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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여명: 위클립과 후스, 샤보나롤라의 설교를 중심으로 2

정성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20. 2. 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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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성구 박사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저자는 종교개혁이전의 위클리프와 후스, 샤보나롤라의 설교를 중심으로 연구하여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설교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2 얀 후스(Jan Huss, 1369-1415)의 개혁과 설교

미국 트리니티 신학교의 다이비드 랄센(David Larsen)은 얀 후스를 장차 오는 시대의 은혜스러운 섬광(Gracious Foregleams of the coming day)이라고 했다. 존 위클립과 얀 후스 그리고 마틴 루터, 요한 칼빈을 잇는 벨트라인은 종교개혁의 한 축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얀 후스는 존 위클립에서 영향을 받고 마틴 루터에게 결정적으로 종교개혁의 바톤을 넘겨준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루터는 1519년 말하기를「나는 후스주의자이다」고 하리만큼, 후스 없이 루터를 말할 수 없다고 본다.

보헤미아(현 체코)의 개혁자이며 순교자인 얀 후스는 1373년 보헤미아의 후스넥이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스는 체코어로 ‘귀’라는 뜻이며 그가 태어난 마을이 거위를 기르는 곳이란 뜻을 가졌다. 그의 부모들은 그 당시 일반사람들의 바램처럼, 후스가 교육을 받고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후스는 1390년 프라하 대학교를 입학해서 1393년 문학사를, 1396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그리고 1404년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후일 후스는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1402년에 후스는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 교구신부 겸 설교자로 임명 받는다. 후스는 설교를 시작 하면서 비로써 회심을 체험했고, 복음을 선포하는 위대한 사명감에 불이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후스가 프라하 대학교에 들어가던 그 해에 프라하 시와 프라하 대학교에 교회개혁의 동력을 불어 넣을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저명한 학자인 프라하의 제롬(Jerome of Prague)이 영국의 옥스퍼드로 건너가 위클립의 가르침을 배우고, 자료들을 갖고 와서 프라하 대학에 퍼트리게 된 사건이다. 그러면 영국과 보헤미아가 지리적으로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학문적, 종교적 교류가 폭 넓게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영국 왕과 보헤미아 국왕의 여동생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적 사건으로 당시 보헤미아 학생의 상당수가 옥스퍼드로 유학을 했다. 프라하의 제롬이 가져온 위클립의 필사본 자료들은 수년 동안 중세기적 가톨릭교회를 새롭게 하려던 분위기가 감돌던 프라하에 교회 개혁의 방향과 교리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이때로 부터 얀 후스는 위클립의 가르침에 친숙하게 되었고, 위클립의 책자들을 체코어로 번역 하면서 후스 자신이 직접 성경에서 깨달은 진리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후스가 설교를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심지어 로마가톨릭 교도들도 후스의 교회 개혁운동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후스가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부패 뿐 아니라 교리적 개혁을 설교하기 시작하자 가톨릭교회 당국은 후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크게 분노하였다. 얀 후스의 교회개혁 사상은 대부분 위클립에서 배운 것으로서 그의 대표적 저서인「교회론」(De Ecclesia)에 잘 표현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진정한 의미의 교회란 선택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는 신비적 몸이라고 하였다. 또한 교회의 직분 자체가 선택받은 사람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설교로 후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체제에 도전하고 교회의 권위에 맞섰다.

그로 말미암아 후스는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뿐 아니라 모든 채플에서 설교가 금지 되었으나 후스의 설교는 멈추지 않았다. 후스는 대학 교수로서의 사명보다 설교자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후스는 성경연구와 체코어 설교를 통해 삼천 명도 넘는 프라하 시내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에서 모국어로 열정적인 개혁적 설교를 함으로서 체코 민중들을 깨웠다. 그래서 후스는 대주교에게 파문당하였고, 로마로부터 소환명령을 받고서도 불응하니 교황으로 부터도 파문당했다.

이를 계기로 로마가톨릭교회는 후스를 코너로 몰아넣어 옥죄기 시작했고, 후스는 1414년에 개최된 콘스탄츠(Constance) 종교회의에 소환 당했다. 신성로마의 지기스 문트 황제는 후스의 안전보장을 약속했으나 콘스탄츠 회의는 그를 체포하여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했고, 후스는 장렬히 순교의 잔을 마셨다. 후스가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자로 자리매김 하고 있을 때, 교황은 교구 교회와 수도원 교회 외에는 후스의 설교를 금지하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는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를 간접적으로 금지하는 뜻이었다.

교황은 주교에게 설교 금지권을 주었고 주교는 후스의 설교를 금지했으나 후스는 단호히 이를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목적은 하나님이 내게 알려주신 진리, 특별히 거룩한 성경의 진리를 죽기까지 지키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원히 전능자에게 있으며 영원히 전능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후스의 메시지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며 생명을 내어 건 메시지였다. 후스는 설교 사역 외에도 앞서 말한 대로「교회론」(De Ecclesia), 성직매매론(De Simonia) 등을 저술하고 위클립의 저서들을 체코어로 번역했다.

후스는 그의「교회론」에서 위클립의 저서들을 많이 인용했지만 갈수록 성경의 내용과 초대교부들의 입장을 많이 채용했다. 특히 후스는 어거스틴(St. Augustine)의 신학과 신앙노선을 따랐다. 후스는 교회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핵심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만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후스의 교회 이해는 선택된 자들로 구성된 우주적인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의 토대는 믿음이며,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후스는 신앙을 말할 때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즉 신앙이란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고, 둘째로 신앙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며, 셋째로 신앙이란 하나님이 만물을 사랑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고 했다. 후스의 신학에 따르면 권위(Authority)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성경 ② 사도적 전통 ③ 니케아 신경과 아다나시우스 신경 ④ 교부들의 교훈 ⑤ 공의회라고 했다. 후스의 교회론은 예정론에 근거한 종말론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후스는 주장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부름 받은 공동체이지만 또 누가 진정으로 교회에 속했는지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는 제도나 기구가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라 했다.

후스는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에서의 설교에서 교황은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질타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황이 권세를 잡은 것은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가 기독교 공인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교황에게 세속적 재판권을 넘겨줌으로 생겨난 불상사 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원인이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며 법규이므로 교황의 권위란 인위 적으로 꾸며낸 것이며 교황권은 기독교 신앙에 백해무익한 거짓된 것이라 했다. 특히 후스의 설교의 핵심을 이루는 교회론 중에서 1413년 6월 21일 스탄니스라우스(Stanislaus)와 팔렉츠(Palecz)에게 보내는 답변서를 체코어로 썼는데, 이른바「여섯 가지 오류」(De Six Erroribus)를 발표했고, 이 글은 베들레헴 교회당 안쪽 벽에 부착했다. 그 여섯 가지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첫째 오류, 창조에 대하여, 사제들만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한다는 것인데, 이건 정신 나간 사제들이다. (마리아는 한 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낳았지만, 자기들은 성만찬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한다니 이는 아무 근거 없는 거짓이며 오류에 불과하다.) 둘째 오류, 신앙에 대하여, 사제들은 성도들이 마리아, 성인들, 그리고 교황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그것은 꾸며낸 거짓이며 오류이다.(후스는 하나님과 성경에 계시된 것만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셋째 오류, 죄의 용서에 대하여, 사제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 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자임을 넘어, 자신들의 마음대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오류이다.(후스는 하나님께서 만이 죄를 용서 하는 데, 사제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넷째 오류, 순종에 대하여, 사제들의 오류는, 자신의 뜻대로 죄를 용서하는 특권이 있음으로 사제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은 오류다.(후스는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말씀과 일치할 때만 순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제들의 가르침이 성경 말씀에 어긋날 때는 그 명령에 당연히 불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다섯째 오류는, 파문에 대해서, 교회는 어떤 죄에 대해서도 파문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오류이다.(후스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죄를 범한자만 파문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여섯째 오류, 성직매매에 대하여(Symony), 사제와 주교들이 교회 안에서 성직을 합법적으로 사고 파는 데 이것은 불법이며 오류이다(후스는 말하기를 성직은 교회의 공공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이므로 결코 사고 팔 수 없다 했다.).

이와 같은 후스의「여섯 가지 오류」가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의 안쪽 벽에 붙인 것은 루터의 95개조와 맞먹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메시지였다. 결국 루터의 95개조를 요약하고 축소한다면 얀 후스의「여섯 가지 오류」란 항의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스는 그의 여섯 가지 오류란 원칙을 중심으로 당시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설교했으니, 루터 오기 전에 한 세기 전에 종교개혁의 확실한 이정표를 만든 것이다.

후스는 위클립처럼 원래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대부분 위클립으로부터 빌려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후스의 가르침은 단순히 위클립의 복사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후스는 위클립을 존경하고 따랐으나 위클립의 책을 취사선택 했고 더욱 발전시켰다. 어느 의미에서 후스는 온건한 가톨릭 개혁가로 볼 수 있으나, 그 후의 모든 개혁주의자들에게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칭송을 받았고 기초를 세웠다. 그 이유는 후스는 설교를 통해서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주장함으로 교회의 권위를 성경 보다 높이 두려는 가톨릭 교리를 비판하고,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주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후스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후스는 그 어두운 시대에 설교와 글로서 교황청과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후스의 설교는 그의 측근들마저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많은 적들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한 번 마음을 돌이킨 후스는 결코 뒤돌아 설줄 몰랐으며, 불타는 용기와 능력에 있어서 위클립의 최대의 추종자가 되었고, 후스는 백년 후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 운동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후스가 했던 많은 설교가 전해져 내려오며, 얼마는 요약 설교로서 주로 라틴어와 체코어로 되어 있다. 후스는 언변적 탈렌트는 별로 없었으나 후일 요한 칼빈의 설교처럼, 대중들을 기교로서 만족시켜 주느니 보다 강력한 의지와 진리의 확신으로부터 오는 능력과 진실성 때문에 그의 설교는 매우 무게가 있었고 대중들에게 놀라운 감화를 준 것 같다.

후스의 설교가 보헤미안인들을 감동시키고 영향을 끼친 것은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죄악을 지적한 것도 있지만, 독일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체코인들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없지 않았다. 박해는 인간의 육체는 죽일 수 있으나 사상은 결코 죽일 수 없었다. 후스는 영국의 존 위클립의 영향을 정확히 받고 성경에 근거해서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후스는 100년 후에 출현한 루터처럼「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는 깨닫지 못했으나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성경만이 신앙의 근거임을 확실히 설교했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나타난 교회개혁 사상은 결국 백년 후 루터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체코 형제 복음 교회24와 독일의 모라비안 형제단은 그의 감화로 일어나게 되었다. 후스의 교회개혁 운동은 약소국 체코의 실패한 종교개혁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만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내 생각에 존 후스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복음을 그의 피로서 지켜왔다”고 했다.

3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의 개혁과 설교

사보나롤라가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어두운 중세기 말에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회개를 외치다가 종교재판을 받아 화형을 당해 순교의 잔을 마셨다.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개혁자 지롤라보 사보나롤라는 1452년 9월 21일 북이탈리아 페라라(Farrera)에서 출생했다. 그는 교양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소년시절부터 생각을 많이 하고 침울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꽤 일찍부터 당시의 가톨릭교회의 부정부패와 교황권의 전횡의 문제에 민감하게 생각했고, 피렌체에서 망명 온 스트로츠 가문의 여성에게 집안의 차이를 이유로 모욕적 퇴짜를 당하여 실연하고 부터 그의 성품은 더욱 우울해졌고 인간성에 대한 실망도 컸다. 마치 크리소스톰의 경우처럼, 그가 살던 방종한 세상에 이끌리어 가기보다 오히려 쫓겨난 결과가 되어서, 금욕적이고 깨끗한 삶을 유지하려고 했다.

22세 때에 어느 날 설교를 듣고 당시 세상에 창궐한 죄악의 타락상을 듣게 되었고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일까, 1472년에 그가 쓴「세상의 몰락」(De Ruina Mundi)이란 시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세상의 우두머리 로마, 결코 위대한 직분으로 돌아갈 수 없네”라고 했다. 그 후 그는 블로그나(Bologna)의 도미니칸(Dominican)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견습신부로서 또는 예비설교 학생으로서 그는 경건 생활과 학문에 큰 열심과 성의를 나타내었다.

사보나롤라는 발로그나에서 7년 동안 학문과 경건 훈련에 몰두한 후, 도미니칸 교단에서는 그를 설교사로 파송했다. 사보나롤라는 그의 고향인 페라라에서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성공적인 설교자가 못 되었고, 페라라 사투리에다 학자적 태도의 설교로 대중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설교여행 중 북이탈리아의 브레스키아(Brescia)에서의 대중들 앞에서 드디어 그의 설교에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장래의 설교의 요점들을 발견해 냈으며, 장차 그의 메시지에 담겨질 세 개의 유명한 메시지의 핵심을 찾아냈다.

첫째, 교회는 채찍을 맞게 될 것이다. 둘째, 그리고 교회는 새로워질 것이다. 셋째, ‘이 모든 일이 빨리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장차 올 종교개혁을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그 후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큰 선풍을 일으켰고 그의 명성과 예언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편 도미니칸 교단의 총회가 레기오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예언자적 설교를 하게 되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의 중요 내용들은 교회와 세상의 부패에 관한 것이었기에 타락한 성직자들로 부터 증오와 미움을 사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브나롤라는 성 마르코 수도원의 부원장 시절 교회개혁에 대하여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가톨릭교회의 철저히 타락한 세속화의 모습과 사치와 오락에 빠져 있는 대중들을 바라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교회의 도덕성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통해서 세속적 인문주의와 인간의 피상적 육감만을 자극하는 예술과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메디치 가문의 횡포를 비판하고 교회개혁을 힘 있게 부르짖었다. 악명 높은 교황 알렉산더 6세(Pope Alexander VI)는 이 건방진 설교자의 입을 다물게 하기로 결심했다. 교황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한 번은 교황이 그를 초청했으나 거절했다.

또 한 번은 추기경이 그의 마음을 돌이키면 추기경의 빨강색 모자를 줄 터니 오라고 회유 했을 때 사보나롤라는 추기경의 명령을 무시하고 거절했다. 당시는 사보나롤라의 지지자들이 집권하고 있는 터이라 그를 두둔해 주어서 무사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약점 중의 하나는 그의 회개의 설교가 때때로 성경 자체에 근거하기보다 인간의 도덕적 양심에 호소하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에는 당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노릇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통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렌치를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공화정치의 도시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설교했다. 물론 그는 수도사이자 설교가 였고 도덕적 이상주의자였다.

사보나롤라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간결한 문장과 대중들을 사로잡는 쉬운 언어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격적 감화를 주었던 사람이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와서 집회장소를 산타마리아 성당으로 자리를 옮길 정도였다. 설교자로서 사보나롤라는 교부시대의 대설교가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후 역사에 가장 뛰어난 인물 중의 하나였다. 사보나롤라는 천성적으로 뛰어난 웅변가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말하고 있는 동안에 청중을 사로 잡아버리는 영성(.性)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지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왔고, 감동을 받아 그의 설교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인 데다 영적 상상력이 풍부했다. 사보나롤라는 대중들에게 거침없이 회개를 외쳤을 뿐아니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외쳤다. 당시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시민 스스로가 자기들을 통곡파(piagnoni)라고 할 정도였다.

사보나롤라는 스콜라적인 정교함과 예리함, 사고의 명료함과 상상력이 그 설교에 나타났다. 사보나롤라가 플로렌스에서 처형을 당하고 있을 때 루터는 겨우 14세의 학생으로서 가난한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먼 훗날 위대한 사역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루터의 선구자를 말한다면 위클립, 후스, 그리고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마틴 루터에게 지도력은 위클립이, 종교개혁의 의지는 후스에게, 설교는 사보나롤라가 영향을 주었다고 보면 된다. 사보나롤라는 위클립이나 후스처럼 신학적으로 내어 놓을 것은 별로 없지만 그가 속한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죄악을 통렬히 비판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순교 당하는 날까지 계속 하였다. 그러므로 사보나롤라는 설교의 부흥을 통한 교회개혁의 선구자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결론

우리는 위에서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위클립, 후스, 사보나롤라의 사상과 삶 그리고 그들의 설교에서 나타난 교회개혁의 의지를 살폈다. 특히 위클립과 후스 그리고 마틴 루터를 잇는 개혁운동의 벨트라인을 볼 수 있다. 특히 체코의 신학자 빌렘 헤롤드(Vilem Herold)의 평가처럼 위클립은 불씨가 되었다면 후스는 촛불 이었고, 루터는 횃불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위클립과 후스, 사보나롤라 같은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생명을 걸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임을 설교하다가 마침내 순교의 잔을 마신 종교개혁전의 선구적 개혁가들로 말미암았다.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가들, 그들은 생명을 바쳐 피를 뿌려 순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사상은 설교를 통해, 저술을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때가 차고 모든 여건들이 잘 조성되었을 때 그들이 뿌린 씨앗은 루터와 칼빈 기타 종교개혁자들에게 열매를 맺고 그 꽃을 피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복음과 이 신앙은 앞서 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위에서 살핀 대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트는 중세적 세계관과 타락한 교회의 시스템에서 원시 기독교 즉 성경적이고 사도적 기독교로서의 회기를 추구하는 복고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맞다면, 마틴 루터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독일의 종교개혁은 15세기의 얀 후스의 지도하에 일어난 보헤미아(체코)의 종교개혁의 반복된 현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후스는 영국의 존 위클립의 종교개혁을 반복한 것이 사실이므로 16세기 종교 개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위클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위클립 없이 후스 없고, 후스 없이 루터 없고 루터 없이 칼빈은 없었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여명을 살피는 것은 오늘의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를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http://www.reformednews.co.kr/7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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