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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환란의 밤이 찾아올 때(고후 1:3~10)

고난

by 김경호 진실 2022. 8. 1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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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고후 1:10)


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어떤 사람이든 예외 없이 환경과 가족, 민족 공동체 속에 고난을 통과하게 됩니다. 때로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큰 환란과 사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양민 6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수욕을 당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1910년 경술국치는 나라를 일제에게 찬탈당하는 굴욕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식민지 백성이 돼 자주권을 상실하고 나라도 국어도 이름도 빼앗겨 버리는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 시기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큰 환란의 때였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역설은 일제 침략의 바로 그 시간에, 복음이 조선 땅에 전파되고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과 함께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뜨거운 부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한 백성은 나라를 잃는 최대의 환란을 경험하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 극한 절망을 넘어서서 희망을 갖게 했을까요? 그리고 이 큰 환란의 밤을 지나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건져 주심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후 60년 경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에 대해 말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도 바울은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환란을 만났습니다. 그는 거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큰 환란의 밤을 사도 바울은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 10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우리는 크고 작은 사망을 연습하며 궁극적인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의 위기는 ‘사망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예측하지 못한 질병을 앓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심리적인 공황 상태를 경험하기도 하고,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 우리는 사망의 그림자를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사망의 그림자들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요? 기도할 때 사망 가운데서 건져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구출의 체험을 통해서 기도의 소중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굳게 신뢰하게 됐습니다. 비록 과거의 체험이 작은 사망에서의 건져짐이었다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한 사람은 오늘 내 앞에 버티고 있는 아무리 큰 사망이라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짐의 손길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가 독립을 위해 기도한 흔적들은 역사적 사료 속에 차고 넘칩니다. 그 시절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누추한 예배당 바닥을 눈물로 적시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36년 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석양녘, 유대 민족이 바벨론으로부터 자유를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 언제까지니이까?”라고 절규하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하박국 2장 3절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자유함 속에 평화를 유지하면서 갈라진 남북한이 통일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벌써 70년 이상 분단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답답하지만 우리도 “주여! 언제까지니이까?”라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개인적으로 큰 환란의 밤을 지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안에 조용히 칩거하는 것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태함을 걷어치우고, 결코 기도를 쉬지 말길 바랍니다.

둘째로, 위로의 교제를 서로 나눠야 합니다. 

3절과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큰 환란의 밤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사람의 위로도 도움이 되겠지만 인간의 위로는 언제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위로를 경험하게 되면 기도 중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인생 마당에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반드시 고난과 함께 위로도 넘치게 하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는 교회를 통해 이런 놀라운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울며 기도했고, 교회에서 독립운동의 꿈을 꾸었고, 우리의 마을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환란 중에 위로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환란을 허락하신 이유를 발견하게 합니다.

4절 하반절의 약속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나로 고난을 겪게 하시고 또 그 고난 중에서 위로를 체험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환란을 경험해 본 사람, 역경을 겪은 사람,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체험한 사람만이 같은 고난 속에 처해 있는 이웃들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환란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나도 상처 받았지만 나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은 자들에게 그들을 치료하는 치료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교제 아닙니까? 환란의 밤에 나눌 수 있는 위로의 교제!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의 특권입니다. 큰 환란의 밤을 보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보다 더 큰 상처받은 자들에게 나아가 그들을 치료하는 치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거의 죽음에 가까운 일을 경험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럴 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그때는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그 죽음의 자리가 부활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죽음 앞에 선 그때야말로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고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일제 강점기! 나라가 망하는 큰 환란을 경험한 우리 민족에게 큰 위로가 된 찬송이 있다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일 것입니다. 처음 이 찬송의 곡은 애국가로 불렸는데, 얼마 후부터는 부흥회 최고 은혜의 찬양으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을 나라도 없고, 의지할 지도자도 없었던 그때 우리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고 주께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민족적 환란의 큰 풍랑을 만난 우리가 다만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진단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것 같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체험을 소유하고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한번 체험해 본 사람은 나중에 시험이 닥칠 경우에도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사망의 골짜기에 던져졌을 때 거기에서 자기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에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 그분이 지금 나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라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면, 그분이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도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먼 훗날에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역경과 고난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기회인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붙드심과 위로, 능력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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