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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의미 앞에 다시 서 보기(마 1:21)

기독론

by 김경호 진실 2022. 12. 1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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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계절에 ‘예수’란 놀라운 능력의 이름을 묵상합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김철수 목사(GMS 순회선교사)

 

성탄절은 매년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어떨 때는 교회보다 세상이 먼저 들뜨는 모습을 보면서 성탄절이 다가옴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여주는 성탄절은 성경의 그 성탄과는 매우 다른 그림을 그려 줍니다. 흥겨운 캐럴과 함께 겨울이 주는 낭만에 빠져들며 어린아이들은 산타클로스부터 먼저 연상합니다.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고도 빠르게, 모든 성스러운 절기조차 세속화되는 모습을 오늘도 우리는 쉽게 봅니다. 하지만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세상이 아는 것과는 다르게 성탄절의 기쁨을 누려 왔고 또 계속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담겨 있는 그 의미 때문에 성탄의 절기는 다시 한 번 더 진지하게 자신의 존재 의미와 삶의 목적을 돌아보는 시간이 돼야 합니다. 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는가를 곱씹고 다시 들여다보면서, 그 엄청난 사실과 진실 앞에 감사와 감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탄절에 똑같은 이름 ‘예수’를 들먹이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그 예수님이 우리 가슴을 채워주고 계심으로 인한 감격으로 벅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상은 단지 경쟁과 이기심으로만 가득 찬 두려운 곳이 아니라 확실한 진리 안에 있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안타까운 마음과 긍휼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성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을 향해 긍휼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매번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그저 전도용이나 성탄절 행사용의 얇은 지식으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폐부 속에 깊이 들어와서 가슴을 먹먹하고 감격스레 만드는 그 어떤 능력으로 지속돼야 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그때보다도 더한 감사와 감격이 계속 우리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특별히 성탄의 계절에 주님의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더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성탄’ 즉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그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이유와 뜻은 오늘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라는 이름에 아주 명백히 잘 나와 있습니다. 성자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 나사렛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그 예수라는 청년이 그리스도, 곧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 스토리는 우리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 깊은 의미는 이 짧은 설교가 제대로 다 제시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입니다. 오늘은 그 핵심 부분만 한 번 더 돌아보면서 주님의 성육신 사건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그분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역사적 사건은 하나의 종교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적 사건이며 개개인의 삶의 의미와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사건이며, 세상을 지금까지 지탱해 준 진정한 소망의 사건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인문학은 예수의 의미를 상징적인 그 어떤 것으로 미화해 왔습니다. 예수의 탄생에서 보여주는 그 겸손함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에서 보이는 비폭력적이며 무저항적인 모습들을 통해 정치적인 평화나 만민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등을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1세기 초에 그분이 행하시고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한한 가치와 교훈들을 마치 보화를 캐듯이 발견하며 더욱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선하고 의로운 삶을 결단하게 됩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의 의미를 이러한 사회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덕목으로만 해석할 때에는 자칫 잘못하면 예수 탄생의 의도와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오는 예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즉, 21절에 나오는 두 단어, ‘죄’와 ‘구원’입니다. 교회에서 항상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미 식상했을지도 모르는 단어들입니다. 수년 동안, 아니 수십 년 동안 들어서 너무도 익숙하기에 지루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회 도덕적인 해석이 더 매력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여러 방면에서 사회적으로 예민한 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은 ‘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라는 말 역시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너무 가볍게 사용하다 보니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는 데에 쓰는 말이 되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가 깊은 서구 사회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교회, 죄, 구원 등의 단어는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표현하고 공격하는 데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이 원래 가르치는 ‘죄’의 의미와 예수가 오신 이유인 ‘구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러한 공격과 많은 기독교인들의 무감각은 또 우리로 하여금 죄와 구원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더 돌아보도록 도전해 줍니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그저 ‘잘못’한 그 어떤 행위들이나 부정한 생각들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과 지금까지 힘겹게 끊임없이 싸워 오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저지른 잘못들은, 개인의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히틀러의 종족 말살과 같이 극악한 것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계속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이해는 원죄와 자범죄 등 교리문답에서 배우는 설명으로는 도저히 그 심각성을 가늠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입니다. 이 죄는 인류의 타락과 함께 찾아온 엄청나게 악한 힘입니다. 인류의 조상을 통해 시작되고 전가된 죄라고 하는 그 악한 힘은 인류의 영혼의 자리에 버젓이 똬리를 틀고, 인간의 삶의 방향을 죽음이라고 하는, 창조주 하나님과는 완전히 분리된 쪽으로 몰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죄는 단순히 인간들이 범한 잘못들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엄청난 악의 힘이며, 인간 개개인과 온 인류를 아프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원인자입니다. 그 죄를 자신도 모르게 품고 살기에 그러한 존재인 인간을 우리는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회법이나 형법으로 규정하는 죄인 혹은 범죄자와는 근본적으로 그 원래 의미가 다릅니다. 21절에서 말하는 죄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의 죄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뒤 자기 자리를 상실한 인류의 모습, 즉 참 하나님 여호와와 분리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그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 곧 죄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바로 이 죄성, 혹은 ‘죄’라고 부르는 악한 힘의 지배에서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그 상태에서 평생 불행하게 살도록 우리를 붙들고 있는 그 악한 힘인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죄사함’은 세상에서 사회적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용서 개념과는 그 차원이 너무도 다릅니다. 죄란 죄성이 계속해서 생산해 내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빚’을 누군가가 대신 갚아 주어야만 풀려날 수 있는 속박입니다. 그런데 그 빚은 죄와 전혀 무관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야만 갚을 수 있을 만큼의 양과 독성을 가진 것입니다. 이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회복된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감히 그리고 자신감 있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담대히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듯이 우리 이웃을, 타인들을, 인종이나 문화나 종교를 뛰어넘어, 사랑하려 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해 주신 우리 주변의 자연환경을 다시 책임감 있게 바라보며 주님 오실 때까지 지키고 보호하고자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탄생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신이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종교들은 묻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신이 인간으로 오셔야 했음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그 ‘죄’의 개념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종교들이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에 답을 줍니다. 선악의 개념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불행의 원인인 죄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고서 구원이란 종교들이 추구하는 이상일 뿐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 이름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당연시 여기며 무감각하게 사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 매년 드리는 감사 예배와 축하 행사도 매너리즘으로 끝나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의 뜻을 더 짚어보고 이번 성탄의 계절에는 그 이름 앞에 더 진지하고 결단하는 마음으로 서야 하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 주는 마법과도 같은 그런 종류의 능력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우리를 죄와 절망에서 건져내어, 도전 많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느끼며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있는, 그래서 삶을 더욱 진지하게 살게 해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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