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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성공보다 섬김’ 가르쳐준 엘리자베스 쉐핑

교회사

by 김경호 진실 2020. 1. 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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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에 치열했던 ‘거인’,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광주지역 소외된 이들의 선생이자 어머니 … 구제 뿐 아니라 ‘존중 받는 인격’의 삶 가르쳐


한국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치고 떠난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 선교사.


“‘겨우’라는 말은 지워야겠다. 가난한 선교사에게 약은 꽤나 비쌌거든.”(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어머니!”

광주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울부짖었다. 어린 소녀들, 고아들, 걸인들, 그리고 한센병자들까지. 자신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결국 본인은 영양실조로 숨진 한 백인여성을 위한 눈물이고 통곡이었다. 아련한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쉐핑, 한국 이름은 서서평.

소녀들이 기억하는 서서평은 이러했다. 이름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났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 양 살아가던 이 땅의 여인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지어 불러준 사람. 여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공부할 기회를 주고, 그렇게 배운 바를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사람.

비록 학교 재정이 부족해 부엌의 도마나, 장독대의 항아리 뚜껑을 칠판 대신해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소녀들은 마냥 행복했다. 소녀들은 자신들을 교육하기 위해 손수 누에를 키우고, 밤늦도록 실을 자아내던 교장선생님이자 ‘어머니’ 서서평의 수고를 알았다.


쉐핑은 무명으로 살아가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존중 받는 인격으로 살아갈 길도 열어주었다.


그러했기에 불과 몇 십 명 안 되는 이일성경학교 여학생들이 매주일 4만4000명에 이르는 주일학교 아이들을 이끌어 가르치고, 목요일이면 13개 마을에서 총 2550명이나 되는 교인들을 이끌어 기도회를 인도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다.

고아들이 기억하는 서서평은 이러했다. 만삭인 조선 여인이 병원으로 실려와 아이를 낳다 숨지자 그 아이에게 요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양자로 삼아 키운 사람. 이유를 모른 채 병원 앞에 버려진 아기, 계모에게 설움 받다 못 견디고 뛰쳐나온 아이, 어린 나이에 술집 시중을 들게 된 소녀 등 무려 13명의 양녀를 받아들여 구해준 고마운 사람.

이 아이들을 보살피느라 서서평에게는 여가시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은 극한의 굶주림을 견뎌내면서도 아이들은 어떻게든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애를 썼다. 덕분에 그녀의 아이들은 대부분 훌륭히 자라서 복음사역자로 활약하거나, 좋은 집안에 시집 가 믿음의 가문을 일으켰다. 그들의 후손 중에는 해방 후 장관직에 오른 인물도 나왔다.

걸인과 한센병자들은 어떠했을까. 마땅한 거처가 없어 광주천 부동교 아래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불쑥불쑥 찾아오는 서서평을 마주치곤 했다. 그녀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그의 손에는 먹을 것이든, 입을 것이든 걸인과 병자들에게 도움이 될 무엇인가가 들려있었다.


광주 양림동산 선교사묘역에 마련된 쉐핑 선교사의 묘소.


어느 추운 겨울, 길에서 떨고 있던 한센병자 두 사람을 서서평은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서는 망설임 없이 자기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담요를 반으로 갈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나중에 서서평의 부음을 전해들은 한 걸인은 “내가 죽고 그분이 살았어야 하는데”라며 통곡했다 한다.

미국남장로교선교부가 서서평에게 적은 금액을 보내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단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거처하는 집이 부서져도 고칠 생각을 못했다. 해야 할 일이, 도와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임종 후 그녀에게 남은 것은 담요 반 조각과 돈 7전, 강냉이가루 두 홉이 전부였다. 남은 몸뚱이까지 의학실험을 위해 기증할 정도로 그녀는 조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서서평의 삶은 개인 차원의 구제와 선행에서만 빛난 것이 아니었다. 조선간호부회를 창설하고 국제간호협의회에 가입하려 노력하다 이를 방해하는 일제에 맞서는가 하면, 만주로 피신한 조선동포들을 찾아가 진료하고 위로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설움을 공감했고, 기꺼이 그들의 편에 서서 싸울 용기를 발휘한 여장부였다.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현 연세대 간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의 서서평과 졸업생들.


당초 교회장으로 치르려했던 서서평의 장례식이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확대된 것은 놀랍게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 같았던’ 이 서양 여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재생한 예수’라는 표현으로 그녀의 일생에 찬사를 보냈다.

서서평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은 초라한 그녀의 집 거실 벽에 붙은 글귀 하나를 발견한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 짧은 구절 하나가 한 여인이 이방의 땅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 이유, 그리고 그 여인의 은덕을 먹고 자란 이 땅의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갈 이유를 명쾌하고도 충분하게 설명한다.

쉐핑의 자취를 찾아


쉐핑의 삶을 소재로 제작된 2017년 작 영화 <서서평-천천히 평온하게> 포스터.


광주광역시 남구 소재 양림동선교역사문화마을에는 쉐핑이 남긴 자취들이 가득하다. 쉐핑이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모아 가르치는 공간으로 활용했던 오웬기념각(광주 남구 백서로 70번길 6/(062)650-7647), 그녀가 불이 난 건물 속으로 환자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는 일화가 남은 광주기독병원(광주 남구 양림로 37/062-650-5000) 등이 대표적이다.

호남신학대 교정을 거쳐 양림동산에 오르면 광주에서 생을 마친 선교사들의 묘역(광주 남구 제중로 77)이 조성되어있고,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이라는 영어식 이름과 한국이름 ‘서서평’이라는 글자가 나란히 새겨진 묘비가 그 한 가운데 우뚝 서있다.

동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유진벨선교기념관(광주 남구 제중로 70)과 바로 그 옆에 최근 건립한 오방최흥종기념관을 들러야 한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좌우명을 온 몸으로 실천한 쉐핑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각종 전시물과 영상 등으로 엿볼 수 있다.

쉐핑이 광주에 열었던 이일성경학교는 전주 한예정성경학교와 합병해 오늘날 한일장신대학교(전북 완주군 상관면 왜목로 726-15/(063)230-5400)로 발전했다. 캠퍼스 안에는 광주에서 옮겨온 ‘서서평선교 20주년 기념비’가 남아 믿음의 후예들이 장성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통전적 선교의 삶 보여준 서서평
22년 사역, 교회 발전 초석 놓다


박은식 목사(광주 서현교회, 교육학박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간호선교사가 광주에 첫발을 딛고 사역을 시작한지 100년이 되는 2012년 3월, 광주 양림동 오웬기념각에서는 서서평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와 서평 평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서서평 선교사가 조선에서의 22년 사역을 통하여 여전도회 조직화, 사회 개혁운동, 여성 개화와 교육, 간호조직의 체계화 등으로 한국교회 발전의 초석을 놓은 동시에 사회 전반에 공헌한 부분들을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었다.

독일 비스바덴에서 1880년에 태어난 쉐핑은 4살에 친어머니와 생이별 한 후, 외조모 슬하에서 따돌림과 차별을 받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뉴욕시립병원과 유대인 결핵환자 요양병원 야간 담당 수간호사로 일하면서 뉴욕성서사범학교에서 학업을 병행하던 중,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 조선에 간호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설명을 듣고 감명과 도전을 받았다. 그 이후 미국남장로교 해외선교사로 지원하여,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3월 부산을 거쳐 광주 양림리에 도착하였다.

조선에 온 쉐핑은 처음에는 중병에 걸린 선교사를 도우며 언어훈련을 시작하였고,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윌슨 원장을 도와 병원사역을 하면서 지역 부인을 위한 복음사역 등을 하였다.

1918년 당시, 조선에는 선교사가 운영하는 3개의 한센병환자촌이 부산 광주 대구에,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시설이 소록도에 있었다. 특히 광주에서 쉐핑은 최흥종 목사의 도움으로 구라사역을 활발히 펼쳤기에, 전국 각지로부터 남녀 한센인들이 광주로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광주시민들의 불만과 원성이 이루 말할 수 없어, 1925년에 광주의 한센병 환자 600여 명은 여수 애양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광주지역 초창기 선교사들의 행적을 소개하는 유진벨선교기념관에는 쉐핑이 남긴 유명한 글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 새겨져 있다.


1919년 3·1운동은 광주를 잠시 떠났던 쉐핑이 돌아오는 계기가 된다. 서울 세브란스 연합의원으로 옮겨 근무하는 동안에 독립운동으로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치료하면서 쉐핑은 조선인들의 아픔을 깊이 체감하였다. 특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최흥종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하다, 쉐핑은 기미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는 올가미를 쓴다. 그 결과 형식상으로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광주 제중원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부터 쉐핑은 기회 있는 대로 전남 목포와 제주 모슬포 등 여러 곳을 다닌다. 부인성경공부반을 인도하면서 여성들에게 자긍심과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기 시작하였다. 쉐핑은 그들과 남장로교 부인조력회(여전도회 전신) 창설자 윈스브로 여사의 비전을 공유하며 전도부인 양성, 성미제도와 원주회 조직, 지역 미자립교회 지원 등을 계획했다.

쉐핑은 1920년 말에 자신의 침실에서 여성 성경공부를 시작하였고 이후 오웬기념각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일성경학교(현 한일장신대학교)의 기초가 되었다. 자신의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이라고 여긴 그녀는 ‘서서히 평탄하다’는 의미를 지닌 서서평(徐敍平)이란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한다. 고아 13명을 입양하여 자신의 숙소에서 양육하였으며, 매춘으로 팔려가는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1934년 2월 중순부터 시작된 폐렴이 악화되고 지병으로 앓아왔던 병증이 깊어져, 6월 26일 새벽 4시 서서평은 5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생전의 소망대로 그녀의 장기는 세브란스 의학원 연구용으로 기증되었으며, 장례식은 오웬기념각에서 광주 최초의 범시민적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937년 미국 장로교 여성사역부는 서서평을 위대한 장로교 7인의 사역자로 선정하고, 그의 삶을 담은 <영광스런 삶>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서서평, 당신을 보면 바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체취를 느낍니다. 저희들도 당신의 모습을 따라 살렵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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