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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중심적 설교’의 한 모델로서 정근두 목사 설교 연구(5)

설교학

by 김경호 진실 2021. 3. 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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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러 번역본들을 참고하여 의미를 밝힌다.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 우선 본문을 바로 이해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성경 번역을 모두 참조합니다. 개역성경부터 출발해서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할 것 없이 모두 살펴봅니다. 한글 번역뿐 아니라 여러 영어 성경들도 대조해 봅니다. 성경 번역은 보통 번역위원들이 모여서 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번역을 하기 때문에 크게 실수하지 않을 장점이 있는 동시에 또 개인적인 탁월성이 무시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개인이 번역해 놓은 성경들은 이런 면에서 개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일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만 아니라 때로는 제가 읽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외국어 번역 성경들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 내고 읽기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대부분은 본문의 바른 내용이 무엇인지 감을 잡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외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본뜻이 무엇인지 어리둥절해집니다. 가장 행복할 때는 개역성경만 읽었을 때입니다. 하나만 알 때에 가장 자신 있게 무엇인가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 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 성경 종류만큼이나 각기 다른 번역 앞에 본래 무슨 의미에 대한 궁금증만 늘어납니다.”

 

오늘 18절을 보면 거기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18절만큼 이론이 분분한 구절은 별로 없습니다. 말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2,000년 전에 구두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글의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혹 각 부분의 관계를 밝히기 위하여 점이나 부호를 사용합니다만 그 당시는 이런 구두법이 없었습니다. 어디에 쉼표나 따옴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른 번역 성경 (Good News Bible[GNB]) 또는 New English(NEB)을 따라 설명해 보겠습니다. 18절 전반부를 이렇게 재구성해 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강조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행함을 강조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후반부를 새로운 따옴표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즉 전반부는 어떤 이의 반론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야고보의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증명해) 보이리라.” 그리고 19절에서도 18절 초두에서 제기한 반론을, 그 허구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초월하심을 믿는 것은 귀신들도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풀어놓은 공동번역으로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 주도록 하십시오.”( 3:13, 공동번역)”

 

7) 당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예들을 찾아보자.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를 때는 좀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1장 마지막 부분에서 고아와 과부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고아와 과부만 그렇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경제적인 처지에 따라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선생이 우리와 다른 점은 , 그거 뭐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긴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다루는 데 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한곳에 머물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일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일터였습니다. 사도가 어느 교회에 담임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사도는 온 교회를 둘러보는 일들은 감당했습니다. 반면에 교사는 한 지역 교회에서 머물며 그곳에서 새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난 이들에게 자기가 배운 신앙과 지식을 심어 주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사라는 직책이 당시에는 존경받는 직책이던 만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사는 당시에는 인기 직종이었습니다. 유대인 부모들은 누구나 아들 낳으면 내 아들도 랍비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을 만큼 랍비, 선생이라는 직분은 존경받는 직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상을 물씬 풍깁니다. 13절을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유대인이라고 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정받는 분야가 몇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뛰어난 장사술입니다. 지금도 세계 경제가 그들의 수중에 있습니다만 그때도 뛰어난 사업 수완이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른바 로마의 평화를 구가하는 시대였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로마가 온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였고 여기저기에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던 시기였기에 유대인들은 상술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누렸습니다."

 

"새 도시가 건설되면 로마제국은 그 도시에 와서 살 사람들을 영입했는데,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시민권을 제공해 가면서 환영했습니다. 유대인이 몰려오면 상업이 활발해지고 온갖 재화가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번영은 유대인의 이주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마 이런 부류의 상인들로 보입니다. 지도를 펴놓고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도시에 가서 한탕 해야겠어,  1년 머물면 괜찮은 저택 한 채쯤 떨어질 거야!”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이 당시에는 사람들이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품꾼으로 농사지으러 가서 일하고 하루라도 품삯을 받아오지 못한다면 부자는 상관없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은 매우 어려워집니다. 아버지가 돌아오면서 곡식을 받아올 것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프면 잠이 안옵니다. 그런 식구들이 고픈 배를 움켜쥐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듣고 있습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는 당시 상황을 좀 살필 때 밝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 초기 기독교 사회의 편만한 사회악 중 하나가 되는대로 쉽게 맹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익히 알려진 유대 사회적 폐습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죄악입니다. 이런 폐습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당 부문을 차지한 유대 기독교인들을 통해 교회 안에서도 번져 있던 죄악으로 보입니다. 걸핏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갖다 대고, 하나님의 이름 갖다 대므로 자기 입장을 옹호하는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매우 쉽게 신자들의 입에서 서원이 튀어 나오는가 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 입장을 옹호하는 일들이 예사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서원과 맹세가 너무 범람하던 현실을 직시한 야고보 선생은 주님과 같은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매우 쉽게 행해지는 서원이나 맹세를 막기 위해서 일상 대화 가운데 도무지 맹세하지 말도록 명합니다.”

 

8) 루터가 평가했던 것처럼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라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본질과 핵심을 말씀하는 서신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신앙의 첫 걸음을 내딛는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신앙의 발걸음을 내딛는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만사형통의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도 좋아지고 가정도 평안해지고 사업도 보장되는 만능처방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여러분이나 저처럼 보통사람들은 교회당에 발 디디기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힘 있고 잘난 사람들이 모두 다 차지하고 우리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서 우리 같은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교회 한 번 나오고, 기천 원 헌금하는 것으로, 이처럼 종합보장이 된다면 정말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모두 차지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신앙은 인간사 제반 문제에 대한 완벽한 보험증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선배 야고보는 온 세상에 흩어진 믿음의 형제들에게 하는 첫 번째 권면으로 신앙인의 삶에도 여러 가지 시련이 있다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왜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왜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고 준수합니까? 왜 특별기도회를 합니까? 왜 이웃 초청잔치를 합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가 정한 시간에 모여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나아가서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자기는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는 애처롭게도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탄식을 들어보십시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나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29:13).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찬양, 우리의 기도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행동은 일상적인 삶에서 계속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말할 때도 같은 경건을 유지해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사로서 부하 직원에게,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가진 자로서 갖지 못한 자에게 말할 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항상 그 경건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신앙을 설명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환란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떠나서 참된 경건을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고아와 과부와 아무 관련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참한 현실에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는 신앙생활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독교가 그들만의 잔치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 5:13-14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단절한다면 아무리 좋은 신앙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가 끝난 후에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경배하는지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 가는지에 따라서 판정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괄시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험한 풍랑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삶에는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출세할 수 있고, 돈 벌 수 있고 이런저런 일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잘 살아보겠다고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이 가장 답답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 “잘 산다라며 세속적인 가치를 말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악인들을 향해서 한 가지 선언을 합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합니다( 57:21 참조).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도 있고,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고, 잘 나갈 수도 있지만 삶의 평강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는 안식의 포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계속)

 

 

김창훈(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실천신학)

 

 

[논문] ‘하나님 중심적 설교’의 한 모델로서 정근두 목사 설교 연구(5):리폼드뉴스 (reformed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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