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왕은 신이 아니며 한 인간일 뿐
신사참배만 아니라 동방요배도 거부
참된 진리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믿음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을 당시,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동방요배(東方遙拜)까지 거부하면서 순교한 양용근 목사.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태어나 일제치하에서 살다가 해방되기 직전인 1943년 12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40년이 채 되지 않았던 짧은 인생은, 복(福)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온 몸과 영혼으로 고난을 받아들인 그의 삶은, 무엇이 진짜 기독교 신앙인지를 보여주었다.
이제 그의 후손인 양향모 목사(광성교회 담임, 칼빈신대원 Ph.D.)가 역사 속에 묻힌 작은 할아버지의 삶과 신앙을 한국교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믿음을 지켰던 양용근 목사의 그 고난이 오늘날 복음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교회에 큰 울림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양향모 목사는 "교회가 정말 회개해야 할 것은 신사참배를 했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라며 "부디 할아버지의 순교 신앙이 한국교회에 십자가 복음의 정신을 다시 회복시키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에 본지는 양 목사가 얼마 전 순천대학교인문학술원에 기고한 논문 '일제 신사참배 강요와 양용근 목사의 순교사에 관한 고찰'의 주요 내용을 아래 옮긴다.
양용근 목사는 순천노회 노회원들과 함께 1940년 11월 15일 구속됐다. 신사참배 반대 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각혈을 하는 등 심한 해소천식으로 인해 일시 풀려났다가 순천노회원들과 함께 재판을 받기 위해 1942년 9월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재판에서 양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유일신인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고 그 외에 다른 신에게 절을 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죄가 되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의 왕은 신이 아니며 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신으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봉안전 참배나 동방요배는 물론, 다른 미신을 섬기는 것도 다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했다.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미결수로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그는 신사참배를 위시한 모든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정오가 되면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모든 수감자들은 당국의 지시대로 일어나 일본이 있는 동쪽을 향해 천황에게 인사를 올리는 동방요배를 했다. 그러나 양 목사만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양 목사가 순교를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수감생활 중에도 동방요배나 황국신민서사 제창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그것이 죄라고 인식해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나 그 외에 동방요배나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 목사는 동방요배도 죄라고 여기고 철저하게 거부했다.
감옥에 신사는 없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서 다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방요배나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의 국민의례는 매일같이 행했다. 동방요배 반대자들은 감옥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급식 제한이나 독방 감금, 그리고 고문들이 행하여졌기 때문에 모진 고난을 당해야 했다.
그가 순교하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부른 찬송이 '예수 나를 오라하네'였고, 이 찬송은 7년 후 그의 기도 동지이자 친구였던 손양원 목사가 부르며 순교한 찬송이 되었다.
그에게는 동시대의 다른 순교자들처럼 화려한 기념관이나 기념사업도 없다. 그를 알리는 책이나 논문도 많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순교자 못지않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이 있다. 참된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믿음이다.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27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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