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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빛에 비추어 일상을 살기(전 3:1~22)

겸손

by 김경호 진실 2021. 12. 2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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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연장선상 ‘오늘’에서 영원과 연결된 가치 찾아 즐거움 누리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시간’이나 ‘때’에 대한 격언들을 보면 대부분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아껴 써야 할 선물인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시간에 관한 하나님의 파격적인 통찰은 하루도 1000년 같고, 1000년도 하루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간은 ‘길다’ ‘짧다’가 아니라, 오늘 내가 어떤 터전 위에서 사느냐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이 영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진실을 믿을 수 있다면, 하루와 1000년 사이에는 차이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영원적 차원에서 오늘을 산다면 과거에 대한 우월감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흐릿해집니다.

미래는 하루에 한 번씩만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래를 길이나 속도로 생각하면 거대하고 막막한 나머지, 소위 예언한다는 의심스러운 자들에게 의존하는 미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영원에 연결된 오늘이 하루에 한 번씩만 찾아오는 미래의 진짜 얼굴이라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위로와 평안 중에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시간과 때에 대해 말합니다. 범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우연처럼 다가올 수도 있고, 필연처럼 다가올 수도 있고, 급박하게 올 수도 있고, 애매하게 올 수도 있습니다.(1~8절) 이 수많은 ‘때’들에는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때도 있고,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때도 있고, 그 때를 회피하는 때도 있고, 오히려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는 때도 있습니다.

전도자는 <전도서> 시작부터 반복적으로 허무, 헛됨, 잊혀짐의 문제를 길고 두텁게 다루는 틈에서, 만족과 기쁨을 주는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에 관해 언급합니다. 거기에 담긴 영원한 차원의 기쁨과 감사의 신비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배경에서 때에 관해 생각하게 합니다. 이들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일단 우리 삶은 처음부터 선택적이지 않습니다. 동시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숱한 ‘때와 기한의 변주곡’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에 따라 모든 때마다 애쓰며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묻게 됩니다.(9~10절) 특히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 사이의 관계는 자칫 일하려면 먹어야 하고, 먹고 살려면 일해야 하는 막막한 피곤의 순환으로 말려들어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피곤한 악순환을 깨뜨리는 힘이 바로 만사에 깃들어 있는 때에 대한 인식일 수 있습니다.

특히 내 선택과 관계없이 다가오는 때에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안다면 건강하고 설레는 긴장을 느낄 수 있고, 현재 내가 속한 상황과 때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 보다 긴 호흡으로 삶을 바라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그 자체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지만, 전도자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피어날 때 진실로 아름답다는 통찰을 알려줍니다. 제철 음식이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것처럼, 만물은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자기 존재를 표현할 때 비로소 아름답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나님의 질서에 걸맞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질서에서 태어난 우리 눈과 마음과 몸에도 가장 적합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의 절정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의 빛에 비춰질 때입니다. 만물의 모든 때가 허무에 삼켜지지 않는 길은 영원의 빛 아래 있을 때뿐입니다. 물론 그 때의 시작과 끝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때가 가진 비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때를 의도적으로 감추셨기 때문입니다.(11절)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일이 언제 시작되고 종료될 지, 미래에 속한 때가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진행될 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선악과를 향한 욕망과 유사합니다.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판단의 기준을 내가 확보하여 내가 손수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욕망입니다. 하지만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미래에 대해 알려는 욕망은 득이 될 게 없습니다. 오늘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에서 참 만족과 기쁨과 영원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채 막연히 내일을 알고자 한다면, 언젠가는 있을 거라 생각했던 기쁨과 만족이 안개에 불과했다는 진실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만사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보다 유리한 내일을 확보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붓느라 더이상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땅이 언제 개발될 지 미리 알게 된다면 우리는 누구보다 빨리 매입하려고 정신을 잃을 것이고, 믿음 소망 사랑의 본질인 ‘참음’의 가치는 사라지고, 일상의 소중한 흐름도 깨뜨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일의 시종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오늘 먹고 마시고 일하는 노동의 영원적 가치를 알고 기뻐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언제 죽을 지, 일이 언제 어떻게 진행될 것인 지에 마음을 쏟느라 ‘오늘’이라는 단 한 번 뿐인 기회와, 먹고 마시고 일하는 일상에서 영원한 의미와 기쁨을 맛볼 기회를 날려 버리지 말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대신 ‘오늘’이라는 선물을 기뻐하면서, 내가 누리게 된 기쁨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통로로서 선행을 선택하자고 제안합니다. 열심히 땀 흘리는 수고가 나 혼자만의 기쁨을 향하지 않고, 누군가의 삶으로 아름답게 스며들게 하는 비밀을 알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야말로 그 뿌리가 하나님의 영원성에 닿아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입니다.(12~13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것에 기분 나빠하고 서운해하기보다, 이미 주신 선물의 충분함을 즐거워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정리하자면, 우리 일상이 허무와 잊혀짐에 삼켜지지 않고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고 아름다우려면, 반드시 영원의 빛에 비추어져야 하고 그 뿌리가 하나님의 영원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길게 볼 때 하나님의 행하심은 어떤 것도 보탤 필요없이 완전하여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옛 시절과 먼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미 지나간 것들이 언제 다시 어떻게 나타나게 될 건지 아십니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행하심의 시종을 명확하게 드러내어 알게 하시기보다는, 모든 걸 아는 듯 우월하려는 자만과 교만의 늪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일의 시종을 알 수 없는 신비에 담아 두심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니다.(14절)

하지만 또 다시 이 땅으로 시선을 돌리면 정의의 법을 집행해야 할 자들에게 악이 만연하고, 선과 진실을 고양시켜야 할 공적 자리에 악과 거짓이 가득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 땅의 온갖 참혹한 모순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문맥을 따르자면, 이 때 심판의 기준은 바로 ‘만물과 만사에게 요구되는 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일이 과연 때와 기한과 경우에 맞게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16~17절)

이탈리아의 혁명가 마치니는 “낙심은 환상에서 깨어난 이기주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분명해질 때 나타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반응이 바로 낙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욕망하는 걸 내려놓고 이해여부를 떠나 일상에 담긴 하나님의 때의 완전함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굳이 낙심이라는 고통의 늪에 빠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심판의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때를 발견하도록 방치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만물에 심어 놓으신 때에 맞게 적합하게 살도록 우리 생각을 지속해서 이끌어 가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때를 벗어나 스스로 자신과 상황과 타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자신의 때를 구하는 교만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려고, 무엇보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게 하십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 우리는 내가 상황을 뛰어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상황에 매여 최대한 자기생존을 위해 적응하려고 몸부림하는 짐승과 다름없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18~21절) 그러므로 전도자가 도달하는 결론은 또 다시 이것입니다.(22절) 이 땅에서 수많은 때와 기한들을 통과하는 동안 최상의 삶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에서 영원과 연결된 의미와 가치를 찾아, 해야만 하는 일이 기꺼이 하고 싶은 일이 되는 삶입니다. 곧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는 일상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삶입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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