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판 플릿(Jason Van Vliet)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번역: 박광영 목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굉장히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질문해야 할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 때문이다. 코로나가 우리의 인사 문화에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요즘 시대에 당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반갑고 기쁘게, 아무렇지도 않게 악수를 나눌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당신이 그 사람과 손을 마주 잡을 때 서로 약간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걱정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서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 악수할까요?” 그것이 불편하다면, 미소 띤 얼굴로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는 악수를 나누어야 하는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개혁교회에서는 예배 전에,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에 목사와 장로가 악수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이후 많은 교회들은 장로와 목사의 악수를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내가 설교자로 초청을 받아 여러 교회들을 방문해보면, 최근에 들어와서야 장로와 목사의 악수가 다시 재개되는 것 같다.
이처럼 교회가 악수를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재개하면서 우리는 이 악수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왜 우리는 예배 시작 전에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에 악수를 나누는가?” 나는 이 문제를 한번 깊이 생각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가 반드시 악수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성경이나, 우리의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의 헌법도 예배의 전후로 반드시 장로와 목사가 악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예배 전후로 악수를 하는 관습은 지역 교회들의 자유에 속한 것이다.
왜?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왜”라는 질문을 한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생각들을 서로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질 때 인사를 나누는 것 정도의 의미로 이 악수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예배 전후로 목사와 장로가 악수를 나누는 것을, “우리 강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는 “말씀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의 인사로 여긴다.
또 어떤 이들은 예배 전의 악수가 목사에게 거룩한 예배를 잘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부탁의 의미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배 후의 악수는 장로들이 목사가 전한 모든 설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그가 전한 설교가 성경적으로 옳은 것라고 인정하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설명은 악수가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한다는 생각이다. 카렐 데든(Karel Deddens)은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당회는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도들을 한곳으로 모이게 한다. 그리고 예배를 인도하는 권한과 권위를 악수를 통해 목사에게 전달한다”(Where Everything Points to Him, p. 38). 그런데 일찍이 판 우너 목사(Rev. W.W.J. Van Oene)는 이런 의견에 대해 반대하였었다. 그는 악수와 목사의 권위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이는 “근거 없는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하였다(Clarion Feb 5, 1988, p. 57).
이처럼 악수에 대하여서 목사들도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가지지 못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이에 대하여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장로와 목사의 악수에 대하여서 모두 제각각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쩌면 좀 더 좋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성경은 예배 전후에 목사와 장로가 서로 악수를 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9절을 보면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또 다른 사역자인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 물론 이 악수는 예배 전후에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당회와 같은 회의에서 이루어졌다(행 11:25-30).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갈라디아서 2장 9절의 단어를 한 자 한 자 그대로 직역해보면, “오른손을 그들은 바나바와 나에게 주었다 친교로”라고 해석할 수 있다. 헬라어는 단어의 배치 순서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영어 문법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단어 배치 순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성령께서 마지막 단어인 “친교”를 강조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올바른 방식으로 또는 잘못된 방식으로 악수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악수의 의미는 친교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친교는 그리스도에게 뿌리내리고 있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하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바 되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보물과 은사를 함께 공유한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5문답).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를 생각해보면 우리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형제 자매들의 유익을 위하여서 올바르게 사용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강단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복잡하고 절망스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목사와 장로는 예배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면서 이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함께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친교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풍성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매주일마다 목사와 장로는 서로 오른손을 내밀어서 친교의 악수를 나눈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악수를 잠시 중지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친교는 코로나 팬데믹에 의해서 뒤바뀐 새로운 생각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친교는 분명히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하여 서로 오른손을 뻗어서 친교의 악수를 나누는 것은 정말 가치있는 일이고, 환영 받을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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