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메소포타미아 외부 적의 잦은 침입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적은 이웃 도시국가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 강력한 통일 국가가 없던 혼란한 시기에는 주변의 각종 이민족들이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하여 갔습니다.
애굽의 경우 동서남북 모든 방향이 자연적인 장애물들로 막혀 있어 외부 적의 침입이 매우 어려웠고, 따라서 3,000년 이상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서남북 모든 방향이 적으로 둘러싸인 메소포타미아는 언제 어디서 적들이 메소포타미아의 부를 노리고 침입해 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 사는 이민족들은 자신들의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식량으로 바꾸어 가는 물물교환을 하였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식량이 떨어지면 도시로 나와서 용병이나 노동자로 취업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 이민족과의 관계가 항상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기근과 같은 자연 재해를 만나 물물교환할 것이 없게 되면 이들은 폭도가 되어 도시를 습격하곤 하였습니다. 특히 추수기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노리고 더 자주 적들이 침입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약탈을 감행한 후 홀연히 사라지는 이들에 대하여,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각 도시들은 추수를 할 때도 무기를 지니고 추수를 해야 했으며 늘 경계병을 세워 두어야 했습니다. 또 궁극적으로는 도시 자체의 상비군을 두어 이웃 도시들과 외부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민족들이 메소포타미아에 들어와 정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매우 광활한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에선 토착 민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첫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인들조차 어떤 인종이었는지 알 수 없으며, 주로 셈 계통의 다양한 인종들이 대체로 아람어 계통 언어를 사용하며 뒤섞여 살았다는 것 이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유프라테스 강 인근의 건조한 모습. 정복전쟁을 다니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픽사베이
|
이처럼 동서남북으로부터 수많은 이민족들이 들어와 살았던 관계로, 메소포타미아에선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인종이라도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서로 이익이 상충되면 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에선 인종이라는 개념보다는 소속감이 훨씬 더 중요시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도시가 망하면 그곳에 살고 있는 나와 내 가족도 함께 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종보다는 자신이 속한 도시나 국가를 향한 충성도가 더 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애굽과는 상반된 것으로, 애굽에서는 이민족으로부터 애굽을 지키는 것이 애굽 왕과 애굽인들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도시국가나 어느 왕국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동서남북이 모두 개방되어 있는 관계로, 메소포타미아는 수시로 외부 적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평야 지대에서 기습하는 적을 방어하기는 쉽지 않았고, 성 자체도 진흙을 이용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견고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적이 언제 어디서 쳐들어올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사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결국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을 하는 습성을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죽고 죽이는 모략과 음모가 판을 치는 정치판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을 가진 메소포타미아에서 왕조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역사가 애굽 역사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마지막 왕이었던 나보니도스(B.C. 550-539)의 아들 벨사살 왕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몰랐습니다. 다니엘 5장 23-30절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전 기명을 가지고 신하들과 더불어 잔치를 벌였는데, 바빌로니아의 운명이 그날 밤 끝날 것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잔치가 있던 그날 밤 벨사살왕은 내부 반란 세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바벨론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외부 세력과 결탁한 내부 반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따라서 왕도 신하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왕은 늘 독살이나 암살의 위험 속에 지냈으며 심지어 왕비나 왕자조차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왕을 만나기가 매우 어려웠고, 조금만 수상한 기미가 보여도 왕은 왕족이나 신하를 잔인한 방법으로 제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네스코(UNESCO)에 등재된 고대 도시 바벨론.
|
4. 내세가 없는 세계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음부(Sheol, 스올)로 내려간다고 믿었습니다.
땅 속 깊이 위치한 음부는 어둡고 축축하고 습기가 찬 곳으로 그곳에서는 누구나 서서히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상에서의 삶에 대하여 선악간 어떤 심판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선인이나 악인 사이 구별이 없습니다. 이곳에 온 모든 사자들은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도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후 세계 개념을 가진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해 어떤 소망이나 기대도 없었고, 따라서 이들의 삶의 목표는 이 땅에서 최대한의 물질적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은 메소포타미아 자연 환경에서 기인한 것으로, 홍수나 외부 적의 침입으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사후 세계보다 당장 살고 있는 현실에 더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자세하지는 않아도, 이와 비슷한 세계관은 구약 여러 곳에서도 발견됩니다(욥 10:20-22).
구약에서 천국이나 영생 등 내세에 관한 개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이 땅에서의 축복, 즉 자식들이 많이 있으며 가축들이 많은 새끼를 낳고 또 수십배의 농작물 수확을 거두는 것을 최고의 축복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세계관.
|
내세관이 뚜렷하지 않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이 땅에서의 축복, 즉 이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더구나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가득한 환경 속에서, 내일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즉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계획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즐기는 것이 이들의 보편적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재산을 아무리 많이 쌓아 놓더라도 다 쓰지 못하고 적에게 빼앗기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재산이 탕진되면 적에게 또 빼앗으면 됩니다.
이들은 식민지를 잘 경영하여 미래에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바로 착취하고 억압하여 더 많은 조공을 짜내는 것이 이들의 최우선적인 목표였습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소망은 물론, 이 땅에서 일어날 미래의 삶도 알 수 없는 것임을 수많은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보아왔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온 이들에게 내일 일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무리들은 처음부터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잔인하게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이들의 체득된 습성이었습니다.
▲산 채로 포로의 생가죽을 벗기는 앗수르 군인들.
|
맺는 말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국가들에게도 잔인하게 대하였으며, 반란을 일으킨 국가에 대하여는 자비가 없는 잔인한 응징을 가하였습니다.
이들은 도전과 반란에 대하여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다시는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의 이러한 정책은 일시적인 효과는 거둘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거두어 더 심한 반란을 유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항복한 국가들에게도 엄청난 세금과 부역을 부과함으로써, 도저히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국가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차라리 목숨을 다해 저항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은 수시로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제국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쉴 틈 없이 벌어지는 전쟁은 심각한 국력 소모를 가져오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들의 이런 지나친 잔인함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예고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도 이들의 잔인함 때문에 ‘이스라엘의 징계 막대기’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징계 막대기’가 마치 주인이 된 것처럼 행세를 하였습니다(사 10:15, 30:31).
즉 하나님의 ‘망치’ 혹은 ‘철퇴’로 전 근동 지역을 주름잡았던 이들은 심히 교만하여져서 ’긍휼’이나 ‘자비’를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앗시리아 제국이나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그 기세에 비하여 통치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자 내부로 눈을 돌려 귀족이나 사원에도 많은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잦은 내부 반란으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제국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잔인함으로 근동 지역은 물론 애굽까지 떨게 만들었던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이 짧은 시간 안에 너무도 어이없게 무너지는 것을 역사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 붙잡혀 와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포로들.
|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
하나님의 ‘징계 막대기’ 앗수르·바벨론, 오래 못 간 이유 : 문화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
역사를 아는 만큼 성경이 보인다 (0) | 2022.12.16 |
---|---|
16세기 교회개혁에 결정적 영향 미친, 14세기 ‘이단’ 존 위클리프 (0) | 2022.05.27 |
바울이 세례 받은 뒤 갔다는 ‘아라비아’는 어디일까 (0) | 2022.05.06 |
지금 개혁교회에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개혁하는 실천 (0) | 2022.01.28 |
영국 종교개혁과 청교도 이야기 (0) | 2022.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