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정성구 박사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저자는 종교개혁이전의 위클리프와 후스, 샤보나롤라의 설교를 중심으로 연구하여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설교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에 두고 구미 각국에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와 세미나, 심포지엄 등이 많이 준비되고 있다. 독일에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의 역사적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특히 화란을 중심한 Refo 500이 오랫동안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를 담아내려고 세계적 조직을 확장해 왔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신진 학자들이 대거 학계에 포진하여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대한 수많은 논문들과 저서들과 역서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가히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운동의 전성기를 맞이한 듯하다. 특히 요한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시대의 개혁자들의 연구가 봇물 터지듯 많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개혁적 선구자들의 사상과 삶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그 연구가 미미 하였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동안 종교개혁 전의 개혁자들의 연구물들도 여러 편 나왔다. 이는 한국교회의 신학발전에 매우 고무적이며 새로운 이정표가 될 듯싶다.
필자는 이 작은 글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한 두 세기 전에 종교개혁 이전의 선구자들이 어떤 분위기와 환경에서 활동했으며, 그들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끼친 공헌이 무엇인지를 생각코자 한다. 그리하려면 당연히 존 위클립(John Wycliff, 1330~1384),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949~1536), 얀 후스(Jan Huss, 1369~1415),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그리고 종교개혁의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면서도 가톨릭교회를 떠나지 못했던 에라스무스(D. Erasmus, 1466~1536) 등을 모두 언급해야 할 것이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위클립과 후스, 사보나롤라를 중심으로 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역사적 사건을 간단히 살피고 특히 그들의 설교를 통해 어두운 시대에 어떻게 교회 개혁의 뜻을 선포 했는가를 연구코자 한다.
이들은 모두 마틴 루터가 오기 전 중세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때, 성경을 재발견 하고 설교의 회복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체제를 비판하면서 성경의 진리를 증거 하다가 장렬히 순교당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바로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교회 개혁자로서 자기들의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이 소론에서는 그들이 주장했던 교리적 또는 신학적 견해를 모두 논할 수 없고, 다만 그들이 외쳤던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종교개혁의 틀을 만들고 어두웠던 중세교회의 여명을 밝혔는지를 말하고 싶다. 설교학자 리챠드 리스쳐가 말한대로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Preaching is the final expression of theology)이란 말이 맞다면,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의 설교를 연구함으로서, 교회개혁의 의미와 신학이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얀 다우마(J. Douma)가「칼빈의 설교 모음집」에서 말하기를 설교 없이 구원 없다(Zonder Prediking Geen Heil)고 말했듯이, 16세기 종교개혁 전에 이미 설교 부흥이 있었다는데 주목하고자 한다.
1 존 위클립(John Wycliff, 1330~1384)의 개혁과 그의 설교
밤이 깊을수록 별 빛은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는 말이 있다. 중세교회는 1000년 동안 깊은 밤이 계속 되었다. 이때 종교개혁의 새벽별 위클립이 출현했다. 중세 말기의 교회 형편을 간단히 개요하면, 사도적이고 복음에 기초한 교회는 사라지고 이른바 가톨릭교회는 거대한 공룡조직이 되어 국가와 사회에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잇따라 이민족들이 침입했고, 세속권력과 교권 사이에 엄청난 갈등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의 공방 끝에 동서교회의 분열이 고착화 되었다. 그리고 교황청이 십자군을 일으켜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이른바 종교재판을 통해 무차별 무자비한 학살 행위가 이루어졌고 이로 말미암아 암울한 시대는 계속되었다. 중세교회는 영적타락으로 신앙과 도덕이 몰락되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어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옛날 사도적 신앙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던 신비주의자들, 복음전파에 열정을 쏟아 부은 극소수의 수도사들, 그리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학, 철학, 법학 등 다양한 학문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중세의 가톨릭 수도원은 처음에는 세속을 거부하며 경건한 삶을 실천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방종과 부패, 타락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12세기 말부터는 유럽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볼 수 있는 여러 징조들이 감지되었다. 교황과 국왕 사이의 갈등은 절정에 도달했고, 프랑스와 잉글랜드처럼 민족 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도시 사람들은 내세보다는 현실세계에 집착하여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찾는 것이 지상 목표였다. 그 즈음 14세기에 들어와서 하늘의 심판인 듯이 흑사병이 휩쓸어서 유럽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세말의 교회는 교황권의 타락과 부패로 교회와 사회에 깊은 암흑이 드리워졌다. 가톨릭교회는 대성당과 비대한 조직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 등 온갖 부정한 방법과 술수로 사람들을 내몰았다.
가톨릭교회는 재물과 권력에만 눈이 멀었고 일반 대중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그 옛날 소수의 왈도파(Waldo)의 성도들은 아직도 은둔해 살면서 생명줄을 이어 오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의 근거임을 믿는 성도들이 극소수 남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 존 위클립이 로마가톨릭의 체제와 교황권에 도전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설교하기 시작 했다. 말 그대로 그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 된 것이다. 14세기 잉글랜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가톨릭교회는 사도적 신앙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교황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라고 자칭하면서, 잉글랜드를 지배하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돈과 권력과 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면죄부 판매와 모든 악행들이 자행되었다. 말하자면 교황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탈하고 짓밟았다. 그보다 교황이 둘 그리고 셋으로 분열되면서 로마와 아비뇽으로 나누어졌고, 로마가톨릭 사제들은 형식적 종교의 체제 유지만을 앞세웠을 뿐이고, 성경도 모르고 복음의 내용도 알리가 없었다. 한편 교황의 권력 남용이 극도에 달하자 이에 대한 원성과 반대의 목소리도 유럽 전체 사회에 점점 커지게 되었다.
가톨릭교회의 부패는 교황 자신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모든 감독과 사제들의 부패도 상상을 초월하였다. 교회는 잉글랜드 토지 3분의 1을 소유하고 교회의 수입은 정부의 수입보다 두 세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로마가톨릭교회는 끊임없이 면세를 요구하고, 사제들은 고위 직분 일수록 재물을 더 많이 긁어모았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늙어 임종 시에 재산을 교회에 바쳤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요해 지자 국가도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고, 성직자들의 성적,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그러니 잉글랜드 교회는 사도시대의 신앙과 영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리는 부패한 교황과 감독들과 수도사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저급해졌다. 그러니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경에 기초한 복음에 대한 설교가 없어지고 미사와 7성례를 집행하고 돈을 모으는 의식적 종교가 되었다. 사제들은 성경에 무식 하였지만, 또한 일반대중들을 무지하고 무식하게 만드는 것이 저들의 하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대중들을 무식하게 만들어야 사제들에게 전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러한 암흑의 시기에 한 가닥 빛을 비춘 사람 즉, 성경에 기초하여 교회와 교리의 개혁을 외치는 찬란한 광명 존 위클립이 나타났다. 이 시대에는 가톨릭교회를 비판하거나 교황에게 대적하여 성경의 진리를 설교하는 것은 생명을 내건 반란 행동이었다. 위클립은 종교개혁의 디딤돌이자 새벽을 깨우는 자로서 그는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이지만 천상 설교자였다. 일찍이 존 밀톤(John Milton)은 말하기를 “그는 모든 유럽사회에 계시의 말씀을 증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첫 번 설교자”라고 했다. 또 윌리암 한나는 주장하기를 “위클립은 설교에서 예정론 교리를 성경대로 받아 들였다. 우리는 오늘의 교리에서 고백하는 대로 보면 그를 칼빈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위클립의 설교는 어떠했는지를 요약해 보자. 위클립은 옥스포드의 학자이지만 가톨릭교회의 해악과 부패를 세상에 알리고, 성경의 핵심적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에 주력했다. 위클립은 그의 설교에서 성경의 원리에 벗어난 교황주의와 교황의 세속적 통치권, 교황의 무오성, 성직매매, 교황청의 횡포, 권력 남용 등을 낱낱이 비판했다. 위클립의 메시지는 교황이라도 성경적 진리에 바로 서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으며,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은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위클립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가톨릭의 화체설(化.說)을 강력히 비판할 뿐 아니라, 면죄부(Indulgence)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고해성사를 분명히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설교를 통해 연옥(purgatory)사상, 마리아 숭배사상(mariolatry), 성인숭배(Hagiolatry), 성상숭배(Icon Worship), 성체 숭배, 성화 숭배 등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위클립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일체의 신앙사상이나 교리체계도 비판했다. 따라서 성직자들이 먼저 대오각성을 해서 청빈과 검소, 도덕적 삶의 모범을 보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위클립은 설교를 통해서 비도덕적이고 무지한 성직자들에게는 사례 지급을 중단할 뿐 아니라 공적 예배를 인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 어두웠던 중세시대에 위클립은 무지했던 가톨릭 신앙에 종지부를 찍고 성경을 재발견해서 대중들에게 복음을 설교 했을 뿐 아니라, 그는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대헌장(Christian′s Magna Carta)라고 주장했다.
위클립 설교의 핵심은 결국 성경만이 신앙의 척도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사도적 교회 곧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설교했다. 중세 가톨릭은 성경의 해석권이 사제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사제의 임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고 했으니 성경의 권위를 처음부터 없애 버렸다. 중세교회는 교회의 전통, 교황, 공의회(Council), 교회법을 성경의 진리 보다 훨씬 윗자리에 올려놓았는데, 위클립은 이것을 뒤집고 성경 진리 위에 교회와 교리를 올려놓았다. 특히 위클립은 1378년 「성경의 진리」(The Truth of Holy Scripture)란 책에서 이런 내용을 구체화 시켰다. 이 책은 평소 그의 설교를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클립은 오직 성경만이 모든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며, 모든 진리는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진리라고 설교했다.
위클립의 설교에서, 그의 성경 이해는 성경의 절대 권위와 영감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에 일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 교회의 최고의 권위로 인정했다. 그러므로 위클립은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아닌 성경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위클립은 성경이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로 세워지기를 원해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로 했다. 중세 교회는 1000년 동안 오직 성직자만이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지만, 그마저도 사제들은 성경에 무식했음으로 온갖 미신과 잘못된 교리로 변질되어 있었다. 위클립은 이런 미신의 오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모국어인 영어로 자유로이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영어로 설교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 성경(Latin Vulgate Bible)만을 인정하고 다른 나라말로 성경이 번역 되는 것을 일체 금지했을 뿐 아니라, 성경 번역자들을 엄히 처벌하였던 시대였다.
그러한 정황 가운데서 1382년 마침내 위클립은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펴냈다. 이것이 바로 위클립 성경(The Wycliffe Bible) 이다. 위클립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번역 했지만, 이는 제롬(Jerome)이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후 중세 천년 만에 있었던 놀라운 사건이며 일반 대중들이 복음에 눈을 뜨게 하는 대변혁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서 비밀스러히 전달된 영어로 된 위클립의 필사본 성경을 통해서 대중들의 심령이 소생함을 얻는 동력을 얻었다. 이 위클립의 필사본 성경이 비밀리에 계속 전파됨으로, 위클립은 인간의 구원은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기초라는 사실이 설교되기 시작했다. 로마가톨릭 당국은 위클립의 성경을 없애 버리려고 온갖 공권력을 동원 했고, 그의 설교를 탄압 했으나 한 번 트인 물고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위클립은 성경 번역이 필생의 사역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는 설교자로서의 삶이었다.
가톨릭교회가 아무리 위클립의 설교를 통제했지만 그는 공중이 모인 곳은 어디든지 성경과 성령의 능력에 의한 말씀 선포를 계속 했다. 위클립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고 전에 깨닫지 못한 신앙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위클립의 설교는 영어로 했기에 일반 대중들의 가슴에 파고 들었을 뿐 아니라, 교황과 사제들의 부정부패를 지적함으로 심지어 영국 국왕과 정부 관리들의 지지까지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위클립은 로마 교황이 아니고 국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소원했기에 후일 국왕을 머리로 하는 성공회 조직의 길을 터놓았다. 결국 교황과 추기경 등 사제들과 맞장을 뜨고 있던 국왕과 정부 관리들의 후원 때문에 위클립의 설교는 날개를 단 셈이었다. “위클립의 작은 창구”(Wycliff Little Wicket)라는 설교형식의 작은 논문들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교회개혁 정신과 방법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설교는 활기찬 문체, 엄격한 표현, 치밀하고 논리적 타당성 등으로 교황권과 마리아 숭배, 화체설 등을 예리하게 공격하였다. 위클립의 설교는 당시의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을 격동시켰고 그의 친구들마저도 놀라게 했다.
개혁가로서의 위클립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설교자로서의 그의 재능은 뛰어난 것이었다. 그의 설교들은 일부는 라틴어로 일부는 영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미사만을 보아 왔던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을 향하여 위클립의 설교는 철저히 성경에 기초하였음으로 대중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물론 위클립도 그 시대의 아들인 만큼 스콜라적이고, 풍유적인 성경해석에다 로마 가톨릭적인 문제점에서 확실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 방향은 개혁주의 신앙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위클립의 설교는 평범한 성경 해석에다 복음적 교리를 힘 있게 붙들었다. 지금 전해내려 오는 위클립의 설교들은 일종의 요약 설교로서 실제로는 훨씬 풍성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 설교들에서 위클립 자신이 그랬을 뿐 아니라 다른 설교자들에게 자유롭게 확대 설교할 수 있도록 방향 제시를 잘해두었다. 예컨대 “부자와 나사로의 첫 번째 설교”란 제목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설교에서 설교자는 부자들의 거짓 자만과 이 세상 권세자들의 향락에 젖은 삶과, 지옥의 기나긴 고통과 천국의 즐거운 축복을 이야기하되 시간이 허용 하는 한 길게 설교 하십시오”라고 덧붙였다. 특히 위클립의 설교 모델은 눅 15장 설교 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복음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세인과 제사장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의 백성이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배우러 나오는 것과, 예수그리스도는 선하신 분으로서 그들을 은혜롭게 대해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비난하고, 그리스도를 훼방하며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사건에도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수도원장은 서기관이요, 사제들은 바리새인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평민과 교제하는 주의 종은 세리라고 하며, 세상의 군주를 죄인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지극히 높고 정교하며, 세상 군주를 죄인이라고 하면서, 너무나 거룩한 하나님의 법은 오직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만이 언급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수도원장들은 정말 서기관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영혼구원에 쓰기 보다는 사람들로부터 부지런히 약탈한 돈을 계산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 신부들은 바리새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마치 당시의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보통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들끼리의 타락한 방식에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의사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식사 하신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을 회개시킴으로써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법과 자유를 방해하던 저 교만한 제사장들을 당황케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들은 마땅히 높은 직책 그 자체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워줄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배웠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시대에 일할 그의 종들에게 가르침과 모본을 보여 주심으로 해서 그들도 그처럼 지혜롭게 할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법과 자유에 굳게 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은 모든 사람의 구주로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도 구원하시는 자임을 보여 주시고자 했습니다.…”라고 했다.
위클립의 설교는 중세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메시지로도 손색이 없는 정확한 외침이었다. 그의 설교에서 어휘는 단호했고 두려움 없이 당시의 교직자들을 공박하는 모습이었다. 어두웠던 중세시대에 떠오르는 새벽별 위클립의 설교는 잉글랜드 사회에 그리고 교회에 변화와 개혁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위클립은 말하기를「사도시대 이후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다. 또 설교는 주의 종들의 첫 번째 사명이다. 왜냐하면 설교를 통해 복음의 생명의 씨앗이 발아되고 심령이 변화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위클립은 그 당시 설교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찰스 다간(Charles Dargan)의 말대로 설교사(說敎史)는 곧 교회사(敎會史)이다. 설교가 부흥된 시기가 곧 교회가 부흥된 시기다. 위클립은 설교를 통해서 교황의 타락이 세속적 재산과 권력을 탐하는 데서 출발했기에 교황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공격했다. 그리고 교회와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무오의 성경에 기초를 두었다. 따라서 그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과 비성경적임을 논리적으로 변증했다. 그리고 제자들을 키워서 다시 복음 설교자들인 롤라드파(Lollards)로 만들어 영국의 각 촌과 마을로 파송했다. 만에 하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5~1468)의 인쇄술이 위클립 시대에 발명되고 제작 되었더라면 종교개혁은 아마 루터로 부터가 아니라 존 위클립부터 시작되었다고 역사는 기록되었을지 모른다. (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http://www.reformednews.co.kr/7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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