 기리며
전북 산간지방 복음화 큰 공헌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루터 올리버 맥커친(Luther Oliver McCutchen·한국명 마로덕) 선교사가 왜 한국선교를 지원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비숍빌고등학교와 데이비슨대학을 졸업하고, 콜롬비아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01년 목사 안수를 받고, 1년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블랙스버그교회에서 목회하다, 1902년 미국남장로교 선교사 파송을 받았습니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하기까지 38년간을 전주 동북부 지역인 완주 무주 진안 장수, 그리고 남원과 익산 일부, 게다가 충남의 금산 서천지역에서까지 맹활약을 한 선교사가 마로덕입니다. 당시 전라북도는 총 26개 군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 11개 군을 마로덕 선교사가 담당하였으니 그 역할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로덕 선교사의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록이 있다 하여도 부정확하여 사실 관계가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출생 일시부터 여러 문서에 차이 가 있습니다.(1873년 2월 21일과 1875년 2월 21일 또는 1월 21일)

더욱 심각한 것은 <조선예수교 사기(상)>에서 ‘마로덕(馬路德)’으로 표기되어야 할 곳에 ‘마로득(馬路得)’이란 다른 사람 이름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실제로 ‘마로득’은 로날드 로이 메이어스(Ronard Roy Meyers)라는 다른 선교사의 한국 이름입니다. 그는 1973년에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로 파송 받아 충남·대전지역에서 활동한 인물이기 때문에, 적어도 색인에서는 바로 잡아야 되는데 전혀 다른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로덕 선교사의 기록을 지금까지 바로 잡지 못한 것은 연구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그가 선교한 지역이 전북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들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마로덕의 공로가 워낙 크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전북의 산간지방 상당수가 복음화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총각으로 지냈던 선교사역 1기와, 미국감리교 소속 여선교사 조세핀과 결혼 한 이후인 선교사역 2기에 그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우리 땅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하와이에서 한국인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제3기 선교사역을 감당하며, 우리 동포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마로덕은 ‘씨뿌리기 전도법’ 혹은 ‘농부선교법’이라는 선교방식을 주창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일화에 따르면 길거리나 장터 사랑방 등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콩을 볶아 나누어주며 1단계 ‘씨뿌리기’를 하고, 2단계로는 방문을 통해 성경을 더 가르치고 잘못 아는 것을 교정해주는 ‘물주기’와 ‘잡초제거’, 어느 정도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을 교회 구성원이 되게 하는 3단계 ‘수확하기’를 거쳐, 지역교회의 일꾼 될 자를 선별하는 ‘가지치기’의 과정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주남자성경학교를 설립하여 30년간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애국사상을 고취시켰으며, 1919년 전북노회 달성경학교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는가 하면, 1938년 6월 8일 전북노회 신사참배 결의 당시에도 앞장서 반대를 제기했습니다. 이렇게 마로덕은 한국인 곁에서, 한국인이 아니면서도 참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사랑에 감복한 한국인들은 결혼 후 돌아온 마로덕 부부에게 은수저 두 개를 선물하면서 하나는 ‘마목사’, 다른 하나는 ‘마부인’이라고 써줌으로 진한 친밀감과 동질의식을 표현했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없던 마로덕 선교사의 60세 생일에는 성경학교 학생들이 기념비석을 세워주기도 했답니다.

폴 리쾨르는 “과거의 어떤 일을 기억하였다고 하거나, 이전에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운 어떤 것을 기억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진실을 추구하겠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마로덕 선교사가 이 땅에 이룬 선교역사가 정확한 연구와 기억을 통하여, 다시 우리의 전도와 선교의 삶 속에서 실제로 꽃피길 소망합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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