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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꿈이 있습니다(마 13:31~32)

소망

by 김경호 진실 2022. 11. 7. 09:30

본문

작은 자를 크게 사용해 이웃 복되게 하실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이경구 목사(나눔과섬김의교회)


지금 한국교회는 비전을 가진 사람, 꿈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시대가 캄캄하고 어두울수록 꿈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둡고 캄캄한 긴 터널을 한국교회는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때 꿈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꿈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시대를 바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인류 역사의 미래를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먼저 비전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중의 한 토막,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었습니다. 그 겨자씨는 자라나서 풀이 됩니다. 모든 풀보다 커집니다. 큰 가지를 내어서 새들이 와서 그 큰 가지에 둥지를 짓습니다. 이 나무는 새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새들이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아름다운 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겨자씨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의 꿈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고 싶었던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시대의 비전을 가진 자가 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제자로 오늘 이 시대에 부르셨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꿈을 갖고 계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실까요?

첫째,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31~32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상황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19사태로 인해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 굉장히 큰 기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최고로 잘 나가는 사람이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수퍼스타였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세례요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각처에서, 각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굉장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내 뒤에 나타날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도대체 이 위대한 수퍼스타 세례요한이 누구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한 후에 역사의 무대 뒤로 서서히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따르던 사람까지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 큰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 다녀봐야 별로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몇 건의 작은 기적을 행하기는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도리어 대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패배주의와 비관론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예수께서 하신 이야기가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지만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작다는 현실 때문에 절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장할 것입니다. 자랄 것입니다.

둘째, 미래의 가능성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 32절입니다. 작은 것으로 크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단순히 작은 것의 중요성만을 가르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겨자씨보다 더 작은 다른 도구를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굳이 겨자씨를 선택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겨자씨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겨자씨가 자랄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비밀은 바로 생명력입니다. 그래서 자라납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눈에 겨우 띌까 말까 한 작은 것입니다.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의 겨자씨는 크기가 직경이 1mm입니다. 무게가 1mg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겨자씨는 상당히 작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겨자씨는 자라납니다. 평균 키가 1.5m까지 자라납니다. 어떤 겨자씨는 종자에 따라 3m 이상도 자란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력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통해서 복음의 생명력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생명력이 대단합니다.
그런가 하면 중요한 교훈이 또 있습니다. 겨자씨를 심어서 자라면 크게 성장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무가 되는 것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것은 겨자 풀입니다. 들에 널려있는 잡초입니다. 볼품없는 잡초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13장 18~19절 말씀을 보십시오. 19절에 보시면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채소밭에 겨자씨를 갖다 심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채소밭은 헬라어 ‘케포스’입니다. 케포스를 그냥 ‘채소밭’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케포스가 가리키고 있는 독특한 의미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본래 이 케포스는 나무나 꽃이나 풀이 있는 집 근처의 ‘정원’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 겨자씨가 뿌려진 장소 ‘케포스’는 마태의 표현에 나오는 일반적으로 곡물을 심기 위하여 집에서 떨어져 있는 ‘밭’이나 ‘농장’을 가리키는 ‘아그로스’에 비해 더욱 인간의 삶에 밀착되어 매일 생활 가운데 접하는 곳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나라의 주인되신 하나님과 매일 교류하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볼품없는 잡초를 자기 집 정원에 갖다 심어 애지중지 가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겨자 풀은 정원에 갖다 심을 만큼 보기에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향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원수로 전혀 맞지 않는 그야말로 잡초 중의 잡초입니다. 정원을 꾸미는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이 잡초입니다. 잡초는 정원에 심을 것이 아니라 뽑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잡초의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시던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은 2월이 되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잡초처럼 피는 겨자 풀을 너무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잡초의 씨앗을 자기 정원에 심어서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당시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갈릴리 사람들과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말로는 표현 못 할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갈릴리 주민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이방의 갈릴리”라고 멸시받는 잡초처럼 눌려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잡초의 씨앗을 자기 정원에 심어서 큰 나무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바로 이 잡초와 같은 자들임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들이 수많은 새들이 깃드는 인류의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가 바로 잡초가 거목이 되는 역사였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잡초에서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으로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들이나 각종 소외된 사람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잡초와 같은 인생들에게 찾아가셔서 큰 나무와 같은 존재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성장이 이웃들에게 복이 되어야 합니다.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지금은 비록 작지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자라날 것입니다.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재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의 성장이 이웃들에게 반드시 복이 될 것입니다. 이 고통의 시기를 뛰어넘어 이웃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웃들에게 축복을 나누어 주는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웃들에게 축복을 나누어 주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겨자씨와 같은 작은 인생이 성장하여 울창한 나무가 될 때, 가지를 펼칠 때 새들은 날아오는 일들이 펼쳐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독교의 성공관이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성공관과 기독교의 성공관이 어떻게 다릅니까? 세속적인 성공관은 내가 열심히 살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공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잘 되면, 그 복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성공관입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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