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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성경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으로부터

성경

by 김경호 진실 2020. 12. 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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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신자들의 신앙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른 결과적인 산물이다.

신자의 신앙과 실천적인 행위의 모습들은 다음과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첫째, 신앙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성격과 형태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 지식으로부터 말미암는다. 하나님을 오해하면 신앙도 오해되어 잘못된 신앙으로 삶의 형태를 파괴한다.

둘째,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알기 위하여 성경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보고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알려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성경을 오해하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하나님을 오해할 경우 올바른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결국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믿음은 달라진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경에 대해 모호할 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모호해진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같은 하나님에 관한 믿음과 지식이 전려 달라진다.

셋째, 종교개혁은 성경 해석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가톨릭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대한 지식을 오해한 것은 하나님을 오해했고 그 오해는 성경을 오해함으로부터 시작됐다. 성경애 대한 그릇된 해석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믿은 신앙의 파괴로 이어졌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이 활발해 질 때 그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은 그 시대를 정화했고 신자들의 신앙을 역동적으로 이끌어 갔다. 그리고 사회 전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교회는 그 시대를 이끌어갔다.

넷째, 한국교회 초기 교회 부흥은 성경공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 땅의 한국에 복음이 전래될 당시에 그대로 드러났고 입증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전수된 한국교회는 철저한 성경공부로 부터 시작됐다. 교회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만들어 정착했고 성경 그 자체를 놓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

1907년 평양 부흥회 역시 감리교 하디 선교사가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성경공부하는 모임에 참석하여 대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것이 부흥의 불길로 이어졌다. 전국 교회가 성경공부에 총 매진했고 성경을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의 힘을 키워갔다. 그래서 부흥회가 아니라 말씀 사경회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과연 교회에서 성경공부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주일 낮 설교 한 편으로 한 주간을 지탱하며, 이러한 적용일변도의 설교를 통해 신앙을 해야 하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과연 초기 한국교회처럼 역동성을 갖게 될 것인지 의문이다.

다섯째, 목회자들은 계속해서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이제 더이상 성경을 연구하지 않아도 설교하는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다른 목회자의 설교 원고가 수 만편으로 전해지고 있고 있다. 그러한 설교를 복사해서 강단에 가지고 올라간다. 그리고 그 설교를 잘 각색하여 설교 원본 작성자 보다 더 잘한다.

그러나 똑똑한 신자들은 그러한 설교의 원본 작성자는 지금 듣고 있는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의 것이 아님을 안다. 만약에 설교 원본 작성자가 담임목사일 것 같으면 담임목사는 감리교, 순복음 교단에 소속된 목사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하는 그 설교 원고에 드러난 교리는 감리교, 순복음 교단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성도들보다 교리적으로 덜 민감하면 곤란하다. 성도들보다 성경 본문에 대해 더 치열한 고민과 거룩한 고민을 해 보지 못한다면 이 역시 곤란하다. 성경을 통해 이 시대를 향한 거룩한 분노도 없다. 먹고 살기 위한 직업적인 설교꾼의 모습만 보여질 뿐이다.

일곱째, 성경공부와 성경적 사고방식이 중요하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과 관점이 없어 보인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해야 하는가? 성경 이해와 설교의 지향점에 성령의 사역과 그 능력의 필요성도 외면된다.

성령께서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하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삶의 전 영역을 이끌어가는 역동성이 과연 설교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가?

성경을 이해하는 수준의 한계는 설교의 한계와 신앙의 한계, 그리고 실천적인 행위의 능력이 한계일 수밖에 없다.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고민은 이전보다 더해진다. 더욱 진흙탕으로 빠진것과 같은 자기 정체성에 혼란으로 막연한 신앙에 빠진다.

바르게 살기 운동을 전개한 목회자가 어떻게 자살할 수 있는가? 근래에 일어난 사건이다. 정의와 바르게 살기 운동을 전개하는 힘의 원칙이 성경으로부터, 바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업적으로 거룩을 말하고 바른 정의를 말하고 개혁을 말하고 청빈한 생활 운동을 전개할 경우 이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론적인 반성은 오늘날도 계속되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을 계속 유지시켜야 하는 이유이다.

소재열 목사(리폼드뉴스 발행인)

 

www.reformednews.co.kr/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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