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이단은 바울의 사도권이 다른 12사도들의 사도권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권위나 특정 집단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1. 예수 안에서의 자유(1-5)
14년 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1). 바울은 그가 사는 동안 총 5회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다메섹을 떠난 후, 예루살렘의 기근 때, 1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 2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입니다. 본문에 14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1차 전도 여행 후로 보입니다(행 15장, W. Hendriksen).
바울은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한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했습니다. 당시 유력한 사도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바울이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2). 바울이 사도들에게 사적으로 자신의 사도됨과 이방에서 복음 전파한 것을 설명했습니다. 마치 경기장에서 선수가 앞만 보고 결승지점을 위해 달려간 것과 같이 다른 것을 바라지 않고 복음 전파에만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동역한 헬라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습니다(3). 그 이유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4).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단은 교회를 되돌려서 다시 종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 이단입니다. 율법주의 이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율법의 공로가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교회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습니다(5).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믿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엡 1:13).
2. 베드로와 바울(6-8)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바울에게 의무를 더하여 준 자가 없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유력하든지 아니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나 신분에 의해서 바울의 사도직이나 복음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6). 상관이 없다는 말은 차등이 있지 않고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바울에게 동등하게 주신 사도권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바울이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과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7).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자신들과 바울이 동등한 사도권을 받았음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사명은 모두 동일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받은 것입니다.
다같이 8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 즉 유대인의 사도로 삼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바울에게도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방인의 사도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나 바울이나 사도직은 한 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도권은 동등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3:15에서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라고 합니다. 바울을 가리켜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들보다 못하다거나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도 자신들과 동등한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동등한 사도권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3. 친교의 악수(9-10)
또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았기에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9). 친교의 악수(덱키아스 코이노니아스)는 문자적으로 ‘교제의 오른손’이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하나됨, 교제를 의미하는 악수입니다.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이였다는 말입니다. 동역자라는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았고,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유대인에게 즉 할례자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9). 서로 동등한 사도권을 받았으나 그 보냄을 받은 대상이 달랐던 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았고,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유대인에게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입니다.
다만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온 것이었습니다(10). 가난한 자들을 기억한다는 말은 구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제 사역은 당시 교회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필요했고, 언제나 교회가 행해야 하는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부가 하지 못하는 구제 사역을 교회가 나서서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힘이 되는대로 구제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주신 사도권은 유대인의 사도로 부르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것과 동등한 것입니다. 다만 그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그들을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과 구제의 책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대속의 사건을 통해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믿음의 자유 안에서 이웃을 돌보고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김순정 목사(말씀사역원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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