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영원히 기억해야 할 우리의 정체성(신 24:17~22)

겸손

by 김경호 진실 2022. 12. 12. 09:37

본문

하나님 인류 구속 역사 분명히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갑시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신 24:18)


김철수 목사(GMS 순회선교사)


성경은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방향을 틀어야만 사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은 인류 현주소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을 왜 선택하셔서 인류를 구속(redemption)하시게 됐는지 그 이유와 진행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성경은 인간이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야 살 수 있는지, 그 원초적 방향성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 전반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불행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사망으로 끝난다는 엄연한 실존적 진실입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이 철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의 불행과 죽음이라는 현실만큼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일은 없기에 결코 현학적 타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생의 숙제입니다. 특별히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음과 삶의 이슈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생명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저 일상의 당연한 일로 여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코로나를 비롯해서 복잡한 현실들이 우리 사회를 암울하게 만들고 우리 주변에서 슬프고 아픈 현실들을 함께 겪으면서, 자칫 잘못하면 세상이 주는 거짓 영광과 기복적인 소망에 빠지기가 쉽기에,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경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들이 신화가 아니라면 복잡한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감격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의 가슴에 다가와야 할 터인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딘가 고장이 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말씀을 거울로 삼고 그 앞에 우리 스스로를 비춰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하는 성경은 인간의 호기심을 다 채워줄 만큼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꼭 알아야 할 삶과 죽음의 비밀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은 매우 짧게 응축된 방식으로 인간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 역사 속에 개입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당신의 선교를 시작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하신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첫 인류의 조상이 죄의 나락으로 떨어진 뒤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을 때에,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이후 하나님이 물으신 첫 번째 질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어디 있는지 질문하며 그 첫 부분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할 아담과 하와가 이제 하나님 밖에 있게 됐고,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인 인류 모두에게 하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들어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누구며, 지금은 어디 있느냐?”

아담은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하나님을 떠나게 되자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시각과 느낌은 너무 황당한 것들이었습니다. 선하게 창조한 모든 것을 다 주시고 맡긴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기 시작했고 스스로 ‘벗었다’는 느낌으로 수치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은 이렇게 인류의 유전자 속에 흘러들어 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생들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고, 인간들을 당신께로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아담의 타락 후 바로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적 선교는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진행됐고, 그렇게 이스라엘은 탄생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타락한 인류의 상징적 대표지만 또 동시에 하나님의 선교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구속을 성취했고, 승천하신 이후 신약적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이스라엘이 가졌던 구약의 선교 사명을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라고 부르면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것(출 19:6)과 동일한 자기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하시고 명하신 말씀들을 새겨들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 존재이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오늘 신명기 24장 17~22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돌아보려 합니다. 이스라엘과 우리는 인종과 문화와 역사적 배경이 다르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많은 면이 흡사합니다. 사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인류의 다른 민족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세대를 거듭하면서 애굽의 종살이를 했듯이, 다른 민족들도 나름대로 어딘가 누구에겐가 묶여 산 역사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섬기면서 아프리카의 역사를 돌아보면 아프리카의 많은 민족들이야말로 이스라엘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후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까지, 즉 출애굽한 때까지를 430년(갈 3:17)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나그네 생활을 마친 뒤 애굽에 정착은 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서신서들과 복음서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영적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즉,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입니다. 그러기에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와 삶은 주변의 이방 민족들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 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규범은-즉 모세를 통해 받게 된 소위 ‘율법’에 기록된 언약적인 삶은-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그분을 증거하고 참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즉, 주변의 이방과는 구별된 삶, 소위 ‘거룩’이라는 말로 특징되는 그런 삶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가였습니다. 그들은 나그네였고 노예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 구원의 사실을 그들은 언제나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됐습니다. 옛날이야기로, 혹은 간증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늘을 사는 삶의 이유이며 동기가 되는 기억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진실로 겸허한 삶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형통할 때에도 애굽인들처럼 제국주의적인 자세를 갖거나 갑질을 하는 거만하고 오만한 삶이 아니라, 언제나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이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늘 긍휼히 여기는 삶이어야 했습니다. 민족이나 문화의 경계를 넘어 자신과 같이 동일하게 연약한 인간들을 돌아볼 수 있는, 그 당시 이방 민족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초민족적으로 긍휼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이 어디서 왔고 어떤 삶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항상 기억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무리 번성하고 세상을 다 가졌다 해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민족답게, 본인들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됐습니다. 그래야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역사서나 선지서에서 볼 수 있듯이 불행히도 과거를 잊은 그들의 모습은 참담했습니다. 자신들이 나그네였으며 애굽에서는 종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곧 거기서 불러내어 주신 하나님을 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의 급성장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20세기에 식민 지배를 받았던 민족 중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까지 이렇게 성장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교회들도 20세기 부흥의 신화를 쓸 만큼 놀라운 성장을 했습니다. 선교사 파송도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인구 비례로 본다면 아마 세계 1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서 모든 것이 멈추고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들과 해외 선교도 많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어서 팬데믹이 끝나고 ‘돌아가기’ 혹은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회복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것은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돌아가고 회복할 무엇이 분명히 있습니까? 아니면 성장인지 거품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그 어떤 가시적인 힘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우리의 구원과 구속의 감격스런 과거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 겸비하고 있나요? 혹시 정말 기억해야 할 그 가슴 벅찬 과거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요? 과연 우리는 주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 그분의 도구로 바른 길을 가고 있나요? 포스트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맞으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허하게 우리를 깊이 돌아봤으면 합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