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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

by 김경호 진실 2022. 6. 1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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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후 3:3-8, 17-18

설교자/ 곽창대 목사

2022-06-05 한밭교회 성령강림절 설교 


곽창대 목사
◇설교 전문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은 말 그대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절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간 지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친히 보이셨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승천하면 성령님께서 곧 강림하실 것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 어느 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던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예수님께서도 약속하셨던 바로 그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들 모두는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자기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방언)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이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때가 오순절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바로 그날에 오순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든 국내외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 교회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였던 예루살렘에 주님의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은 신약의 첫 교회가 세워진 날이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교회가 확산되었습니다.

성령강림의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는 한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강림 이전의 시대에는 성령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간헐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 이후에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과 교회에 성령님께서 항상 거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성도의 심령과 교회에 내주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1:8에 따르면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와 목적은 성도와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성품과 사역 면에서 예수님을 닮는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도의 심령과 교회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이유와 목적은 성도와 교회로 하여금 주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열매는 성품의 열매와 사역의 열매입니다.

“성품의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뜻합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언급한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들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열매”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을 뜻합니다. 즉 전도와 양육의 열매입니다. 종합하면 성품의 열매와 사역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심중을 꿰뚫어보시고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네가 선한 일을 함으로써 영생을 얻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 청년은 예수님께 다시 질문합니다. “무슨 계명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의 말씀에 청년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 계명들을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게 부족함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네가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려면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듣고는 청년이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가진 재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도덕법과 제사법입니다. 대표적인 도덕법이 십계명인데 도덕법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즉 도덕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까지 사랑해야 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영생을 얻습니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복음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역으로 말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겨 죄를 지으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율법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과 심판을 선언하는 율법이 진리이지만 복음은 아닙니다. 우리를 살려야 복음(good news)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덕적 율법)을 누가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요? 이 율법의 요구는 너무나 엄중해서 어떤 인생도 온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금방 예를 든 부자 청년도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었기에 근심하며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도덕적 율법 외에 또 한 종류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은 도덕적 율법을 어긴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받게 하는 은혜의 법이었습니다.

제사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성전에 올라가 양을 잡아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는 불로 태워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제사법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속죄제였습니다. 이 속죄제의 뜻은 일 년 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난 일 년 간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저 양처럼 제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이 속죄제를 드리오니 제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제사법을 따라 믿음으로 제사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람이 도덕법을 온전히 지키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제사법은 별 힘들지 않습니다. 자기 형편에 맞게 제물을 준비하여 성전에 가지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대신 제사를 집례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제사 자리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제사법보다 지키기에 쉬운 율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법은 구약시대의 복음이었습니다.

예)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려면 수능 1등급에 내신 1등급을 받은 다음 논술과 면접시험에서도 1등급을 받아야 한다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데 모일 모시에 서울대학교 정문에 오기만 하면 서울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저 먹기입니다. 전자가 도덕법 수준이라면 후자가 제사법 수준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법도 온전한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실체가 나타나면 사라질 잠정적인 복음이었습니다. 즉 그림자였습니다. 그래서 속죄제만 해도 매년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죄 용서의 은혜도 1년만 유효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온전한 복음의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 즉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리고 죽은 흠 없는 어린양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인은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던지신 것입니다. 이로써 도덕적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하신 자기의 사랑을 자기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확증하셨습니다. “내 아들이 달린 십자가를 보아라! 그러면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뜻은 내 아들을 버려서라도 너희들을 살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드러났으며 성취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의 지식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복음이 논리적이기보다는 초 논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오랜 추적 끝에 법인을 잡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 살인자를 죽인다면 그것은 복수입니다. 법정에 보내 처벌한다면 그것은 정의입니다. 그러나 그 살인자의 사면을 호소하고 그를 여러분의 아들로 삼는다면 그것은 논리와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일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면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은혜 쪽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힘듭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머리로는 그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진리가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감사히 받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사랑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자식은 부모로부터, 상사는 부하에게서, 부하는 상사에게서, 연인들은 서로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저런 불평이 생기는 것은 여러분에게 사랑이 채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이유도 사랑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견딜 수 없습니다. 사랑이 채워지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사랑을 그처럼 갈구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에는 그렇게도 무관심할 수 있나요? 마치 하나님의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해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성경은 교만이 가장 큰 죄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절하는 교만이야말로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병이 교만입니다. 교만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근원적인 죄입니다.

이 죽음의 병에서 살아날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는지 그 한 가지를 가장 먼저 보십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생이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질문을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습니까?” 긍정적으로 답하면 종교마다 나름대로의 구원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는 다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모두 인간의 행위로,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착해야 득도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동쪽으로 오르든지 서쪽으로 오르든지 밧줄을 이용해서 오르든지 지팡이를 짚고 오르든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오르든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체력을 단련하면 더 잘 오를 수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면 구원의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산 정상에 오르는 구원이 아니라 하늘에 오르는 구원을 말합니다. 산 아래에서는 우리의 노력으로 산 정상에 오르면 하늘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산 정상에 올라와보니 자기 힘으로는 하늘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즉 인생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는 곳이 바로 산 정상입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자력으로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타 종교에서 추구하는 구원관을 초월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 즉시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강조하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뭇 인생들의 구주시며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은 지금 결단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주변의 이웃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조리 있게 소개하기 힘들면 예수영접모임에 데리고 오시면 됩니다. 우리교회는 짝수 달 첫째 주일, 낮 12시경에 예수영접모임을 갖습니다(오늘). 그 자리에 데리고 오셔서 복음을 듣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로부터 은혜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한량없는 은혜가 계속 부어집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인 새 언약의 핵심입니다.

새 언약은 영원히 변경되지 않을 약속이라는 뜻입니다(11절, 길이 있을 것). 그리고 꼭 성취되고야 말 약속을 뜻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성취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로 미루어진 성취가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성취되어가는 약속입니다. 즉 오늘 여기서 우리가 그 성취의 상당 부분을 경험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 14, 16, 18절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새 언약의 영광스러운 성취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고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언약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3절에서 새 언약을 비유로 표현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의 마음 판에 쓰인 “그리스도의 편지”가 새 언약입니다. 3절 하반절에서는 잉크로 쓴 편지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성령님)으로 쓰신 편지라고 말씀합니다. 돌비에 쓴 편지(돌 판에 새겼던 구약의 십계명으로서의 옛 언약을 일컬음)가 아니라 심비(마음 판)에 새긴 편지입니다.

6절을 보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역할을 대비합니다. 돌에 새긴 율법(옛 언약)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며 성령님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긴 새 언약은 우리를 살린다고 말씀합니다. 9절에서는 옛 언약은 사람을 정죄하지만 새 언약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돌비에 새긴 율법(옛 언약)은 온전한 행위를 요구합니다. 그 행위에 미치지 못하면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래서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사람을 살립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까지 공급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즐겁게 순종하도록 모든 은혜를 공급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인하여 성도는 주님의 임재와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18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성도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즉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닮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은혜가 주의 영(성령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핵심입니다.

새 언약에 대해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했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이 에스겔 36:26-27입니다.

(겔 36:26-27)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므로 새 언약의 핵심은 성령님(새 영, 하나님의 영)을 자기 백성들의 마음속에 두시겠다는 것이며 그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이 새롭고 부드럽게 되어서 능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새 언약의 성취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신 새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이다. 내가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낼 것인데 그 성령님께서 너희 마음에 자리 잡아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능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 될 것이다. 즉 성품의 열매와 사역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할 것이며 너희가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요 14:16-17, 26, 16:7, 13-15참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도 새 언약의 성취인 성령님의 강림을 최종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행 1:4-5, 8). 이 약속의 첫 성취가 오순절날 120여명의 제자들이 모인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행 2장). 성령님께서 그들의 모임 가운데 강림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심령 가운데 들어가 좌정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성령의 시대, 은혜 시대, 교회 시대, 새 언약이 성취되는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님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그들은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놀라운 평화가 임했습니다. 공포로부터 자유 했습니다. 모든 문들을 걸어 잠갔던 자들이 성령님을 받은 후에는 거리로 뛰쳐나가 담대하게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물질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필요하면 자기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고자 가난까지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명예와 권력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즐겁게 남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환경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안락한 가정생활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을 열어 나그네들의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 갇혔지만 거기서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혈통이나 민족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온 세계가 그들의 일터였고 모든 백성들에게 친구로 형제로 다가갔습니다.

그들은 죽음까지도 초월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핍박 받아 죽는다 해도 그들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증언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정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들도 그들을 속박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을 참 자유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사는 것이 너무나도 뿌듯했습니다. 겁쟁이였던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바뀌었나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 언약의 성취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했고 그들의 마음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새 언약의 성취가 비단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내주해계십니다.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이자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놀라운 은혜의 세계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의 말씀처럼 여러분은 마침내 주님처럼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 속에 계신 성령님과 교제하면 됩니다. 순간순간 겸손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뢰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갈 길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주님의 뜻에 순종하도록신령한지혜와능력도공급하십니다. 이것이 성도가 승리하는 첩경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흐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도 살고 이웃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즉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간구해야 할 최고의 기도제목은 우리 각자와 가정과 교회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 예수님을 떠난 부자 청년에 관해 얘기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떠나 혼자서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하고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겠습니까?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성도는 이미 승리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성령님을 한량없이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이미 우리 속에 내주해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더욱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셔서 자신도 행복할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 그 복을 나누게 하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일꾼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자기도 살고 이웃도 살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령강림절은 우리들에게 적어도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담긴 날입니다. 첫째로 성령님의 내주를 깊이 감사하는 날입니다. 한 번 우리의 마음에 내주하신 성령님은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승리하도록 끝까지 도우십니다.

둘째는 불신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결의를 다시 다지는 날입니다. 성령의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령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전도와 선교가 하나님의 가장 큰 일이요 이 지구촌에 더 많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성령님의 소원입니다. 우리도 같은 소원을 품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님으로 충만하기를 사모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내주하심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더욱 예수님을 닮게 되어 우리의 인격이 온전해지고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될 것이며 성령님으로 충만한 우리를 통해 가정과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세상도 새롭게 될 것입니다.

항상 성령님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끝) 찬송가 191장

 

◇요약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던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약속대로 강림하셨습니다. 그들 모두는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자기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습니다. 그때가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첫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성령강림의 이전과 이후 시대에는 한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강림 이전에는 성령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간헐적으로 역사하셨지만 성령강림 이후에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과 교회에 성령님께서 항상 거주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성도의 심령과 교회에 내주하시는 이유와 목적은 성도와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여 주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열매는 성품의 열매와 사역의 열매입니다. “성품의 열매”는 대표적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갈 5:22~23). “사역의 열매”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크게 도덕법과 제사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도덕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생도 이 말씀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기에 도덕적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율법을 어긴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받게 하는 은혜의 법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을 따라 믿음으로 제사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법은 구약시대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법도 온전한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속죄제를 매년 반복해서 드려야 했고 죄 용서의 은혜도 1년만 유효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온전한 복음의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던지셨습니다. 이로써 도덕적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의 지식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해하기보다는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선물을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면 “은혜”입니다. 은혜를 감사히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은혜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이 새 언약의 핵심입니다. 새 언약이란,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의 마음 판에 쓰인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3절). 옛 언약은 사람을 정죄하지만 새 언약은 사람을 의롭게 합니다(9절).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성도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닮게 됩니다(18절). 성령님을 자기 백성들의 마음속에 두셔서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고 부드럽게 하심으로 능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하십니다(겔 36:26~27).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님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물질, 명예와 권력, 환경, 혈통이나 민족, 심지어 죽음으로부터도 자유자가 되었습니다(17절). 이러한 새 언약의 성취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내주해 계십니다. 마침내 우리는 주님처럼 온전하게 될 것이며,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18절).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과 교제하면 됩니다. 매순간 겸손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뢰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갈 길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신령한 지혜와 능력도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흐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도 살고 이웃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간구해야 할 최고의 기도제목은 우리 각자와 가정과 교회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셔서 자신도 행복할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 그 복을 나누게 하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일꾼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담긴 날입니다. 첫째, 성령님의 내주를 깊이 감사하는 날입니다. 한 번 우리의 마음에 내주하신 성령님은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승리하도록 끝까지 도우십니다. 둘째, 불신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결의를 다시 다지는 날입니다. 성령의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령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님으로 충만하기를 사모하는 날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더욱 예수님을 닮게 되어 우리의 인격이 온전해지고 우리를 통해 가정과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세상도 새롭게 될 것입니다. 항상 성령님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나눔

1. 성령님께서 교회에 내주하시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2.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3. 성령강림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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