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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성을 넘어서는 교회(막 12:28~34)

사랑

by 김경호 진실 2022. 10. 1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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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익 목사(벧샬롬교회)

 

깊이 있는 신앙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본질 사명 이룬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김형익 목사(벧샬롬교회)
지상의 모든 교회는 여정에 있는 미완의 교회들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끊이질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온전한 교회로 지어져 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저에게는 교회에 대한 깊은 불만족이 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갭 때문인데, 저는 이 불만족을 갈망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깊이 있는 교회’에 대한 바람이 저만의 갈망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깊이는 관계의 깊이입니다. 하나님 그리고 형제들과의 깊은 결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깊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주셨고 성령님을 통해서 경험하게 하시는 일종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과의 결속과 형제들과의 결속은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결속을 누린다면, 사람들과도 깊은 결속을 바라고 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의 깊이는 우리 자신의 영적 깊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저주거리이다”라는 인상적인 말로 1장을 시작합니다. 1978년에 이 책의 초판이 나왔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여전합니다. 90년대 중반 이메일이라는 신기술의 보급 이후,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SNS로 진화한 유행은 생각하고, 기다리고, 묵혀서 뭔가를 내놓는 일들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의 대세인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얻는 사람들은 차분히 기다릴 수 없어서, 1.5배속, 2배속으로 정보를 얻어냅니다. 이런 기술들이 가져온 역기능은 행간을 헤아려 읽을 필요가 없고 읽을 능력도 없는 피상적인 사람들로 우리를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 칩시다. 문제는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고 교회가 피상적 교회들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묵상이 없고, 깊이 읽고 깊이 들으며 깊은 결속의 관계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문화적 현상이 우리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우려되는 역기능과 악영향은 생각보다 크고도 깊습니다. 그 한 가지가 영적 거리두기입니다. 하나님과 교회, 즉 영적 가족들과의 거리두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거리두기가 나타났습니다. 영적으로 피상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대하여 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깊이가 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네 밭의 비유에서 돌밭에 뿌려진 경우가 피상적인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면(마 13:20~21), 교회에는 이런 이들이 허다합니다.

영적 거리두기는 성도의 교제와 사귐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관계가 피상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교회에 나를 정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얼마나 있습니까? 피상성이 가져온 영적 거리두기는 결국 ‘나 홀로’ 신앙의 바이러스를 교회 안에 뿌려놓았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피상적 문화는 성경 읽기와 묵상, 예배와 설교, 영적 독서, 신앙의 성화와 성숙, 성도의 교제, 교회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쳐 피상적인 교회들을 낳은 것입니다.

피상성은 단순히 시대나 문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성향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경험한 것은 수치감이었습니다. 부끄러울 것 없던 부부 사이에 숨기고 가려야 하는 일이 발생했고(창 3:7), 하나님으로부터 숨어야 하는 본능이 생겼습니다.(창 3:10)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왔습니다. 죄가 가져온 두려움과 수치감은 범죄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지닌 DNA가 되었고, 인간은 가슴 깊은 곳에서는 결속을 바라지만, 자신을 숨기고 가려야 하는 죄의 본성 아래 머물게 된 것입니다. 남이 들어올 수 없도록 자기 성을 쌓고,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도 안에서만 움직이며, 문제가 보여도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좋은 말만 하는 피상적 관계 속에서만 지내려 합니다. 이런 죄의 성향이 성령 안에서 우리가 깊은 결속의 관계로 나아가는 일을 방해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내면에 깊숙하게 자리잡은 수치심과 두려움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알리거나 보여주려고 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내가 있는 모습 그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완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는 결속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속은 죄가 초래한 결과를 뒤집고,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 안의 수치심과 두려움을 온전히 치유하고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렇게 구속은 죄의 성향인 피상성 영적 거리두기을 죽이고 하나님과의 결속과 형제들과의 결속을 회복하게 한 것입니다. 구속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찢어진 성소의 휘장 안으로,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무너진 장벽을 넘어 성령 안에서의 하나됨, 형제들과 영적 결속을 누리게 된 사람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교회이고 여러분입니다. 물론 여전히 죄의 성향과 싸우면서 이 결속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신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죄와 죄에서 비롯된 모든 부정적 감정들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한 서기관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주님은 마음, 지혜,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관계인데 이 관계는 깊은 사랑으로 맺어지는 깊은 결속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랑으로 결속된 ‘관계’입니다.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 보다 결속의 관계가 더 낫다고 대답하는 서기관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너무나 익숙해서 놀라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매일 매순간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내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했는가? 우리 교회는 진짜 사랑하는 교회인가? 그 대답은 ‘아니오’ 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회개로 나아가며, 더 깊은 결속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깊이 있는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과 깊은 사랑의 결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결코 피상적인 자리에 안주하며 만족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불만족, 더 깊은 결속을 이루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깨어져야 할 장애물은 피상적 관계들입니다. 하나님과 형제들과 더불어 점점 더 깊은 사랑의 결속으로 나아가는 신앙은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일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배와 헌금과 종교적 의무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얼마든지 위선적이고 이중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에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성장하지 않는 피상적 신앙에 머물 위험이 상존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지난 교회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사랑과 결속의 관계에 신앙이 달려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고백과 삶이 같이 가는 사람입니다. 깊이 있는 신앙을 가진 깊이 있는 성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정말 깊이 있는 신앙을 갖춘 깊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절대로 피상적인 수준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상적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깊으시며, 그 말씀도 깊고 그의 지혜와 지식은 헤아릴 수 없이 깊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깊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맺는 결속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있는 교회는 자연히 깊이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있는 교회에는 그들을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요인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심령을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입니다.(히 4:12)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각 사람의 심령에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피상성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두번째는 공동체가 경험하는 죽음과 고난의 사건들입니다.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겪게 되는 고난과 상실의 사건들은 공동체 전체를 깊이있게 만들어줍니다. 세 번째, 공동체 안에서의 깊은 사귐입니다. 그저 공통점을 가진 친한 이들 끼리의 자연적 사귐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초자연적인 만남 속에서 사귐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질 것입니다.

피상적인 세상에서 교회는 깊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고 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의 기쁨이 더 사랑하게 하는 동기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알지 못합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들은 깊이 있는 교회입니다. 얄팍하고 피상적인 세상에 존재하는 깊이 있는 교회입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 피상성을 넘어서는 교회가 될 때, 세상은 놀랄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철저한 소외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해 여기 참된 결속이 있다고, 여기 깊은 사랑으로 맺어지는 관계들이 있다고, 우리 영혼 깊은 곳을 만족시켜 주는 만남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말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 그런 교회를 세워주시기를 구합시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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