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개신교 영성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은성 교수

관상기도

by 김경호 진실 2021. 4. 23. 09:45

본문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영성/라은성 교수/국제신대

1. 들어가는 말

근간, 즉 1960년에 와서 ‘영성’과 관련된 주제가 많은 관심을 갖게 했고, 한국교회에서는 1990년에 들어와 기독교인들에게 관심을 부추기고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독교 서점가에서 ‘영성’에 관련된 서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또 한국교회의 견해들을 수렴하고 주도하는 잡지들도 ‘영성’이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지 않은 경우가 없으며 더욱이 각종 집회들과 훈련들까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 이렇게 영성이 유행하는 시대라고 할 때에 우리가 고찰해야할 여러 사항들이 있을 것이다. 유행한다는 것은 동시에 ‘영성’ 개념에 관한 혼란의 시대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여러 신학자들은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에 대한 제작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성의 본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든지 신학적 점검이 필요하다고 우려의 목소리도 들리기도 한다. 교파들 간에 추구하는 목적들에 따라 다양한 영성운동은 영성이라는 미명아래 정확한 개념 정리도 되지 않은 채로 한국교회의 삶 속에 뿌리내리려고 한다. 아니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영성운동으로 인해 개신교적 정체성마저 흐려지고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복잡한 사회적 정황과 정신적 정황 속에서 빚어진 한국교회 영성운동은 초창기에는 기도운동과 말씀운동에 입각한 성령운동으로 시작되다가 점점 더 은사운동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수도원적 영성의 영향을 받아 관상적 영성운동으로 기울이고 있는 과정에 있다.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의 현주소는 ‘제 3의 물결’을 지나 수도원적 관상신학이라는 ‘제 4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초대 교회 시기에 있었던 영지주의적이라는 사상이 가미된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2. 한국적 영성운동 형태들
대체로 한국교회에 빚어지고 있는 영성운동의 형태를 네 분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로서 기도원이나 잠시 동안의 은둔을 통해 은사운동을 맛보려고 하는 형태가 있다. 이것은 한국의 기도운동을 추구하는 은사운동이나 기도원 주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로, 기도로만 그치지 않고 보다 폭넓은 형태로서 일상생활에서 신앙에 활력을 주기 위해 단순한 종교적 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거나 아니면 교회에 충실하게 나가서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말씀 공부에 전념하는 성실한 성도들이다. 셋째로, 기도와 일상생활의 신앙에 활력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전인적(holistic)이고 육체적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로서 육체적 모든 삶을 기독교적 삶으로 살기를 원하는 형태이다. 이들은 교역자들과 같거나 아니면 선교사들처럼 전 삶을 기독교적으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넷째로 기도로서 개인의 신앙생활을 제한시키지 않고 사회적이고 세상을 향한 헌신된 삶을 위해 영성을 추구하는 형태가 있다고 한다. 이 형태에 속하는 사람들은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들처럼 사회적 구원을 위해 직접 사회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영성의 형태를 말한다.

3. 영성운동의 영향들
3.1. 한국의 재래 종교
한국교회의 신앙심에는 한국의 재래종교들의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 중 가장 영향력 있고 어떤 외부종교와도 결합하여 변모하는 것은 샤머니즘을 들 수 있다.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토속신앙으로 한국인들의 심성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도 영향을 주었다. 샤머니즘은 특별히 이기주의적인 개교회 중심 신앙과 현세적인 기복적 신앙을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 두 번째로 영향을 끼친 불교의 타계주의는 한국교회의 신앙을 극단적인 종말론적으로 이끌었고 실용주의적 이기주의를 심었다. 세 번째로 영향을 끼친 유교는 한국교회를 율법주의와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적 형태를 갖게 하는데 큰 몫을 감당했다. 끝으로, 신선술과 도교와 같은 종교는 한국교회의 기도와 명상에 큰 영향도 끼쳤지만 범신론적 신비주의를 띠게 하므로 신비적 무아경 속에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이단 사이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3.2. 상황적 변화
한국교회의 영성운동, 즉 성령운동은 세계의 변화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제 1~3의 물결이 일어난 것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옛 오순절주의(Old Pentecostalism)라는 ‘제 1의 물결’이 일어났을 때 한국에서는 평양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신 오순절주의(New Pentecostalism) 또는 은사운동(Charismatic Renewal)이라는 ‘제 2의 물결’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한국교회에는 순복음교회를 비롯한 갖가지 형태의 기도, 은사, 또는 신유 등의 광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80년대에 이르러 앞의 두 가지 물결을 모두 합하고 더 나아가 찬양과 경배라는 형태가 가미되면서 일어나 ‘제 3의 물결’이 한국교회를 강타했다. 마치 부흥사들의 주도권이 이제는 찬양과 경배의 지도자들에게 이양된 듯 느낌을 준다.
사회적으로 볼 때 급속도로 발전하는 물질문명과 기술적 발전에 대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미치지 못하게 되면서 보다 자신의 개인적 영적 정체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또 포스트모더니즘 흐름 속에서 절대적 가치를 상실하고 상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사람들 가운데 아노미 현상이 일어나면서 영성운동은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제 4의 물결’이라 부를 수 있는 심리학적으로 영성운동이 일어났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시대는 자기중심적인 비인격적 개인주의(Depersonalizational Individualism)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다원화되므로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판단하기보다는 상대적 가치를 더 우선하게 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이 시대에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에 좇아가지 못하는 아노미(anomie)현상을 맞이하여 기독교인의 정체성마저 상실한 것처럼 보이고 소외감을 느꼈다. 기독교 전통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느끼고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와 같은 개인주의로 흐르는 새로운 영성의 흐름은 어울리지 않는(mix and match)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사회적 추세에 따라 교회는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작은 교회; 성직자로부터 평신도 중심; 그리고 여성들의 역할 등이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도 동시에 일어나면서 개인의 영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성주의와 과학적인 방법은 인생의 중요한 진리들을 무시하였다. 영적인 질문들과 답변들에 관해 개인들은 관심을 가졌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연합하거나 스스로 계몽될 수 있는 혼합적인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시대, 즉 뉴 에이지 운동이 시작된 셈이다. 뉴 에이지 운동에서 말하는 인류의 근본적인 이슈는 완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우리가 잊어버렸던 참된 자연을 알지 못한 채로 고통을 받았다. 우주적 정신인 하나님과 우리는 그동안 무조건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기동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인식, 즉 새롭게 변화된 생각을 추구하게 이르렀다. 계몽되었을 때 자신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서 세계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자를 경험하기 위해서 명상(contemplation)이 요청되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삶을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명상의 목적은 우리의 능력의 완전함을 사랑하는 것이다.  
20세기 현대인들은 서구문화, 즉 포스터모더니즘 시대에서 볼 수 없고 찾을 수 없었던 본질적인 것, 개인을 신격화 시키는 것, 즉 견신론(theosophy)을 지향하는 동양철학, 또는 동양종교들에서 찾으려고 시도했다. 더욱이 기독교인의 삶을 성장시키기 위해 근간에 와서는 초대교회 말기부터 수도원 운동에서 자행되었던 관상적 기도와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동양철학, 특별히 힌두교, 불교, 그리고 도교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톨릭 신학자들은 동양의 영성훈련과 서양의 영성 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관상적 행위는 대체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관상적 태도는 자각, 계몽, 집중 또는 관상이라고 불리는 행위들이다. 이러한 태도가 현대인들에게 적중한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보다 높은 하늘에 있는 분을 관상하는 것으로 실제적 삶의 의미를 또 다른 세상까지 연장하므로 가끔 만족하려는 전통적인 종교적 삶에 도전한다.

4. 영성운동의 형태들
첫째, 관상적인 영성운동은 수도원적이고 사막 교부들과 같이 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갖고 있으며, 현실도피성과 신비주의적이고 은둔적인 형태를 취하는 형태가 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참 존재나 우아경(ecstatic) 말을 위한 내적 추구나 숙고하는 명상을 개인이 경험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의 신자가 신비적 연합이고 하나님의 현존을 내적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늘 명상하는 것이다. 가시적이고 명백한 세계 이면에 있는 불가시적 하나님을 보고자 추구한다. 그래서 믿음의 경험적인 면들과 감성적인 면들에 의존하는 경향을 갖는다.
둘째, 20세기에 와서 급속하게 성장하는 제 1~3의 물결 속에 드러난 은사주의, 즉 카리스마적 운동은 성도들의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요구를 충족시키는 듯 하다. 자유롭고 생동력 있는 예배를 지향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찬양이나 찬양대의 찬양보다는 육체적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을 자유스럽게 찬양 드린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임재하시는 성령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직접 체험하기를 바란다. 세상 삶의 걱정과 염려로부터 도피하므로 현실도피적 영성을 추구한다. 신비적이면서 행동적인 형태를 띠는 이 영성형태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영적이라 할 때에는 성령의 사역들에 늘 깨어있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은사들, 즉 방언, 영분별 하는 은사 등을 강조한다.
셋째, 이성주의적 영성이라고도 볼 수 있고 은둔적이면서 이성적인 형태로 볼 수 있는 영성운동의 강조점은 성경적 지식과 신학적 형식에 있다. 감정적이고 사회적 관심보다는 신학적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성경적 지식과 성경적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려고만 한다. 교리적일 수도 있고 냉정할 수도 있는 영성운동의 형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중요시한다. 대체적으로 개인적 구원에 주력하는 한국교회의 보수적 계열에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행동주의적 영성이면서 이성적이고 행동적인 형태는 부정이 자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사회를 자유 시키려는 행동적인 투쟁을 선호하고 직접적인 참여를 원한다. 현실도피성과는 달리 현 상황을 좌시하지 않고 사회를 분석하고 사회ㆍ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행동한다. 이러한 영성을 추구하는 대표자들은 흑인신학과 해방신학에서 행해지고 있다.

5. 개혁적 경건과 묵상
5.1. 용어
영성신학이 카톨릭에게서 발전되었던 것처럼 ‘영성’이라는 단어는 특히 프로테스탄트, 특히 개혁파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또 ‘영성’이란 단어가 경건이란 말과 전혀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영성’의 의미를 확립하게 위해 추론적으로 만든 것이다. 단지 바울은 “영적”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프랑스 카톨릭 사상가들에 의해서 고안되었을 뿐이다. ‘영적인 삶’이라는 말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미 ‘경건’의 분야로서 성경을 헌신적으로 읽거나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후기 칼빈주의자들은 경건이 “개인의 행위가 기독교인의 삶으로 살아가는데 준수해야할 것”으로 여겼다. 칼빈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 즉 영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성’의 본질적 표현을 ‘경건’이라는 의미로 모두 표현되어 있다. 1960년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번역하여 출판했던 배틀즈(Ford Lewis Battles)는 기독교인의 신앙과 기독교인의 삶의 전반적인 이해와 실천에 대한 상징을 칼빈이 말하는 ‘경건’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를 경건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참된 지식, 진심어린 예배, 구원받는 믿음, 효성스러운 두려움, 기도하는 순종, 그리고 경외하는 사랑을 포함한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무엇임을 아는 것은 그를 향한 올바른 태도를 포함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5.2. 묵상
이 일을 위해 칼빈의 사상을 실천화 시켰던 청교도들의 묵상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제안한다. 경건을 위해 필수적으로 그들은 묵상을 주장했다. 그들은 두 가지 묵상, 즉 경우적(occasional)이고 신중한(deliberate) 묵상으로 분류했다. 경우적 묵상이란 갑작스럽고 즉흥적인 경우에 일어나지만 신중한 묵상은 진중하면서도 의도적인 것이다. 경우적 묵상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실천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이에 반하여 신중한 묵상은 시간을 정하거나 제한된 장소에서 하늘에 속한 것들을 진지하게 묵상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묵상을 위해, 1) 신적 묵상은 자주해야만 한다; 2) 묵상을 위한 시간을 정한다; 3) 유익을 발견할 때까지 정규적으로 한다. 효과적인 묵상을 위해 1) 세속의 일들을 일단 접어둔다; 2) 회개하며 영적인 풍성을 되새긴다; 3)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들을 깊이 묵상한다; 4)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장소를 찾으라; 5) 자세를 가다듬는다; 6) 성령의 이끄심을 신뢰한다; 7) 성경 본문을 선택하고 교리적으로 비추어 본다; 8) 그 말씀을 자신의 상황에 적용시킨다; 9) 기도하고 찬양한다.

6. 나가는 말
‘제 4의 물결’이라 할 수 있는 관상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성경적 표현들의 개념들은 실제적으로 동양 철학 묵상의 테크닉, 즉 집중적 기도를 통해 전체에 대한 희미한 개념들을 대신하여 사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관상적 기도를 일삼는 자들은 이것이 영적 여행을 하도록 인도하며 융의 심리학에 의해 묘사된 무의식과 같은 것에 의식을 결합시킨 것과 동일할 뿐이다. 금세기 가장 유명한 로마 카톨릭 영성신학자이며 미국 트라피스트(Trappist)인 토머스 머턴(Thomas Merton, 1915-1968)은 융의 신비적 관점에서 성경적 교리들을 해석하고 영적 치유에 관한 자신의 작품들에서 융의 심리적 치유를 대중화시킨 자였다. 그는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을 아시아로 다니면서 배웠다. 마침내 수도원적 관상과 동양 명상 간에 매우 유사점들을 발견했고 그것들이 동일한 신비적 근원에 두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교리보다도 경험과 내적 변화에 강조하면서 동ㆍ서양 간의 접촉점을 찾는 에큐메니칼 모임을 개최하곤 했다. 관상이 아닌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지 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융은 신 영지주의와 뉴 에이지 운동의 아버지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단적 현상을 가진 관상적 영성은 매우 위험하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것에 관해 양들에게 경고해야만 할 것이다. 참된 성경적 영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경적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관상적 기도가 전혀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된다.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