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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사귐(고후 13:13)

교회론

by 김경호 진실 2022. 10. 3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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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는 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김형익 목사(벧샬롬교회)


“영적 공동체가 아닌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극이다. 아니, 그러한 공동체에서 살면서 거기에 만족하고 그곳이 영적 공동체라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심각한 비극이다.” 래리 크랩의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런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좀 불편하더라도 교회에 대한 말씀들을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어야 교회에 대한 우리의 갈망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축도문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각각 은혜와 사랑과 교통(교제)을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주목하려 합니다. 교통하심은 헬라어로 나눔, 교제, 사귐을 의미하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 사도는 왜 성령의 감화 감동이라고 하지 않고 교통하심이라고 썼을까요? 교제, 사귐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임하는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령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영적 교제와 사귐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교회는 육적 관계 맺음으로 가득한 세상 단체나 진배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회를 세상 모든 단체나 조직과 차별화하는 본질적 요소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본래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생생한 사귐과 연합 속에서 경험되는 사랑의 관계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서로를 영화롭게 하며 존재하셨고(요 17:1;5), 이것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서로를 무한히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거룩하고 영적인 교제였습니다(잠 8:30~31). 바울 사도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교제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이루어지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던 내용에서도 드러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바울 사도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이 교회 안에서 경험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축복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너무 영광스럽고 놀라워서 말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세상에서 혈연보다 더 친밀한 하나됨을 만들어냅니다. 단지 육적 관계의 하나됨이 아니라, 온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됨입니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사랑과 사귐의 깊이, 그 동질의 교제를 누리도록 창조된 공동체입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완전한 기쁨의 사귐처럼(잠 8:30~31),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런 관계들로 맺어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고,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교회에 부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죄로 깨어진 관계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관계로 회복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너진 관계도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주님의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여기서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우시겠다는 뜻을 암시하십니다. 세상은 새로운 공동체, 새계명의 공동체인 교회를 보게 될 것입니다. 새계명은 주님께서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죄와 단절의 장벽들을 헐고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도록 성령의 은혜를 주실 것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이런 공동체는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죄인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을 쌓아서 그 누구도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세우자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거듭난 성도들에게 주신 새 본성은 형제를 깊이 사랑하고 깊이 있는 사귐을 나누는 영적 공동체를 깊이 갈망하게 됩니다. 이 갈망은 거듭난 성도의 거룩한 본능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저절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서로 연결되고 결속되며 영적 우정을 나누려면 성도들이 성령님을 따라 걸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인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또한 영적 친구들과 영적 지도자들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적 우정이라고 할 만한 관계가 있습니까? 자신의 내면으로 초청할 영적 친구가 있습니까? 내 속을 들여다보면서도 정죄나 비난 대신 나를 용납해주고 나를 더 깊은 거룩의 자리로 데려갈 수 있는 친구 말입니다. 인간은 다 죄책감과 수치심과 실망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깊은 속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판단받거나 거절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내면의 아픔과 갈등을 드러낼 때 우리는 더 깊이 결속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복음의 은혜 안에서 성숙하고 깊은 영적 우정으로 빚어져 갈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관계가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눔으로써 정서적 외로움을 달랠 친구입니까? 아니면 서로를 더 친밀하게 알아가고 만남으로써 서로를 위해서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기도해주면서 거룩함을 향해 가고자 하는 친구들입니까? 영적 우정은 나이가 비슷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함께 천로역정을 걸으며, 깊이 사랑하며 목적지를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친구입니다. 영적 친구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와 갈망들을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거룩이라는 방향을 향할 수 있게 해주는 친구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그런 영적 친구여야 하고 또 누군가는 우리에게 그런 영적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영적 친구가 있습니까?

또 하나,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가 되려면 영적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영적 지도자는 직분이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는 소위 ‘경건한 어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알고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경건한 어른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경건한 어른입니까? 경건한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까?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찾아갈 수 있는 경건한 어른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을 통해 지혜로운 조언을 제시할 뿐 아니라, 나와 함께 있으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지도자들이 우리는 필요합니다. 세월과 함께 벧샬롬교회는 이런 경건한 어른들의 존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현재와 장래의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져가는 은혜를 주께서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바로 이런 영적 우정의 관계들과 경건한 어른들의 영적 지도를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는 한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기에, 몇 가지 적용적 교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수고해야 하고 그 결과가 신속하게 드러나지 않거나, 도리어 수고한 자리에서 쓰디쓴 경험을 하게 되더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갈 6:9) 그 인내로써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의 영적 친구와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가는 중임을 기억하십시오.

둘째, 인내하면서 여러분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시간은 기도의 시간입니다. 기도는 깊이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우리 과업이 아니라 주님의 일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인내하는 동안, 깊이 있는 영적 공동체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갈망은 깊이 있는 교회에 대한 기도로 이어질 것입니다.

셋째, 위험을 무릅쓰십시오. 형제들이 여러분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십시오. 때로는 이것이 상처로 돌아올 수도 있기에, 위험을 무릅쓰시라는 겁니다. 가족들은 상처들을 통해, 상처들을 치유 받으며 정말 가족이 되어갑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엡 2:19) 교회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동체입니다. “상처 좀 받아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상처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지고 성령 안에서 연결된 관계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위험을 무릅쓰되, 내면의 성문을 열어 형제를 초청하고, 나아가 성벽 자체를 헐어버리십시오.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끝으로 거룩을 추구하십시오. 래리 크랩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선택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거룩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거룩을 넘어, 교회의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거룩 만큼이나, 여러분의 형제들을 거룩의 길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렇게 성령의 교통하심이 충만한 교회가 되도록 교회를 축복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교회를 진지하게 여기십시오. 나 혼자 은혜 받고 신앙이 성장하면 된다는 생각을 거두십시오. 개인주의가 진리로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가 자녀들의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개인주의의 정신을 깨뜨리기 충분한 깊이 있는 공동체를 경험하고 맛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세대에게 깊이 있는 교회를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깊이 있는 교회를 세우려는 갈망으로, 함께 수고하며 주의 은혜를 구합시다. 언젠가 깊은 회심과 깊은 성화와 깊은 교제가 있는 깊이 있는 교회를 보게 되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런 교회에서 행복하게 주님을 섬길 날을 바라봅시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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