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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예배에 대한 논문

신비주의

by 김경호 진실 2021. 11. 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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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예배에 대한 논문

 

Ⅰ. 서 론

 

1. 연구의 필요성

 

20세기의 마지막에 이르면서 예배에 대한 개념과 본질이 모호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가 상실되어가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교회에서는 젊은 세대들을 교회에 머물게 하고 그들의 구미에 맞게 예배를 드리고자, 미국의 월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나 새들백 교회가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열린 예배를 수용하고 있는 것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검토나 연구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위험성을 초래하고 있다. 또한 교회 성장의 한 방편으로 열린 예배의 형식을 기존 성도들의 예배에 여과 없이 받아들이므로 예배의 본질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 와서 무조건적으로 비판만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둘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정의와 개념을 통해서 예배의 본질을 파악하여 열린 예배의 수용에 대한 한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예배의 변천 과정을 통하여 그 시대마다 문화의 옷을 달리했던 예배의 형태를 살펴봄으로 이 세대에 맞는 예배의 형태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 연구의 범위

 

먼저 열린 예배에 대하여 연구를 한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있다. 특별히 아직도 한국교회 내에 이 열린 예배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그리고 바른 인식이 부족한 상태이다. 물론 약간의 책들과 기고된 글을 통하여 우리는 열린 예배에 대하여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열린 예배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말해 준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본 연구는 현재 나와 있는 자료를 통하여 작성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전통적인 예배관과 개혁주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열린 예배에 대한 자료를 서로 비교 분석하는 차원에서 연구하고 비판함으로 고찰하도록 할 것이다.

 

3. 연구의 전개

 

Ⅰ장에서는 본 연구의 동기와 목적을 밝히고, 그리고 연구의 범위를 설정하고 연구의 전개방향에 대해서 언급한다.

Ⅱ장에서는 예배에 대한 의미와 역사적 고찰을 시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우리들에게까지 정착되어져 내려왔는지를 우리가 살펴봄으로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Ⅲ장에서는 개혁주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을 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신학적으로 예배가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므로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 특히 열린예배에 대한 연구 및 비판의 기준을 설정해 볼 것이다.

Ⅳ장에서는 열린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봄으로, 열린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다음 장에서 다룰 연구 및 비판의 자료로 삼을 것이다.

Ⅴ장에서는 앞서 파악한 예배의 역사적,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열린예배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연구 비판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열린예배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갖고 대처하므로, 참된 예배의 중요성을 재인식할 뿐만 아니라 참된 예배의 모습을 파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Ⅵ장에서는 한국교회가 열린예배에 대한 수용성의 한계에 대해 결론지으면서, 앞으로 한국교회의 예배 개혁에 대해 간략히 서술함으로 본 연구를 마치고자 한다.

 

 

 

 

 

 

 

 

 

 

 

 

 

Ⅱ. 전통적 예배에 대한 역사적 고찰

 

1. 구약시대의 예배

 

구약성경은 예배에 대한 성경적 자료들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우리가 예배라고 할 때 이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하는데 구약성경을 보면 상당히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만남의 장면은 족장들과의 만남, 시내산 사건, 성전, 회당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만나는 것, 즉 예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 백성의 예배는 이교(異敎)의 예배와 커다란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자기를 섬기도록 그들을 선택하신 사실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놓인 이스라엘의 생활과 역사는 곧 예배의 행동을 이루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고 있었으므로 예배의 발전과정은 바로 이스라엘의 생활과 역사의 진전을 의미한다. 또한 구약의 예배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배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낸 인간의 행위는 이차적인 것이었다. 즉 구약시대의 예배행위는 하나님의 방법을 신앙으로 받아 순종하는 것이었다.

 

1) 족장들의 예배

 

족장시대의 예배는 주로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그 가정에 대해서 언약을 세운 개인제단과 가정제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적으로 만나시고 그들로 통하여 예배를 받으셨다. 그리고 그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중심이었다. 아브라함이 최초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것은 세겜 상수리나무 밑에서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예배를 드렸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법을 배웠다. 그는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렸다. 또한 야곱은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 위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는 꿈을 꾸었고 그는 그곳을 벧엘이라 칭하며 후에 그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2) 시내산 사건

 

시내산 사건은 족장시대의 예배의 진전을 가져온 것이다. 족장시대의 예배가 개인 또는 한 가정을 중심으로 한 예배라고 한다면 시내산 사건을 통해서는 이제 한 민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드린 예배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시내산 사건 역시도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만남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만남은 말씀의 선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동의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계약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승인하였으며, 그럼으로써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는 주관적인 헌신을 작정하셨다.

또한 이 시내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다. 이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며 그의 백성들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3) 성전에서의 예배

 

성전에서의 예배는 성막의 예배의 진전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성전 역시도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시적이고 유형적인 표지가 되었다. 또한 이 성전은 상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전 자체의 양식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더불어 가지고 있는 관계에 의한 상징적인 의사전달이라는 것이다. 성전의 구조라든지 사용하는 물건들의 배치 등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4) 회당에서의 예배

 

회당은 아마도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와 포로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유대민족의 분산의 결과로 생겨났을 것이다. 회당의 중심적인 동기와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공동체 안에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있었다. 회당의 예배는 성전 예배와는 달랐다. 성전에서의 예배가 희생제물 중심의 예배였다면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회당예배는 신앙의 확인, 기도, 성경 등으로 이루어 졌다.

 

2. 신약시대(예수님 당시)의 예배

 

예수님 당시의 예배에 대해서 자세한 자료들 보다는 예배에 관하여 기술하는 말들 속에 있는 암시 등에 의하여 제공된 간단한 묘사들이 신약성경 전체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예배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서 예수님의 주변 사건들과 관련하여 생겨났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계셨는지를 통하여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예배를 지지하셨다. 물론 예수님께서 구약의 희생 제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성전에 대한 경외심과 예배장소로의 고유한 사용에 대한 그의 경외심을 우리는 성전 청결사건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예배제도들이 자신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희생 제사를 중단시킴으로써 그는 자신을 제사의 완성으로 보여 주셨던 것이다. 즉 후기의 기독교가 이해한 바와 같이 그는 희생 제사를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드셨다.

셋째는 예수님은 유대예배의 관습들을 재해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셨을 때,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표현하는 예배를 점차적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예배 안에 생겨난 중요한 변화를 예비하신 것이다.

 

3. 초대교회의 예배

 

초대교회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에서 충분하고도 완전한 예배의 생활을 맛보았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과거를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구속의 은총을 고백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 예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종말론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의 재림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에 완성되는 모형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예배는 종말론적인 현상이라 불렸으나, 과거를 현재에 효과적으로 만들뿐 아니라 미래의 예시와 메시야적인 영광을 현재에서 효과적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구속의 역사로 보았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살펴보면 회당예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회당예배는 기도와 찬양이 수반되는 율법의 낭독과 해석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회당예배가 초대교회 예배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는 정규적으로 회당예배에 참석하셨다. 예수님께서 회당예배에 참석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장면을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2가지 발전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말씀을 강조하는 회당의 관례로부터 초대교회의 예배가 발전해 왔음을 볼 수 있고, 둘째는 최후의 만찬으로부터 생겨났음을 볼 수 있다.

 

1) 회당의 영향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회당으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행15:5) 기독교인들이 된 자들도 처음에는 회당에 머물러 있었으며 점차 그들 자신의 예배공동체를 형성해 갔음을 볼 수 있다. 60년대 중엽에 바울이 죽었을 때만 해도 기독교는 여전히 유대교의 한 분파에 불과 했으나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1세기경에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반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분리되기 전에 존재하던 관계가 기독교 예배에 현저한 영향을 줄 정도로 충분히 지속되었다는 증거가 상당하게 남아있다.

첫째로 기독교 예배는 회당예배와 마찬가지로 성경중심이다. 성경을 읽고 강론하는 것은 유대교의 관습으로 오경과 예언서의 단락들이 정기적으로 낭독되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기독교의 관습 역시 회당예배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누가는 바울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그가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강론했다는 기록을 우리는 볼 수 있다.(행17:2-3)

둘째는 교회는 회당처럼 기도를 강조했다. 초대교회의 기도의 시간 역시도 유대교의 기도의 시간과 동일한 부분이 많았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회당에서 실행하던 매일의 기도시간, 즉 제3시, 제6시, 제9시 등을 지켰다. 이러한 기도시간들은 3세기 초반의 터툴리안과 히폴리투스에 의해 증거 되는 바와 같이 초기 교회에서도 계속 준수되었다.

초대교회의 예배모습 가운데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기도하는 관례에 대해서 유대교의 회당예배가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2) 주의 만찬의 발전

 

주의 만찬의 기원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의 식사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는 별도로 주의 만찬 제정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떡을 떼며’라는 말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떡을 떼며’라는 말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떡을 떼는 일”은 “떡을 뗌” 속에서 알려지신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회상하는 한 수단 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떡을 떼는 일이 식사의 맥락 속에 있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식사와 떡을 뗌은 공히 부활이후의 주의 나타나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만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잡수시던 것과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시기 전날 밤에 그의 제자들과 나누웠던 최후의 만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떡을 떼는 것과 성만찬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내에서는 이 두 가지가 병행되어져서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고린도 교회에서 공동식사의 문제로 말미암아 공동식사와 성만찬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공동식사가 예배로부터 완전히 이탈하게 되었고 성만찬은 그때부터 예배의 한 예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그렇게 완전한 예배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먼저 유대교 회당의 전통에서 시작하여 차츰 차츰 독자적인 예배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아감을 보게 된다. 특히 성만찬의 모습은 초대교회의 교제의 한 방편이었던 떡을 뗌과 함께 존재해 있다가 역시 예배 안의 예식으로 자리 잡아감을 보게 되는 것이다.

 

 

4. 중세시대의 예배

 

중세시대에 나타나는 예배의식을 통하여 사실상 우리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313년 로마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회가 외형상 급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옴에 따라 예배의 내용도 외적인 성장을 가져 왔으나 그것은 대부분 형식과 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치우쳤기 때문이다. 예배현장에는 신비적인 요소와 미신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고 인위적인 정교한 형식은 수많은 기도문을 비롯하여 교독문과 교창을 양산하게 하였다. 특히 주의 만찬은 미사에 있어서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그릇 이해되는 결과를 가져와 구약의 제사제도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갖게 할 정도였다. 더욱이 마리아 숭배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자 및 유물 숭배사상이 나타나 너무나 비약되고 말았다. 또 기독교의 지리적 확산에 따라 생기게 된 지역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신학적 교리의 정립을 허용해야 했으며, 예배의 형태도 지역에 따라 각각 차이점을 갖게 되었다. 로마교회의 지배아래 있던 서방교회는 16세기경에 이르러 예배의식의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성만찬에서 화체설을 주장하여 미신과 뒤섞인 인상을 주었고 예배의 참석은 등한시되었으며 성경과 모든 예전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라틴어로 집례 되어 회중은 참석자라기보다는 성직자에 의하여 연출된 하나의 연극을 구경하는 방관자로 퇴보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특히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말씀의 증거는 고정된 책자에 의존하여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기록을 읽는데 그치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시대의 예배를 통해서, 예배가 그 의미를 상실할 정도로 그 당시의 사회적 규범내지는 표준, 문화적 특성에 맞추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어야 함을 교훈 받게 된다.

 

5. 종교개혁시대의 예배

 

중세시대의 예배는 의식에 너무 치중하였고, 언어 또는 그 밖의 상징들 자체에 집중하여, 의식 그자체가 되어 버렸으며 예배가 너무나 객관적이었다. 그리하여 형식적인 예배는 신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지 못했으며, 교회 안에서는 불안한 신앙의 갈등이 일어났고, 여기저기서 개혁의 욕구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중세 교회의 예배 형태는 새로운 형태를 맞이하게 되어, 예배형태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혁이 일어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의식과 형식의 중심 예배에서 말씀중심의 예배로 변환되었으며, 성찬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고, 만인 제사장주의에 의거하여 일반 평신도의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예배참여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시기에 예배의 개혁에 공헌한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예배의 개선에 현저한 공헌을 한 개혁자들은 루터, 쯔빙글리, 칼빈 및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1) 말씀 중심의 예배

 

종교개혁시대의 예배는 중세시대의 의식 중심의 예배에서 탈피하여, 말씀의 설교가 중심이 되는 예배로 전환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을 예배의 기본적 중심사로 간주하여, 예배는 마땅히 합리적이며,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예배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을 말한다’고 하였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예배는 반드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드려져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국어의 사용은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의 공통된 특징이 되었으며,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자국어 성경 번역은 말씀 중심의 예배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루터와 칼빈을 중심한 종교 개혁 지도자들은 예배의 주요 부분으로 말씀을 강론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또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마땅히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고 그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서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강해하고, 성경이 생활에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의 말씀 중심의 예배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게끔 하여, 신앙을 생활화 하는 습성이 몸에 베이도록 하였다.

 

2) 성찬의 본질의 회복

 

종교 개혁시대의 예배의 특징은 성찬 본질의 회복이다. 중세 교회는 의식 중심의 미사를 행하여 일반 예배자들의 참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에 의한 성만찬은 하나의 의식으로 진행될 뿐이었다. 이와 같은 변질된 성찬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하여 개혁자들은 노력하였다. 칼빈은 변질된 중세의 미사를 말씀과 성례의 소박한 균형이 이루어진 성찬예배로 대치시키려고 애썼고, 다른 개혁자들도 성경적인 성찬이론을 수립하여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개혁자들은 성경을 그들의 표준으로 사용하여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비성경적이라고 하여 거부하였고, 그 의식의 본질적 요소를 모호하게 하는 중세적인 첨가물을 배제하여 버리는 등 성찬의 참다운 의미를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3) 예배에서의 찬송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예배의식 속에서 찬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노력하였다. 루터는 찬송가의 사용을 크게 강조하고, 스스로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여 예배에 사용하였다. 또한 칼빈은 일반 회중의 시편 찬송이 교회 공중예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회중이 회중적인 노래를 부르는 훈련을 받지 못했으므로 어린이들을 뽑아 가르쳐서 회중가운데 뚜렷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노래 부르도록 하였다. 칼빈의 새로운 찬송방법과 시편 송(頌)은 회중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찬송을 배울 수 있게 하였으며, 예배의 참여의식을 높였고,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중세시대의 교회의 찬송이 소수의 성가대의 전유물 이었던데 비해서, 개혁자들은 예배에서의 찬송은 회중을 위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예배의 의식 문제

 

예배의 의식문제에 대해서는 개혁자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가장 보수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예배에 요구하였다. 루터는 예배의식을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열할 생각은 없었고 다만 개혁할 작정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교회의 예배의식 구조의 많은 부분을 그냥 보유하고 있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미사 형식에서 비성경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변경하기를 원치 않았다.

막스웰(Maxwell)은 루터의 예배의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식에 있어서 루터의 독일어 미사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결함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예배의 정신을 넓게 그리고 깊게 하였고, 또 사람들에게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주었다. 저들은 이제 최소한 무엇이 행하여졌는지를 알게 되었고 또 공동으로 하는 행동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성찬식은 그 정당한 위치로 환원되었다.’

쯔빙글리는 예배의 개혁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종교 연구방법은 보다 합리적이었고, 예배에서는 한층 더 단순성과 윤리적 실제성을 추구하였다. 쯔빙글리의 미사 개조는 보다 급진적이었다. 루터와는 달리 그는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말씀을 읽고 전파하는데 표현된 말의 상징을 제외하고는 예배에서의 모든 상징을 실제로 배격하였고 공중예배에서 모든 음악을 철폐하였다. 대신 시편과 성가의 교송적 낭송(交頌的 朗誦)이 대치되었다.

칼빈은 개혁 신앙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고, 그 결과로 다음 세대를 위한 예배 의식의 예식서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칼빈은 예배형태를 급진적이고도 과감하게 변혁시킨 공헌자이다. 하일러(Heiler)는 칼빈의 예배의식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칼빈은 예배의 한 형식을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 거기에는 로마교회의 미사의 어떠한 단편적인 중요성도 그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실로 칼빈은 새로운 그의 예배형태에서 로마교회의 미사제도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칼빈의 완전한 표준은 성경과 고대교회의 관습이었다. 그는 장식과 의식의 상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깎아 내리는 비성경적인 인간의 고안이라고 간주하였다. 따라서 그것들은 가장 단순한 형태로 환원되었다. 루터가 성경에 금하지 않은 것들은 받아 들일 수 있다고 말한데 반하여, 칼빈은 성경에 기리킨 바가 없는 것은 예배에 허용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칼빈의 원리는 중세 예배의식의 많은 예식주의를 배격하는데 있었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거룩함과 질서를 보존하였고, 조직화된 예배형태 및 쯔빙글리의 극단적인 예배형태에 결여되어 있는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Ⅲ. 개혁주의 예배의 신학적 고찰

 

예배에 대한 유일한 규범은 성경이다. 성경은 예배를 위한 객관적인 내용을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지침서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의 예배는 성경을 기초로 한 성경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성경이 교회의 예배 내용을 규정할 때 그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가 될 수 있다.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성격이 하나님 말씀 중심이다. 즉 개혁주의 예배는 끊임없이 개혁되어가는 예배이지만, 성경이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하면 멈추는, 성경 말씀 중심이기에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금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예배는 항상 지켜야할 성경 말씀의 일반 법칙에 따라 본성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배의 성격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또한 그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온전한 예배, 믿음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릴 수 있느냐가 좌우된다. 온전한 예배의 성격은 성경이 교훈하는 것을 올바르게 규명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서 결정지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장에서는 성경이 교훈하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의 성격을 앞에서 서술한 전통적 예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토대로 하여 서술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 중심의 예배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더불어 교제할 사람을 창조하심으로써 예배에서 솔선하셨다. 존재의 근거로서의 그는 생명의 원천이시고 보존자이시다. 하나님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사람과 만난다. 또한 그는 예배에 합당하신 분으로서 사람에게 임하시고, 그는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심판하시고 사람에게 요구하신다. 예배에서 사람이 응답할 때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과 사랑을 새롭게 드러내셔서 사람에게 그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1) 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나 어떤 사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고, 창조한 모든 인간을 주장하신다. 예배란 창조주에 대한 창조물의 애정 어린 응답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기독교의 예배는 다른 종교의 예배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으니, 그것은 기독교의 예배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주요 골자라는 점이다. 일반종교의 예배는 사람이 신에게 단순히 봉헌한다는 의미가 있는 반면, 기독교의 예배는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대해, 단순히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인간이 소리 높여 간구하고 찬송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은 지고 지존의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참 예배 대상이 되며 인간은 그 하나님께로부터 예배의 응답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2) 예배의 주체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쥐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예배로써 응답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친교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태를 몸소 제정하셨다. 속죄제, 화목제, 헌신제등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친히 주어진 방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생애 자체가 예배의 모범이 되게 하시고, 구속의 사역을 통하여 진정한 예배의 진수를 보여 주셨다.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이 가장 필요하므로 하나님께선 예배의 주체자로서 이 모든 역사를 집행하신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예배의 중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그분 자신이 예배의 주체가 되셔서 인간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셨다는 바로 이 사실이 하나님께서 예배의 주체가 되시고 예배의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쥐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2.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

 

교회예배의 기초는 바로 기독론적인 것이다. 사람이 구속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며 하나님은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모든 참 예배는 그리스도를 중심하지 않을 수 없다.

 

1) 예배의 중보자

 

그리스도는 공적예배의 중보자이시다. 아담 이래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친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과 화목하시었다. 그런즉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솔선하신 화목자이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6-7절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아버지를 볼 수 없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중보자 역할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과 부활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구약에서 아론의 제사장직을 통하지 아니하고 직접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예수께서는 영원하신 멜기세덱의 제사장이 되셨다.(히5:5-6, 6:20, 7:3,21-22)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애와 죽음과 영화에 의하여 감당하게 된 땅위의 예배 중보자의 직책 말고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늘나라의 제사를 드리는 영원한 예배자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적예배에 있어 죄인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구속과 중보에 의하여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고, 대화하며, 하나님께 은총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몸으로 산제사를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드려야 할 것이다.(롬12:1)

 

2) 예배의 임재자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는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그들 가운데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공적 예배의 자리에 항상 임재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래의 모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시고 임재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임재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예배는 은총이 역사하는 것이다. 이 은총은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구원의 임재가 된다. 그는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생명의 떡이며(요6:51-58), 그는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시고 힘을 주시므로 우리를 그 자신에게 가까이 이끄시고 묶어 주신다. 그가 그 임재를 증명하는 절정은 복음을 선포하는 때와 성만찬 때이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눅10:16)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언약의 피니라”(막14:22, 24) 바로 여기에는 기독교의 예배는 구원의 사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성전이다. 한때 이스라엘이 성막과 성전에서 발견했던 신성한 임재를 지금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예배자들 속에 성령으로 친히 오셔서 임재하신다.

 

3) 예배의 완성자

 

그리스도는 공적 예배의 완성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예배를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배 때에 가장 큰 요구 곧 속죄 받으려는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는 유일한 행위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단번에 드린 희생으로 구약적 희생예배를 완성하시었다.(히9:24-2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의 완성은 곧 예배의 완성을 의미한다.

 

3. 영적예배와 성령

 

신약시대 이후로 예배는 외식과 형식에 의한 예배가 아니라 영적인 예배가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배의 형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교훈하신 중요한 말씀이기도 하다(요4:24)

영적인 예배의 원동력은 성령이다. 사람의 마음속의 모든 소원과 영적인 모든 성취는 성령님의 활동이시다. 즉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현현으로서 임재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배란 성령의 임재를 확신하며,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예배의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의 성령의 참 역할을 알지 못하고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아울러 예배가 참된 영적 예배가 되기 위해선 진정한 의미의 예배의식이 필요하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구약시대의 예배와 비교하여 볼 때 의식이나 형식이 상당히 간소화되었으나, 형식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내적 정신을 수반하지 않고 의식과 형식에 치우친 예배의 형식화를 배격한다는 말이지, 성령을 예배의 바탕으로 삼고서 영적 진리를 수호하는 바로 그런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는 성경적 기초에 근거하여, 예배에서의 성령의 참 역할과 신령한 영적 진리를 가리키는 예배의식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성령의 역할

 

성령은 예배하고 활동하는 교회를 감동시키고 인도하는 것이 임무이다. 그러므로 그의 능력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예배는 생명을 잃게 된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 없이는 어떠한 사명도 감당할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기까지는 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명하기를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한 은사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예배를 드릴 때, 기독교인은 생활 속에 아름다운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게 되는데, 이 모든 열매는 성령의 생기 있는 임재를 통하여 나타난다. 초대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현현을 통하여 임재하심을 잘 깨달았다. 그들은 성령이 영적인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노래하고, 기도하고, 전파하고, 예언하고, 방언하고 말하였던 것이다(고전12:8-11) 이와 같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예배는 영적이요, 힘과 은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배의 형태는 다양할 것이나 그 예배의 실현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께 의존하여야 한다. 성령은 예배에서 회중이 찬양하고 기도하고 싶도록 역사하신다. 그는 회중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식을 창조하신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예배를 드릴 때만 예배가 순수해 진다는 것을 회중이 깨닫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실로 예배에서 창조적인 활동을 하시며, 예배의 원동력이 되신다.

 

2) 영적인 예배 의식

 

공적 예배에는 의식이 필요하다. 만군의 하나님께 경건한 태도로, 질서 있는 행동으로, 믿음을 가지고서, 예의 바르게 나아가기 위해서 예배의식은 더욱 절실하다. 진정한 영적예배가 되려면 의식을 행할 때 어떠한 주의가 필요한지 살펴보자

 예배의식이 예배자의 자발성을 억제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예배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예배의 의식이나 형식이 이를 가로막거나, 규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배의 의식을 통한 위선과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외식을 경계하고 있다.(사1:11) 외관적인 의식과 전통에 치우친 나머지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수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형식적인 하나님께 대한 공손, 마음에도 없는 헛된 제물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의식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의식이 하나님의 은혜라 함은, 의식은 인간의 이름이나 방법, 지혜로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세로 되어져야 한다.

예배의식의 목적은 예배자가 하나님의 뜻을 생활 속에서 깨닫고 복종하도록 고무하고 위로하는데 있다. 의식이 하나님 중심보다 인간중심이 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인간적인 행사로 전락하게 되고 그것을 행하는 인간은 형식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참다운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길 밖에 달리 왕도가 없다.

 

4. 자유스러운 예배

 

신약시대의 예배는 율법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구약시대의 예배에 비하여 훨씬 자유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지도를 받는 영적예배기 때문이다.(고후3:17, 갈5:1) 확실히 구약시대는 형식과 의식을 더욱 강조하였다. 신약시대에는 예배의 정신과 자유를 더욱 역설하였다. 또한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고정된 예배 순서를 지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예배 표현의 어떤 본질적인 형식은 항상 인정하고 있다.

자주 인용되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예배에 관한 대화, 즉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4:24)에서 예수님은 예배의 실재를 요약하셨다. 여기에서 진정(truth)은 내용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전달할 수 있는 어떤 형식 안에 구체화 되어야 한다. 신령(spirit)은 예배자의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 안에서 결합된다.

성경은 예배를 지혜롭게 인도하는 것이 공중 예배에 필수적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예수님도 전통이라는 낡은 부대에 복음이라는 새 술을 넣지 않으려 했다. 그분은 알맞은 상황에서 즉석 기도도 하셨다. 오순절 예배에서는 최소한의 질서와 최대한의 자유를 가지고 능력 있는 이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두 전통, 유대의 회당과 다락방에 기초되었다. 거기에 자유도 있었지만 질서도 공존했다. 이 둘은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예배에서, 필요한 형식들을 분명히 인정하셨고 또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공중예배를 드리는데 자유와 형식은 예배의 두 기둥이다. 형식과 자유는 참된 예배를 돕는데 서로 결합한다. 자발성이 없는 질서는 활기가 없고 생명이 없게 된다. 질서가 없는 자발성은 주관적이고 파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항시 창조적이고 적응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이상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의 자유는 일정한 형식을 내포한 자유라는 것을 알았다. 즉 진정한 자유는 형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형식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책임 있는 자유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도대체 신약시대에 신약의 예배가 자유스럽다고 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것을 간략히 서술하여 보기로 하자.

 

1) 의식적인 율법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신약의 예배가 자유스럽다는 것은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의식적 율법에서 자유스러워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속의 진리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동물의 희생을 수반하는 구약시대의 의식을 행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자유스럽다는 뜻이다.

 

2) 신약의 예배가 자유스럽다고 하는 것은 예배의 순서가 자유롭다는 뜻이다.

 

신약의 예배는 공적 예배순서에 대하여 교회로부터 규제를 받지 아니하는 자유가 있다. 이와 같이 예배의 순서를 자유의 원리로 취급하는 것은, 성경에 예배의 순서에 대하여 규정하거나 언급하지 않기에 자유스럽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라고 하여 모든 형식을 탈피한 무질서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개혁주의 교회의 경우에 자유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데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개혁주의 교회를 특징짓는 예배의 기본 본질과 성격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유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각 교파의 기본 교리와 원리에 입각하여 예배의 모범을 정하고, 거기에 알맞게 예배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3) 내용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공적 예배의 내용에 대하여 자유스럽다는 것이다. 예배의 내용이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어떠한 형편이나 처지를 당해도 규정된 형식의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되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어떤 원칙에 강제적으로 규제를 받지 아니하고, 어떤 상황에 따라 자유스러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5. 공동체적 예배

 

공적 예배는 기독교인들의 개인적 행위의 집약이 아니라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공동적 행위이다. 따라서 예배란 개인주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적 노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공동체적 예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교회의 예배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관점에서 비롯된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른 것은 통상 이 용어를 히브리어 ‘카알’에서 번역한 것이다. 야웨의 공동체는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백성의 집회이며, 시내산 기슭에서 거룩한 백성으로서 확인되었으며(신4:10),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이 신성한 만남이 준 전문적인 용어로 ‘집회의 날’(신9:10, 18:16)이라고 불리어졌다. 이 엄숙한 집회는 갖가지 위대한 순간과 이스라엘 역사의 중대 국면이 있을 때마다 회집되었다. 즉 아이왕과 그 거민을 쳐서 이긴 후(수8:30절 이하)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왕상 8장, 대하6:7), 모압과 암몬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 했을 때(대하20:5절 이하), 위대한 개혁을 일으켰을 때(대하29-30장, 왕하23장, 느6-7장), 등 그리고 거의 매번 이 집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가운데 그들 자신을 자각하고 그들의 참 성격을 나타냈으며 하나님의 선행적인 행위와 임재의 말씀의 선포와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희생제사에 의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의 만남의 표를 삼았다. 이 모든 것은 신약에 이르러 ‘교회’라는 말과 마주친다. 이 말은 또한 예배 의식적인 공동행위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브루너(Brunner)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집회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의 예배는 이 땅위에서의 교회의 참다운 표명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함을 받은 단체 즉 교회에 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모든 자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에 감사하며 공동체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개인적 신앙행위를 표시할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세례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성만찬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1) 회중의 일치로 인한 공동성

 

공적 예배는 사제나 목사에 의해 진행되는 것을 회중이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직접 참여하는 “공동체적 예배”이다.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설교를 들으며, 같은 기도를 드릴 때에 회중은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이렇게 공적 예배에 회중이 직접 참가하여 공동체적 유대감이 형성될 때, 예배는 삶과 분리되지 않고 또한 복음의 증거와 봉사의 행위와도 분리되지 아니한다.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찬송과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에배의 공동체적인 원리 중에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2) 교회의 전체적 일치의 공동성

 

우리가 주기도를 드리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는 이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천상 교회와도 일치를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가 승천하심과 동시에 이 땅에서의 예배가 하늘나라의 예배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예배를 보시는 것이다. 이 땅위에서 행하여지는 예배와 영광 중에 행해진 하늘의 예배, 이것은 기독론적으로 결부된 예배이다. 그러므로 비록 지상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곤란, 그리고 교파적 분열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가 예비하고 계신 천상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전체적인 일치성을 보여줄 것이다.

 

6. 질서 있는 예배

 

기독교인의 예배는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기독교인의 예배가 질서 있게 진행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이며,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질서 있는 우주를 창조하셨고, 질서 있는 우주에 자신을 관련시킬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질서 있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한 질서 있는 예배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1) 아름다운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름다운 예배가 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예배가 바로 질서있는 예배 행위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의 행위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으며, 자연히 질서와 위엄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성경에서도 여러 곳에서 아름다운 예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금으로 장식한 교회에서 제사장이 갖가지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는 영광과 위엄이 가득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가짐으로써,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가 마땅히 취하여야 할 태도로 여겼다.(시29:2, 96:9) 신약시대의 예배는 구약시대의 외면적인 아름다움과 치장보다는 내면적인 아름다움, 신앙으로써 정성을 다하는 심령의 아름다움을 더욱 강조하였다(약2:2-9).

 

2) 기쁨의 예배

 

기독교인의 예배는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기쁨에서 시작된다. 이 감사의 마음, 기쁨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예배는 아담의 타락이후 사실상 그 맥락이 끊어졌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된 상태에서 인간은 암담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하심과 십자가상의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우리의 죄는 사하여 졌고,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중보가 된 예배,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는 당연히 기쁨과 즐거움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시편 100편 1절에서 4절까지에서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 지어다”라고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였다.

 

3) 질서의 예배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혼돈과 무질서를 가장 싫어한다. 그는 질서 있게 만물을 창조하셨고 질서 있게 이를 관장하신다. 성경은 우리에게 질서 있는 예배를 드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전14:40) 질서의 예배란 규모 있고 체계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시편 29:2에 보면,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묘사는 정장의 빛난 차림으로 엄격하게 차렷 자세 대열을 갖추고 있는 군대와 같다. 군대가 지휘관의 명령을 순종할 준비를 갖추고 서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질서 있게 서있어야 한다. 인간들은 의식이나 형식을 통하여 소통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영적인 반면에,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속성도 갖고 있다.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는데는 외적 표현이 필요하다. 비록 외형이 예배에서 영적인 것에 항상 예속되어야 하지만, 영적인 예배는 그 외형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 요소요소마다 조직적이고 질서 있게 배열되어야 한다.

 

7. 성경적 예배

 

예배에 대한 유일한 규범은 성경이다. 성경은 교회의 생명책이다. 성경은 예배를 위한 객관적 내용을 제공한다. 따라서 예배에서 성경이 교훈하지 않는 것은 배제하여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성경적 순수성을 지키려고 애썼다. 즉, 그들은 성경이 교훈하는 것 외에 인간적이고 비성경적인 요소를 배제하려고 힘썼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가 인간적인 요소를 다분히 가미하고 있다하여,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인간적 요소를 배제하고 성경적 원리에 복귀하려고 노력하였다.

오늘날의 기독교인의 예배는 성경을 기초로 한 성경적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 성경이 교회의 예배 내용을 규정할 때 그 예배는 성경적 예배가 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지도를 받는 예배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경을 기초로 한 예배이다. 참 기독교의 예배는 구속 및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한 진리를 위하여 성경에 의존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 중의 하나는, 이러한 성경을 예배의 근본으로 삼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일 것이다.

 

 

 

 

 

 

 

 

 

 

 

 

 

 

 

 

 

 

 

 

 

 

 

Ⅳ. 열린예배에 대한 이해

 

기독교의 예배란 그 낱말적 의미가 말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를 경배하며 그를 섬기는 봉사적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예배의 근본적인 출발은 우리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 밖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의 본질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의 예배는 먼저 인간편의 노력에 의한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계속적인 선포와 작용으로써 인간을 섬겨주시는 하나님의 봉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요,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문명이 발달된 매스컴 문화시대에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섬김이라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배개념과는 매우 구별되는 차원의 예배가 자주 언급되어진다. 그중에 하나로 열린예배를 말할 수 있는데 먼저 우리는 열린예배를 이해하기 위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범위 내에서 열린예배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고자 한다.

 

1. 열린예배에 대한 정의

 

많은 사람들이 ‘열린예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용어는 원래 미국에서 사용하던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라는 용어를 우리나라에서 번역하여 사용하는 한국적 번역용어이다.

구도자예배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든지 간에 그들이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 스타일을 의미한다. 소위 구도자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배를 일반적으로 열린예배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열린예배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구도자 중심예배(seeker-driven service)와 구도자 민감예배(seeker-sensitive worship)을 구별해야 한다. 전자는 미국의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서 실행하고 있는 구도자 중심의 예배방식이고 후자는 새들백 교회(Saddleback Community Church)에서 채택하고 있는 예배형태이다. 여기서 구도자란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구도자 민감예배는 단순히 복음을 추구하는 불신자들에게 보다 더 우호적이고 친절하며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하는 예배를 지칭한다. 구도자 민감예배가 강조하는 것은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드리는 예배이지만 불신자들이 참석했을 경우를 감안해서 그들이 심리적으로나 인지적인 면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세밀하게 기획된 예배형태’여야 하고, 또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도 예배를 구도자(seeker)에게 민감하게 만들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반면 구도자 중심예배는 구도자 민감예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면에서는 예배(worship service)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도전략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구도자 중심예배는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소위 예배의 모든 부분을 전도대상의 지식과 지각, 경험, 그리고 그들의 필요와 욕구의 관점에서 조정하고 기획한다. 그래서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참가했을 경우에도 아무런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예배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구도자 중심예배의 기획자와 인도자는 예배의 본질과 예배의 역사, 그리고 예배의 유형이나 형식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아니한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구도자 중심예배는 그 목적이 공예배(public worship)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공예배에 추가해서 제공하는 예배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열린예배라는 개념은 구도자 중심예배를 지칭하기 보다는 구도자 민감예배에 더 가까운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2. 열린 예배의 기원과 역사

 

열린 예배는 1970년대 미국 빌 하이벨스 목사의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에서 처음 시도되어, 1980년대 들어와서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가 윌로우 크릭 교회와 비슷한 사역 철학을 가지고 구도자를 위한 전도 예배를 시도하여 현대 미국교회에서 가장 급성장한 교회들이 되었다.

윌로우크릭 교회 열린 예배에 대한 동기는 다음과 같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구도자 예배’라고 부르는 개념을 실현하는데 헌신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중요한 동역자 데이브 홈보(Dave Holmbo)가 함께 하였는데, 그는 현대적 예배를 시작한 사우스팍 교회의 청소년 음악 사역자로서, 기독교 현대 음악의 선 컴퍼니(Son Company)라는 그룹을 창단했다. 빌 하이빌스는 그의 초대로 그 모임에 참석한 뒤 몇 개월 후에 찬양 팀 기타 연주자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그 모임 연습이 끝나면 그들에게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다. 그 후 선 컴퍼니에 대한 빌 하이벨스와 홈보의 절대적인 헌신은 그 모임을 3년 반 만에 약 1000내지 1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참석할 규모로 성장하게 하였고, 예산에 있어서도 처음 300불에서 80,000불로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윌로우크릭 교회의 사역철학은 이런 사역을 통한 두 가지의 깊은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이었고, 둘째는 교회에 대한 깊은 좌절과 갈등이었다. 빌 하이빌스와 홈보는 우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시대적인 방법을 찾아야 함을 깊이 인식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선 컴퍼니를 활성화시키면서, 모임 대상자들을 다양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청소년에서 장년에 이르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청소년 사역은 한계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장년 사역은 실패로 돌아갔다.

빌 하이벨스는 23세에 열린예배를 구체적으로 기획하며 교회개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드디어 윌로우크릭 교회는 시카고 지역의 불신자와 교회에 관심이 없는 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지를 바탕으로 전통적이고 형식적 기독교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1975년 10월 12일 윌로우크릭 극장을 빌려서 첫 열린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새들백 교회의 시작은 1979년 12월 릭 워렌 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25세에 그의 사모와 4개월 된 아기와 함께 남가주 새들백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도착한 후 2주부터 7명이 모여 첫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이 새들백 교회의 시작이다. 열린 예배는 그가 교회를 개척한 후 과연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는데, 릭 웨렌은 당시 남가주 지역에서 많은 유명한 목회자가 많음을 알고 기존 신자의 수평 이동보다는 불신자들로 교회를 시작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교인들은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사명임을 강조한다. 그는 남가주 주민의 마음을 알기 위한 12주간의 가가호호 방문을 통하여 복음 전하기에 앞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고, 그 후로 불신자들을 향한 예배를 구체적으로 기획하게 되었다. 새들백 교회의 첫 열린 예배는 1980년 4월 6일 부활주일 아침 205명이 라구나 힐 고등학교(Laguna Hills School) 강당에서 드렸다. 그러나 1주전에 릭 웨렌을 중심으로 15명의 창립 교인이 설립 예배를 드렸었고, 그들은 첫 예배를 위해 약 15,000장의 ‘교회 개척과 첫 예배에 관한 편지’를 직접 주소와 우표를 붙여 부활 주일 10일전까지 새들백 전지역에 첫 열린예배 안내 전단지를 배포하였다.

이들 두 교회는 불신자의 영혼을 품겠다는 의지에서 시작해서, 오늘날 ‘차세대 교회’라고 불리는 놀라운 성장을 이룬 교회들이 되었다. 이들 차세대 교회는 미국 전체 교인수의 10퍼센트 정도이지만, 차세대 교회에 미국의 기독교인 50퍼센트가 출석하고 있다는데서 열린 예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최근 한국교회에서도 열린 예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대표적인 교회가 온누리 교회이다. 담임목사 하용조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인식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열린 예배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신자의 수평 이동과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며, 신자가 사회에서 그 위치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현재 온누리 교회 열린 예배 담당목사 권준과 더불어 열린 예배를 기획하게 되었고, 드디어 1997년 1월 4일 토요일 오후 6시에 첫 열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김기영 목사는 열린 예배의 미국적 배경과 상황과 관련하여 “그것은 세속성의 문제로서, 미국 세속화의 특징은 수평화 하는 힘에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미국인의 권위와 힘은 수평화 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상복 차림의 설교자가 단 위에 설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적 상황에서 평상복 차림의 예배 인도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의 열린 예배는 시작 단계이다. 따라서 미국적 상황에서 성공한 열린 예배 형태가 한국의 상황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급선무는 토착화의 문제이다. 또한 한국적 열린 예배의 가능성은 한국교회의 당면문제가 예배갱신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된다. 왜냐하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성장은 침체 상황에 놓였으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예배 갱신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열린예배의 시도는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예배갱신의 문제지만, 궁극적으로 하용조 목사의 말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마음 때문이다.” 따라서 열린 예배는 불신자에 대한 복음사역의 한 형태이며, 매우 신중히 기획하고 준비된 예배이다. 그러나 열린예배는 기존신자들에게는 부정적인 시야를 가진다. 특히 젊은층보다 노년층이 그렇다.

결국 열린예배의 필요성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예배의 목적에 두어야 한다. 신학적인 약점과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시대 문화적 상황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표현된 ‘회중을 위한 예배’라는 관점에서 열린예배의 타당성과 수용 가능성을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열린예배의 신학적 근거

 

최근 열린예배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가속화되고 있다. 그것은 열린예배에 찬반론에 대한 논쟁이며,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 열린예배에 대한 문화적 조건과 그 의도, 그리고 신학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가령 예배 스타일의 초점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인가 아니면 복음전도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열린예배를 드리는 미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점점 열린예배를 드리고자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 이 시대의 변화와 현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복음전도의 새로운 양상을 띤 예배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물론 이런 열망의 표현과는 달리 예배적 약점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열린예배를 위한 신학적 근거와 이해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가 있다.

첫째, 상황화의 결과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인들의 문화를 전제로 이루어진 상황화의 결과이다. 이처럼 열린예배는 상황화 원리를 활용한 한 형태일 뿐이다. 예배가 시대적으로 변화한 사실처럼, 현대적 예배형태로서 열린예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형태의 변화이다. 어떤 개념일지라도 시대와 문화적 배경의 변화에 의해 상황화의 과정을 거친다. 다시 말하면 예배형식의 변화에 있어서도 그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커뮤니케이션 원리이다. 어떤 메시지든지 받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처럼 열린예배에도 성육신적 원리가 적용 되야 한다.

넷째, 바울의 성육신적 전도방법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23절에 성육신적 전도방법을 언급한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고, 또한 여러 모양이 되었다. 즉 열린예배는 복음전도를 위한 예배의 한 형태이다.

 

열린예배에 있어서 신학적 사고와 이해는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기 위함이다.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예배를 낳을 수밖에 없고, 오히려 현대적 예배 갱신에 혼란을 가중시킬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본질과 목적을 분명히 이해함으로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4.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

 

열린예배 역시 성경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열린예배를 시작한 사람들은 그들이 새로운 성경적 원리를 알아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열린예배에 대한 성경적 원리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 열린예배가 점점 더 활기를 띠게 되면서 여기에 대한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들은 성경적 원리에 따라서 자신들의 방법을 점검해가면서 열린예배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마령하게 되었다. 열린에배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사야 66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남은 자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하나님을 소개할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둘째는 시편 96편 3,10절 말씀과 시편 57편 9절의 말씀을 참고하면 시편 기자도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셋째는 신명기 26장 10,11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예배할 것을 가르쳐 주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라”고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은 가나안 족속을 말하며 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때부터 구도자 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그러한 장을 만들라는 것이다.

넷째는 로마서 15장 9-11절, 시편 86편 9절과 67편 5,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잠재적인 예배자로 보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사도행전 10장 34,35절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서 고백한 내용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통해서도 그를 경건하게 경외하는 자들을 부르신다고 말하고 있다.

다섯째로 고린도전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주제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열린예배를 시작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이다. 복음전도의 한 방편으로서, 즉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더 많은 자를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열린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정 예배의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되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예배할 수 있도록 열어야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성경적 근거를 통하여 열린예배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개방된, 그들이 쉽게 와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그러한 장을 만드는 예배를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5. 열린예배의 특징

 

열린예배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다.

첫째, 사회적 조사를 통하여 회중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필요를 먼저 파악하고 예배에 많은 기능을 첨가한다. 음악적 효과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나 드라마나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과 그리고 초창기에는 헌금시간을 두지 않았다는 것도 이런 연구를 통한 자료에 근거해서 취한 전략이다.

둘째, 예배를 기획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배를 기획 한다’라는 말은 상당히 어색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배를 기획 한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배는 목사님이 설교를 준비하고, 찬송가를 고르고, 성가대가 찬양을 준비하면 다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도자 예배를 실시하는 교회에서는 예배가 정확하고도 세밀하게 기획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성경에 보면 고린도전서 14장 40절에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씀을 살펴볼 때 예배를 기획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좀더 나은 예배를 주님 앞에 드리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셋째, 예배중에 환희와 기쁨, 축하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축하의 요소가 구도자 예배에 하나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예배의 특징은 상당히 경건하다. 경건이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그림은 어둡고 무거운 것이다.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예배에서 환희와 기쁨의 요소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의 주요 요소이다. 그 예배의 요소를 우리가 너무 망각하고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구도자 예배는 이러한 환희와 축하의 요소를 살리고 있다.

넷째, 음악 선택을 아주 신중히 하는 것이다. 현대음악을 많이 사용하면서 영적으로 고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그대로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가사도 새롭게 쓰는 것이 보편적이다. 또 음악에 있어서 스타일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유롭다. 음악을 사용하기 위해 사용 전에 미리 검토하는데, 예배분위기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음악을 결정하고 거기에 맞게 선곡을 한다. 아울러 대체적으로 보면 음악을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어떤 리듬을 타고 있는 것을 본다. 처음에는 약간 느린 감성적인 곡으로 시작했다가 다음에는 빠른 템포의 곡을 부르는데, 찬양시간의 60퍼센트 정도를 사용하면서 나머지 시간은 앞뒤로 약간 느린 곡들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밴드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가사를 보여주기 위해 멀티미디어를 사용하는데 상당히 앞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섯째, 예배 진행과 흐름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예배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순서와 순서사이 중간 중간에 지루하지 않게 하는 요소들을 많이 삽입한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 스타일은 마치 달팽이 속도와 같이 아주 느리다. 순서와 순서사이에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많은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도 구도자 예배에서는 순서와 순서사이에 죽은 시간이 별로 없다.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섯째, 말씀을 나누는 설교시간에 상당한 비중을 두되, 이 말씀을 접근해 가는데 있어서 다양한 접근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드라마와 비디오인데 필요에 따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일곱째, 전체적인 분위기가 따뜻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건물부터 아주 따뜻하고 조명도 좋다. 조명은 온화하고, 음향은 듣기에 아주 편하도록 신경을 쓰고 좌석도 편리하게 되어있다. 실내온도라든지 화분의 위치등도 아주 섬세하게 놓여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여덟째, 다양한 변화를 통해서 기대감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구도자 예배 전체 형식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틀이 있다. 이 틀을 유지하면서도 늘 변화를 시도한다. 같은 비디오를 이용하지만 어떤 때는 인터뷰 스타일, 어떤 때는 드라마 형식, 다른 때는 편집을 이용하기도 한다. 찬양을 인도하는데도 어떤 때는 팀이 나가서 바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고, 또 독창을 하는 사람이 솔로를 하므로 시작하기도하고, 어떤 때는 연주로만, 어떤 때는 멘트와 함께 기도로 시작하기도 한다. 광고를 하는데도 드라마, 비디오, 구두설명 등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이런 변화를 자꾸 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전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도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기대감을 갖도록 진행한다.

아홉번째,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평가하고 향상시키는 것에 전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구도자 예배를 디자인하고 실행하고 드리고 난 다음에는 늘 어떻게 하면 좀더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 것은 무엇이고, 냉담해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늘 처음 교회에 나온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살펴본다. 아울러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서로를 평가해 주는 작업도 하고 있다.

 

 

 

 

 

 

 

 

 

 

 

 

 

 

 

 

 

 

Ⅴ. 열린예배에 대한 비판적 평가

 

본장에서는 전통적 예배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개혁주의 예배의 신학적 고찰을 기준으로 열린예배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1. ‘하나님 중심의 예배’라는 관점에서 본 문제점

 

1) 열린예배의 특징은 조용한 명상의 예배가 아니라 보다 축제적인 분위기의 예배이며 복음의 시각적 효과들이 인쇄물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열린예배에서는 더 이상 전통적인 찬송가가 예배를 이끌어 가지 않고,(심지어 갈보리 채플교회는 예배음악을 Rock & Roll로 바뀌었다.) 드라마처럼 예배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주의 교단들로부터 “불경건한 교회” 혹은 “유행을 따라가는 교회”라는 지탄을 받고 있다.

설교자도 구도자들의 친근감을 갖기 위하여 넥타이를 매지 않고 청바지를 입거나 평복으로 강단에 서고, 설교도 일반적인 선포가 아닌 토크 쇼 형식의 대화식 설교가 시도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열린예배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예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예배의 계획과 준비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자 혹은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계획이란 생각이 든다. 이것은 열린예배의 형식에 비추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의 본질과 방향성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열린예배는 예배의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한 배려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2) “구도자 예배는 신학에 따르기 보다는 인기에 부합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려는 시장개념을 따르는 실수를 범할 우려가 많다... 오직 우리의 예배를 관람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다. 하나님이 청중의 위치가 되는 예배에 사람이 청중이 될 수 없다. 예배의 성공은 하나님께 얼마나 맞추어지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도자 예배는 참석자들의 취향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하나님보다는 예배에 오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할까에 더 관심이 많다. 이것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앞뒤로 바뀐 것에 해당한다.”

 

3) 열린예배는 드리고 받음의 균형적인 상호관계가 없다. 열린예배에서는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인가 하는 고민은 사라지고, 어떻게 사람에게 하나님을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고민만 남아있다. 회중의 입술은 찬양하지 않았고, 감사하지 않았고, 고백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군가가 아름다운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듣고 있었고, 언변이 좋은 설교자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 헌금은 마음에 내키면 드리도록 되어있었다. 회중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무대위에 펼쳐지는 종합예술을 관람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드리는 예배가 보는 예배, 보여주는 예배로 전락하고 말았다.

 

4) 열린예배는 예배의 거룩성과 경건미를 상실하면서 회중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는 경향으로 기울기 쉽다. 열린예배는 구도자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그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형태에 관심을 가져 회중의 흥미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양한 매체의 활용도 결국은 메시지의 이해를 돕는다는 차원 이상으로 흥미롭게 회중을 이끌어가는 방편의 의미를 당연히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히 예배의 거룩성과 경건미에 관심을 상실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게 된다.

정일웅은 열린예배의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구도자 예배란 코미디라는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적 생산사회가 소비자 취향에 맞추는 상품 생산과 시장전략과 다를 바 없다는 문제성을 교회가 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나치게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이 말은 유흥과 오락적인 것을 표현하는 말로 인간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행위를 뜻한다)로 전락시킨다는 평가가 강력히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

 

2.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라는 관점에서 본 문제점

 

열린예배를 찬성하는 분들 중에는 불신자들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예배의 장점으로 여긴다. 그러나 불신자들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신학적으로나 예배학적으로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유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창조주로 섭리자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지금도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인간을 위하여 하신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참된 예배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와 찬송을 드릴수 있을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예배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다. 한 예배학자는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제대로 드릴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에게는 차라리 예배라는 명칭보다 “전도집회”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3. ‘영적예배와 성령’이라는 관점에서 본 문제점

 

1) 열린예배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예배에 참석하여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배는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낯설고 심지어는 이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또한 그것을 기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안에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삶과 생활방식을 향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신령(Spirit)과 진정(Truth)으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러 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이 마치 쇼핑 몰(shopping mall)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교회는 쇼핑 몰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세계와 불신자간의 모든 거리를 줄이려고 노력하거나 그러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교회와 세상의 차이를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교회의 사명을 해칠 뿐이지 교회의 사명을 결코 고양시키지 않는다.

 

2) 현대사회는 텔레비전과 같은 방송 및 전자매체가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도 지대하다. 이러한 시각문화는 공 예배에도 영향을 미친다. 현대인들은 청각문화가 아니라 시각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드라마, 극, 게임 등이 오래 동안 현대인의 생활방식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전자매체, 특히 텔레비전을 통해 나타나는 시각문화는 독특한 도전과 위험을 노출시키고 있으며, 교회의 예배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텔레비전의 부단하게 변하는 이미지는 우리의 주의 집중 시간 범위를 단축시키며, 예배자들로 하여금 더 시각 지향적이 되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예배의 명제적인 내용은 소실되고 극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만 도입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예배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게 하기보다는 소극적인 시청자가 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공예배에 대한 분석자들에 의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시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책의 사람들이며, 말씀과 신앙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오직 한 가지 말씀에 두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성도 변혁시킨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4. ‘자유스러운 예배’라는 관점에서 본 문제점

 

최근에 열린예배의 경향을 보면 구도자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찬송가를 부르지 않으며,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 등도 외우지 않는다. 물론 헌금도 생략한다.

전통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통이란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개인이나 공동체가 잘못을 범하는 것을 막아주는 테두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외형적인 변화가 결국은 사고와 내용을 변질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열린예배가 가진 찬양중심의 예배는 강론시간의 상대적 단축을 불가피하게 한다.

 

5. ‘공동체적 예배’라는 관점에서 본 문제점

 

1) 열린예배는 예배에서 변화를 추구한다. 특별히 음악과 설교형식에 있어서 변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예배에 있어서 최선의 변화, 특별히 음악에 있어서 변화는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전도의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예배에 참여하지도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려는 희망에서 이러한 변화의 원리를 무시하는 예배의 변화는 오히려 예배를 해치게 되며 교회 공동체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이끌기를 원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이끄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직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은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필요한 음악이 무엇인지를 묻는 대신에, 어떠한 음악이 이미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다 더 잘, 그리고 온전히 예배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음악인지를 묻는 것이 교회공동체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구도자들마저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으로 예배형식을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2) 열린예배는 언제나 열린예배를 구상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 대상자를 고려하게 되어있다. 어떤 교회는 그 대상 층을 청년층에 또 다른 교회는 30,40대 남자에게 맞추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예배의 공동체성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된다. 즉 사회적인 영향력이 약한 계층의 사람들, 즉 어린이, 청소년, 노인은 이 예배의 초청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열린예배는 특정 세대만을 겨냥하는 것이므로 문화적으로나 계층적으로나, 세대간에 닫힌 예배의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이름은 열려 있으나, 실제로는 세대들을 소외시키는 예배가 될 가능성이 있다.

 

6. ‘질서 있는 예배’라는 관점에서 본 문제점

 

1) 열린예배에서는 설교자가 구도자들의 친근감을 갖기 위하여 넥타이를 매지 않고 청바지를 입거나 평복으로 강단에 서고, 설교도 일반적인 선포가 아닌 토크 쇼 형식의 대화식 설교가 시도되고 있다. 그렇지만 시편 29:2에 보면,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묘사는 정장의 빛난 차림으로 엄격하게 차렷 자세 대열을 갖추고 있는 군대와 같다. 군대가 지휘관의 명령을 순종할 준비를 갖추고 서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질서 있게 서 있어야 한다. 인간들은 의식이나 형식을 통하여 소통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영적인 반면에,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속성도 갖고 있다.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는데는 외적 표현이 필요하다. 비록 외형이 예배에서 영적인 것에 항상 예속되어야 하지만, 영적인 예배는 그 외형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 요소 요소마다 조직적이고 질서 있게 배열되어야 할 것이다.

 

2) 열린예배는 평신도와 목회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다. 열린예배는 예배를 기획하는 일에서부터 예배를 진행하는 순서에 다양한 전문인들이 참여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예배의 진행을 위해 음악분야, 드라마분야, 비디오분야의 담당자들이 함께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히 목회자와 평신도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되어서 안수 받은 목회자의 사역과 역할의 의미를 약화시키게 된다. 휫튼 대학교의 게리 버지(Gery M. Burge)는 현대의 예배가 지향하는 경향 속에서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함에 있어서 목회자 나름대로의 독특한 제사장의 역할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퐁(Fong)은 목회자가 예배의 인도에서 점점 물러서는 이러한 경향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그릇된 이론들을 주의하도록 경계하고 있다: (1) 누구나 예배를 인도할 수 있으며, (2) 모든 목사, 장로 또는 선교에 뛰어난 사람은 예배를 인도할 수 있으며, (3) 음악을 이해하고 읽는 사람은 누구나 예배를 인도할 수 있으며, (4) 반면에 노래를 못한다면 예배를 인도할 수 없다.

기독교인의 예배는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7. '성경적 예배'라는 관점에서 본 문제점

 

1) 현대사회는 소비주의 문화로 특징 지워지고 있다. 현대사회의 소비주의는 단순히 상품교환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사람들은 경험, 오락, 꿈, 심지어는 쾌락까지도 사고팔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교회가 시장의 모델을 도입하고 이용하는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교회 자신들을 백화점과 같은 상점(Shopping Mall)으로 생각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소비자들이 백화점에서 물건을 선택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교인들도 교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예배시간에서부터 예배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들이 원하는 시장의 민감성(market sensitivity)은 공예배에도 확대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광범위한 시장조사를 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장조사와 시장분석은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을 넘어 종종 처방적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교회에 적용된 이러한 시장 모델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대상들을 여러 측면에서 잘 알아서 이들에게 접근함에 있어서 좀더 의도적이고 효과적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대상과 ‘접촉점’을 확립해야 한다는 기본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모델을 교회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일은 교회의 사역과 예배의 모양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을 잘못 생각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교회의 사역과 예배는 성경적이며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원리를 따라 결정되어야 하지 소비자의 기호가 이러한 원리를 대치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회가 소비문화에 항복하는 위험에 서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열린교회와 열린예배는 신학적 발전의 결과로 보지 않고, 시대적 대세의 영향과 그 변화에 대한 적응이라고 본다. 신학과 교리에 대한 관심보다도 구도자의 필요와 욕구라는 심리중심, 감성중심인 영성개념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임과 동시에 효과를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열린교회 운동은 교회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세에 맞추어 교회와 예배를 재구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현대라는 시대정신에서 교회는 열려가기 시작했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에서 교회와 예배는 시대정신에 따라 해체되어 간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복음이라는 절대성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그 형식에 맞추어 대답을 주고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3) 미국의 복음주의는 복음과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사상을 기초로 종종 세상을 완전히 이원화하여 거부하거나, 아니면 세상과 문화를 종교적으로 중립화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열린예배는 포스트모던 시대적 대세를 중립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고, 역으로 그 대세를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록 의도적으로 그 외형적 형식만을 복음전도의 도구로 도입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포스트모던 세계관이 무의식적으로 열린교회와 예배의 구조가 되어 있고, 목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문화가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지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인본주의적 종교 성향을 지닌 것이므로 철저한 분석,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기독교적 세계관의 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열린교회와 열린예배는 정작 분석되어 해체되어야 할 세속적 세계관이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의 형식이 됨으로써 그 구조를 대체하려는 위험한 시도가 될 수 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열린교회는 교회의 조직과 기능과 예배가 중립적인 문화라고 간주함으로써 그 신학적인 성격을 애써 부정한다. 물론 교회의 형식과 전통에 문화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은 예배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중요한 뼈대가 된다. 열린교회와 열린예배는 대중문화를 의미하는 좁은 의미의 문화이해와, 문화에 대한 소박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8. ‘말씀 중심의 예배’라는 관점에서 본 문제점

 

1) 종교개혁시대의 예배는 중세시대의 의식 중심의 예배에서 탈피하여, 말씀의 설교가 중심이 되는 예배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열린예배는 설교자가 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준비한 선포로서 설교를 약화시킨다. 열린예배는 메시지의 전달 수단을 드라마나 기타 다른 매체들로 통하여 메시지를 표현하는 방법들을 사용한다. 현재 열린예배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주로 사용하는 매체는 드라마와 비디오로 이러한 매체를 통하여 전달되는 복음 메시지는 대단히 강하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전통적인 예배를 문제 삼으면서 현대의 매스 미디어를 이용하는 시대에 설교는 “쇼”와 같아야 하고 예배는 “드라마”처럼 되어야 할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교의 경향은 자연히 설교자가 본문을 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준비한 선포로서의 설교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설교자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설교자 개인에게 있는 표현법이 유기적으로 사용되어 선포하는 역할을 물리적인 도구로서의 매체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람을 사용하시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를 전달시키는 과정에서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하여 계시가 전달되도록 하신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전달자의 유기적 역할을 통하여 계시를 전달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Lloyd-Jones)는 설교자의 선포로서 설교가 약화 되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설교와 설교 전달행위자 관계는 중요한 것으로 설교 전달의 행위에는 설교자의 인격, 그의 성품, 그의 설교 내용 등 전부를 포함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매체로 통한 메시지의 전달이 강조되어 선포자의 선포로서 설교사역을 약화시키는 것은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9. ‘성찬 예식’이란 관점에서 본 문제점

 

종교개혁시대의 예배의 특징은 성찬 본질의 회복이었다. 그런데 열린예배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서 성찬을 다시 격하시키는 면이 있다. 열린예배는 구도자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예배라는 면에서 볼 때, 성찬식이 예배 속에서 거행되어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그 이유는 열린예배의 참석자들은 아직도 성찬의 의미를 알고 있지 않은 상태이며 성찬에 참석할 수 있는 믿음의 고백들 이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린예배의 일반적인 경향은 예배에서 성찬을 격리시키는 경향을 만들게 되며, 이러한 경향은 곧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서의 성찬을 격하시키는 문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성찬이 가지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예배 속에서 지속적으로 시행하여 나가야 할 중요한 요소로 강조하고 있다. 제임스드 종(De Jong)은 개혁교회의 예배에서 성례전의 중요성을 피력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을 준수함으로(예배의식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그분의 탁월성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10. ‘예배와 선교의 관계성’이란 관점에서 본 문제점

 

1) 예배는 신자들의 전 삶이 표현되며, 교회의 전 사역이 관여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배 속에는 이미 선교(복음전도)적인 요소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격하며, 새로운 결단의 순간을 맞는다. 이 새로운 결단 속에는 복음 전도적인 결단도 당연히 포함된다. 예배시간에 들려지는 말씀은 성도들의 믿음에 도전이 되며, 약한 신앙은 강화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불신자의 전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예배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지만, 선교를 고무하고, 선교에 대해서 도전한다. 따라서 전도를 목적으로 한 예배는 예배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2) 예배와 선교의 관계설정은 최근 들어 미국의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John Piper에 의해 비교적 명확성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Piper는 그의 저서, “열방을 기쁘게 하라”(Let the Nations be Glad)에서 선교가 아니라 예배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선교가 존재하는 것은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궁극적인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므로 선교가 아니라 예배가 궁극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따라서 당연히 예배 받으셔야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하여, 먼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선교 행위가 있게 되고, 그 이후에는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로부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선교의 목표이면서 동시에 선교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열린예배가 참된 예배의 중요성을 뒤로 한 체 전도목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망각한 처사인 것이다.

 

11.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에 대한 문제점

 

열린예배에서 불신자를 배려하려는 의도는 선하나 전통적인 예배가 현대문화에 적절히 상황화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 과정과 내용을 지나치게 상황화하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또한 열린예배에서 주장하는 상황화의 성경적인 근거도 ‘예배의 상황화’와는 관계가 없으며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성경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못하고 내린 결론이다.

고전9:19-23절의 말씀으로 열린예배를 구상하고 실시하는 자들은 바울의 상황화에 대해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상황화가 전도에 있어서 전도자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것을 그들은 예배의 상황화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26:10-11절의 말씀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간주하여, 이방인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뜻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이때부터 구도자 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대한 심각한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이 구절에는 결코 예배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 내용도 예배에 관한 말씀도 아니다.

또한 이사야서66:19절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바, 그 남은 자들이 이방인에게 가서 하나님을 소개할 것에 대한 말씀을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남은 자들의 이방인 선교에 관한 말씀이지 결코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를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시편96:3,10, 57:9의 말씀을 참고하면서 시편 기자도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배 받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역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이라는 예언적 말씀을 불신자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이라는 말로 오해하고 있다.

로마서15,8:11, 시편86:9, 67:5,7, 사도행전10:34-35와 같은 본문을 ‘불신자’인 이방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신다고 제시하면서 “진정한 예배의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예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열어야 된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구절도 불신자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든가, 성도들로부터 하나님께 드려질 예배를 불신자를 위해 상황화하라는 내용과는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열린예배의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는 그 해석에 있어서 무리한 점이 많고, 대부분 아전인수격 인용과 해석이다.

 

 

 

 

 

Ⅵ. 결 론

 

이제 한국교회가 열린예배를 어떤 상황에서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혹은 열린예배가 전통적인 공예배의 전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결론 내려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는 우선적으로 열린예배에 대한 명칭을 바꾸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예배하는 대상들이 아직도 예배의 의미를 이해하고 참석하는 대상이 아니라 기독교 예배에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예배라는 명칭보다 “전도집회” 혹은 “전도를 위한 교회의 행사”등으로 변경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명칭을 변경한 열린예배를 한국교회가 복음전파와 선교적인 상황에서까지 불필요한 것으로 거절해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열린예배가 교회에 무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에 이끈 효과를 가진 것으로 인정한다면 전도를 위한 교회 행사의 측면에서 보다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이러한 형태의 행사를 통하여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효과적인 전도의 접촉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더욱 그리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명확한 한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열린예배가 그대로 전통적인 공예배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전통적인 공예배가 개선되어 나가야 할 요소들을 인정하지만 열린예배가 공예배의 대안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열린예배는 개혁주의에 입각한 신학적 입장에서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린예배는 공예배의 대안일 수 없으나 늘 공예배의 자리를 넘어다보며 대안의 위치로 점차 흘러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참된 예배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와 그릇된 예배가 참된 예배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파수하는 신실한 파수꾼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한국교회의 성장이 정체되어가고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등한시하는 현실을 보면서 한국교회가 이루어야할 예배의 개혁을 생각해 보면서 본 연구를 마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형식이나 조직, 기술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 특히 목회자들의 건실하고도 모범적인 생활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영적 자질이다. 18,19세기 교회부흥 운동자들이 가졌던 복음에 대한 열정, 말씀에 대한 처절할 정도의 확신, 죄에 대한 민감성,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보다 시급하다. 이것 없이 조직이나 인간관계, 기발한 프로그램 혹은 테크닉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리고 기존의 예배를 좀더 활력 있는 예배가 되게 하기 위하여 첫째, 예배 형식의 전통만을 중요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라는 사실에 새롭고 지속적인 연구들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전통적 예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예배 형식의 전통만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하나님께 더욱 영광이 되는 예배에 대한 연구에 무관심하게 나타난다. 사실에 있어서 예배의 형식은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늘 새롭게 연구되고 적용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개혁주의 예배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을 향한 커뮤니케이션과 예배환경 및 시설구조를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새로운 문화적 도구를 적용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하지만, 도구 자체가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조작될 수 있는 것에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말씀중심 예배에만 획일화되지 않도록 성경적인 예전에 근거하여 성례의 가치를 새롭게 규정하고 그것을 자주 실천하는 것도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는, 예배가 인간의 ‘지. 정. 의’ 3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일이 필요하다. 때로 전통적인 예배 속에는 인간의 지적이며, 정적이며, 의지적인 요소에 균형을 이룬 하나님의 경외의 표현이 부족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린예배는 감정적인 요소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의 주창자들은 전통적인 예배가 지적으로나 혹은 의지적인 방향으로만 기운 것으로 판단하면서 그것의 대안으로 열린예배를 시도했다면 전통적인 예배 역시 그러한 3요소에 온전한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배란 ‘지. 정. 의’의 인격자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외라면 지적인 깨달음 위에 감정적인 움직임과 의지적인 결단을 포함하는 예배라야 생동적인 예배라고 할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이 이제, 모든 목회자들이 예배를 진정한 예배로 개혁하겠다는 지속적인 의지와 노력이 있을 때만 참 예배가 회복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우리의 예배개혁은 시대적 대세에 적응하기 위한 개혁이라기보다는, 성경적 의미의 적극적 확장을 위한 지속적 “열림(opening)”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열린예배도 근본적으로 성경적 원리에 따라 철저히 “열려야(being reformed)"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1. 국내 문헌

 

1) 김득용, 현대교회 예배학신강,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2) 김병원외, 열린예배, 무엇이 문제인가?, 부산:고신대학교 출판부, 2000

3) 김수학, 개혁파 예배학, 대구:보문출판사, 1987

4) 김연택, 21세기 건강한 교회, 서울: 두란노, 1998

5) 박근원, 오늘의 설교론, 대한기독교 출판사, 1980

6) 이상규, 교회개혁사, 서울:성광문화사,1997

7) 정일웅, 기독교예배학개론, 서울:솔로몬, 1993

8) 정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종로서적, 1991

9) 조태현, 예배기획.행사기획, 서울:예루살렘,1997

 

 

2. 번역 문헌

 

1) 김성혜외 공역,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中 예배모범,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8

2) Ed Dobson, 열린예배 실습보고서, 박혜영.김호영역, 서울:홍성사, 1998

3) Lynne & Bill Hybels,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김성웅 역, 서울:두란노, 1997

4) Robert E. Webber, 예배의 역사와 신학, 정장복역,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 1988

5) Robert G. Leybon, 예배학, 김달생.강귀봉역, 서울:성광문화사

 

 

3. 외국 문헌

 

1) De Jong, James A., Into His Presence, 1995

2) E. Brunner, The Divine Imperative(Philadelphia:Westminster Press,1947)

3) Fong. Neale, "Leading Worship in Evangelism", In Evangelism through the Local Church, by Michael Green,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2

4)John Piper, Let the Nations be Glad!: The Supremacy of God in Mission.(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3)

5) Lloyd-Jones, D. M., Preaching and Preacher, Grand Rapids: Zordervan, 1971

6)William D. Maxwell, A History of Christian Worship(Grand Rapids, Mich:Baker Book House,1936)

4. 정기간행물 및 논문

 

1) 권준외, “구도자 예배의 현장을 가다”, 목회와 신학, 1997년 4월

2) 김기영, “미국 교회의 구도자 예배의 현황과 흐름”, 목회와 신학, 1997년 4월호

3) 김만형, “구도자 예배란 무엇인가”, 목회와 신학, 1997년 4월호

4) 김요셉, 구도자 예배 전에 복음화 마인드로 차야한다, 목회와 신학,

1997년 4월호

5) 나광현, "열린예배에 대한 연구“, 미간행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9

6) 문동학, “열린예배의 신학적 이해와 영성”, 목회와 신학, 1997년 4월호

7) 이상규.김요셉, “구도자 예배가 가진 예배적 약점”, 목회와 신학, 1997년 4월호

8) 이영호, “구도자 예배의 현장을 가다”, 목회와 신학, 1997년 4월호

9) 정일웅, 열린예배 새로운 대안인가?, 기독신문, 1999년 1월 20일

10)하용조, “나는 왜 구도자 에배를 시작하는가”, 목회와 신학, 1997년 4월호

11)Brink, E. R., "기독교적이고 개혁교회적인 예배“, 목회와 신학, 1998년 5월호

 

열린 예배에 대한 논문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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