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도 다메섹(다마스쿠스)은 시리아의 수도로 남아있으나, 혼란의 도시로서 세계 언론에 가끔씩 등장하고 있다.
시리아는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나라 전체가 전란에 휩쓸려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2018년까지 30만 명 이상),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국제 문제까지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이슬람교 양대 종파 가운데 하나인 시아파 주도국인 이란은 같은 시아파인 시리아 정부와 레바논의 무장단체인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다. 이란의 시리아 원조 금액은 2017년에 200억 달러에 달했을 정도로 이란은 러시아와 함께 시리아의 알아사드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은 국제전으로 확대하여, 미국, 영국, 호주, 러시아도 군대를 파견하여 정부군과 반정부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이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다마스쿠스 남쪽에 있는 키스와(Kiswah) 군사 기지에 주둔 중인 이란군이 2018년 5월 11일 새벽 골란 고원에 있는 이스라엘군 주둔지에 로켓 공격을 하자, 이스라엘군은 즉시 전투기를 동원하여 시리아 내 이란군 군사시설을 폭격하였다. 이렇게 오늘날의 시리아는 이스라엘과도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라디아서 1장 17절)”. 성경은 다메섹의 직가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은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것을 언급하였다.
바울은 넓은 아라비아 반도의 중북부(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또는 동부(예멘, 오만 등)를 간 것이 아니라, 반도 북부 지역에 있는 요르단의 남부 지방을 방문하였던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다메섹 주변도 아라비아의 일부이므로, 바울이 다메섹 근처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여기고 있다. 여하튼 그는 아라비아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메섹으로 돌아오자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력하였으므로,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유대교에 위협이라고 여기고 그를 죽이고자 계획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같이 고린도후서 11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린도후서 11장 32-33절)”.
오늘날 요르단의 페트라(Petra) 지역에 있던 나바테아(Nabataea) 왕국의 아레다 왕(Aretas 4세)은 서기 37년부터 40년까지 유다 지역과 다메섹 지역도 통치하였으므로, 바울이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시기는 서기 35년 또는 36년으로 추정(정확한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음)되며,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탈출한 것은 서기 40년 이전이라고 추정된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과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다 왕이 보낸 방백들로부터 광주리를 타고 성을 내려와서 탈출하였다.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탈출한 것에 대해서는 나바테아 왕국의 당시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다음 회부터는 요르단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권주혁 박사
‘권박사 지구촌 TV’ 유튜브 운영
저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여기가 이스라엘이다>,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지 못하나>,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등
성지 연구가, 국제 정치학 박사
세계 136개국 방문
영국 왕실 대영제국 훈장(OBE) 수훈
바울이 세례 받은 뒤 갔다는 ‘아라비아’는 어디일까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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