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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의 화평(엡 2:14)

기독론

by 김경호 진실 2023. 2. 1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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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화평’ 예수처럼 교회는 온전한 화평 이뤄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박윤만 목사(대신대 신약학 교수·신학대학원 원장)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 2:14) 이 평화 선언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낱말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화평의 범위를 알려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사이’에 화평을 이뤄내시는 분이라는 말을 바울은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사람이 모여 ‘우리’가 되면 그곳엔 어김없이 틈이 생겨 담이 만들어져 온 것이 인간 사회의 현실입니다. 신분이나 피부색 그리고 성별과 같은 생득적 조건을 바탕으로 ‘우리’ 안에 담을 세우고 담 너머 사람을 ‘남’으로 보아온 것이 인류 역사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작금의 한국 사회는 세대별로 ‘무슨 세대’라 부르며 상호 이질감이 세대 사이로 확장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적으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의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기도 합니다.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경제적 군사적 차이가 곧잘 침략과 약탈로 이어진 세계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사는 다양한 담이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에 세워져 한쪽은 우월하고 다른 한쪽은 열등하고, 한쪽은 지배하고 다른 쪽은 지배당하는 악한 시스템을 정당화 해왔습니다. 이런 담이 어찌 과거 역사이기만 하겠습니까. 21세기에도 그 담이 무너지기는커녕 더욱더 견고해져 사람을 곤궁에 빠지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무분별한 자연개발 피해는 가난한 나라의 몫이 되고 있으며 2022년 봄에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나 미얀마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 등은 사람은 결코 평화로운 ‘우리’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절망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라는 선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된 교회에 주신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화평 선포는 그리스도가 우리(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놓인 담을 무너뜨리시어 (비록 획일화는 아니더라도) 공생 공존하며 살 수 있는 이유가 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기 교회에게 이 선언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능력의 말씀이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먼저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의 언어적 배경에 대한 지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지만 행정이나 법정 용어로 사용됐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국 전체에서는 그리스어가 공용 언어(lingua franca)로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 언어는 문화적 가치를 함의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일등 시민으로 보고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을 야만인이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언어와 인종에 따라 사람을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차별하던 사회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어가 1세기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였던 때에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아람어로 대화했고 예수님도 아람어로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서의 예수님은 그리스어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람어로 말씀하셨다면서, 왜 아람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사용하시는 예수님이 나올까요. 오늘 우리 시대의 전망에서 본다면, 예수님을 보다 더 잘 알려면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들립니다. 그럼에도 복음서의 예수님은 아람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를 읽고 들을 사람이 아람어를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서의 청자들이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됐고 복음서의 예수님은 그리스어로 말씀하시도록 그 언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만난 사람은 대부분이 유대인이라 아람어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복음이 여러 민족으로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리스어만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주로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저자에게 선택지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아람어로 기록하고 이방 청자는 예수님의 언어를 배워 예수님의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의 모국어(아람어) 대신 듣는 사람의 언어(그리스어)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그리스어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며 꾸짖으시고 치료하시며 기도하십니다. 교회는 듣는 사람의 언어로 예수님이 말씀하도록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언어의 변화는 ‘언어의 성육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로고스)이 육신(사륵스)이 되신 하나님은 언어까지 듣는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셨다는 것이 복음서에서 ‘그리스어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읽다보면 반전이 일어납니다. 마가복음은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을 위해 기록됐기에 청자는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언어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그리스어를 사용하시자 그들은 ‘예수도 야만인이 아니라 우리처럼 일등시민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청자와 독자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지금까지 그리스어로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야만어인 아람어로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막 5:24)하시고 또 “에바다”(열려라, 7:34) 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람어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순간 ‘문명인 예수’를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당황하며, 당시 언어와 인종이라는 담을 가져와, ‘예수도 야만인이었구나’라고 판단했을 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었던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에게 “달리다굼”하셨고, 귀먹고 말을 더듬던 사람에게 “에바다”하시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만인’ 예수님이 야만어로 “달리다굼” 하시자 듣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미 죽어 들을 능력이 사라져버린 열두 살 난 소녀가 살아나고, “에바다” 하시자 듣는 데 장애를 가진 사람의 귀가 열려 듣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순간 중요해진 것은 ‘야만어’도 살리는 능력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현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그들이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누가 그 말을 할 때 그 같은 일이 일어났는가’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 아이가 살아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닫혔던 귀가 열리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 순간 언어와 인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문화가 예수님 안에서 무너집니다. 오랫동안 사람을 나누고 차별하던 그리스-로마 사회의 다양한 ‘담’이 예수님을 만나자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인종으로 사람을 차별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주로 믿고 난 다음에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만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 다 한 가족으로 교회 안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2:27~29)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이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타고난 조건이나 개인과 국가의 성취 정도를 근거로 우월의식이나 열등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태생적 조건이나, 후천적 업적이나 동일 직업이나 성별로 모인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엡 2:8)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몸의 지체가 된 것은 하나님에게서 거저 받은 은혜(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과 구원 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태생적 조건과 후천적으로 성취한 업적이나 조건으로 인한 분리와 나뉨이 원칙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만든 새사람, 새 창조의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 바울은 다시 골로새서 3장 11절에서 웅변적으로 말합니다. “새사람에게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선물인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에만 의지하여 세워지고 유지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는 곳에서는 인간의 어떤 조건이 성취에 기초한 담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에서는 생득적 조건이나 후천적 조건으로 서로 배제하고 분리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적’ 담이 교회에도 세워지거나 조금씩 그 높이가 더해지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성찰해봐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세워진 곳인 까닭에 ‘인간적 냄새’가 원칙적으로 스며들어올 수 없습니다. 더불어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라는 고백이 교회 안에서의 현실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고 피조물이라 여기며 존중합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라는 선포가 교회 담장 밖으로는 뻗어 나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로 믿고 충성하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말입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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