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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적실한 예수 증언(계 20:4-5)_박병식 목사

성경

by 김경호 진실 2020. 12. 23. 09:15

본문

말씀에 적실한 예수 증언(계 20:4-5)

박병식 목사(송파제일교회, 원로)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들에 대해 본문은 말합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이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를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를 믿게 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말로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증언할 때에는 신약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약만으로 충분하고 완전하게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백성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황제 숭배를 사상적으로 주입시켰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법으로 제정하여 따르지 않으면 범죄자로 처벌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황제를 신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법적으로 신전에 가서 황제를 숭배 했습니다. 이를 믿고 황제 숭배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마와 손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마에 표가 있습니다. 황제의 표입니다. 황제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표입니다. 손은 자의적 복종을 의미합니다. 황제의 말을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표를 찍어 줍니다.
그런데 그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손에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왕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신상 앞에 경배하지 않아 이마에 표를 받지 않았고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 손에 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들에게 참혹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증언함 때문에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이 당시 로마는 수많은 성도들의 목을 도끼로 베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 시 밖으로 끌려 나가 도끼로 목 베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목 베임을 당한 것은 육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목 베임을 당할 때 성도의 영혼도 그 고통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목 베임 당한 것으로만 순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칼에 찔려 죽기도 하고, 불에 태워 죽기도 하였습니다. 맹수들에게 찢겨 죽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를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그들의 믿음은 가장 적실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를 증언하였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한적한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는 성도들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는 그들을 주위의 사람들이 악의로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해 온 성도들을 지성으로 돌보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를 증언하면서 사는 삶은 역시 적실하였습니다.
도시에 살지만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고 사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북 아프리카의 주교이자 순교자였던 키프리안(Cyprian)은 에드 큐리눔(Ad Quirinum)이란 저서를 남겼습니다. 제3권에는 새 신자들을 위한 120항의 거룩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협력해야 하며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전체 교훈 중에서 불신자들에게 전도해야 한다는 내용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당시에 공개적으로 전도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럴 경우 심각한 희생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러내놓고 전도하지 않았는데도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증가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의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증인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은 바로 복음의 적실성을 드러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3:16-18은 말합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666이라는 이름을 가진 짐승이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 짐승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의 통치자였습니다. 작은 자나 큰 자는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의미합니다. 재산의 소유 정도에 따라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개인적 신분에 따라 자유인이 되고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짐승으로 지칭되는 왕권 앞에 경배하고 그 이마에 표를 받아야 했습니다. 짐승이 명하는 대로 순종해서 그 손에 표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표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마와 손에 찍혀진 표에는 짐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황제의 이름이었겠지요. 이름 대신에 666이라는 숫자가 그 표에 새겨져 있기도 하였습니다. 황제의 이름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으나 666이라는 숫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왜 황제의 이름 대신에 666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표를 받게 했을까요? 당시 헬라어 알파벳에는 문자마다 그 문자에 고유한 숫자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666을 헬라어로 라고 읽었습니다. 란 로마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 일부 성도들은 이 주장에 따라 로마를 마지막 나라, 마지막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해석은 19세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세기에 스미스(J.B.Smith) 교수는 다른 주장을 하였습니다. 666은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히브리어에도 알파벳 문자마다 고유 숫자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666을 히브리어음으로 풀면 네론 가이살이 된다고 주장 했습니다. 네론 가이살은 가이사 네로를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많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후에 어떤 이는 로마 황제 티토를 가리킨다고 하고, 어떤 이는 베스피아누스를 가리킨다고 하고, 어떤 이는 트라얀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하멧, 나폴레옹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본문 해석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666이란 이름을 가진 이 마지막 적그리스도는 누군가요? 계 13:17-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표를 갖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필요한 것을 살 수가 없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상품을 살 수도 없고 팔수도 없습니다. 황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든지 혹은 666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표를 그 이마에나 손에 갖지 못하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666은 일정한 특정의 황제를 의미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수입니다. 666은 사람, 사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새긴 종이 쪽지가 666개 모아진 것과 같습니다. 666의 정체는 사람입니다. 매우 다양하여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붙은 열 왕관을 가진 열 뿔일 수 있습니다. 이는 여러 영역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정치, 문화, 경제, 교육, 사회, 윤리, 과학, 의학, 반도체 공학 등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사람이 하나님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666은 먹을 것도 주고 편히 살게도 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짐승은 사람이 제일이고 기업이 제일이라고 병원이 제일이라고 학교가 제일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666이라는 힘을 갖고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창출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물질을 우상으로 삼게 합니다. 이 세상을 부하게 편하게 살아가게 하는 666표는 물질주의요 인본주의 입니다. 물질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사상입니다. 666이라는 표는 곧 원리요 사람이요 돈입니다. 이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이마 즉 뇌리에 666이라는 표가 사상으로 박혀있습니다. 짐승의 수를 그 이름까지 아는 데는 미흡하지만 그 원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원리는 배금사상입니다. 배금주의가 짐승의 이데올로기 입니다. 돈이 되면 사람이든 우상이든 그 앞에 가서 절하는 배금사상, 물질주의, 경제주의입니다. 돈만 있으면 가만히 앉아서 편안히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과 헌신을 멀리하고 심지어 신앙까지도 자신의 편리주의를 채움 받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666입니다. 철저한 인본주의, 사람제일주의입니다. 그게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시대가 오면 빈곤을 각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시대는 성도들에게 큰 환난을 줍니다.
이 이데올로기 사상이 재림 때까지 사람들의 이마와 손에 표로 찍혀 있을 것입니다. 짐승의 특징은 먹는 것만을 추구하고 먹는 것이 해결되면 향락을 추구합니다. 마지막 666이라는 적그리스도는 짐승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말씀을 모르고 내세나 영생을 모릅니다. 철저하게 인간 중심이요, 세상 중심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물질에 있다고 생각하고 666표의 사상을 그 뇌리에 박아놓고 살아가면 누구도 진리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바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적그리스도인줄 알면서도 결국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를 증언하는 삶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신학의 영역도 동일합니다. 고등 비평은 예수님을 제자들이 거짓으로 만들어낸 신화적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복음 비평과 사도 비평은 성경을 오류가 가득한 신화와 전설집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이상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는 위기에서 칼 발트는 새로운 신학 신정통으로 기독교를 구해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여전히 오류에 차 있으며 부활은 역사적으로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성경을 믿지 않고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신정통 신학은 전 세계의 대다수의 신학교의 신학이 되었습니다. 분명하게 성경은 오류 없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하고, 이 말씀으로 예수를 증언함이 적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제32회 정암신학강좌 개회 설교] 말씀에 적실한 예수 증언(계 20:4-5)_박병식 목사 | 기독교개혁신보 (repres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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