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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가는 선교(고전 10:31~33)

선교

by 김경호 진실 2022. 12. 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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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영광위해 산다는 것은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1, 33)


김철수 목사(GMS 순회선교사)


올해도 마지막 달이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보통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를 돌아보도록 비춰 주는 거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저는 오늘 신약성경의 고린도전서 10장 31~33절의 말씀 앞에 서보려 합니다.

우선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잘 알듯이, 당시 이방의 종교와 문화 배경에서 온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장하는 가운데 꼭 가져야 할 관점과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 종교에 드려진 제물들을 먹느냐 마냐 하는 논쟁이 있었는데, 바울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가치 측정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31절의 말씀에 응축돼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씀을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에 연결해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좀 이르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삶의 우선 원칙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우리가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부사구부터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히 경험할 수 없는 완벽한 선(善)이시고 의(義)의 존재이시며 어둠이 하나도 없는 빛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완벽한 속성과 성품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숙어로 표현했습니다. 어두움을 갖고 사는 죄인이 감당할 수 없는 완벽한 빛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들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이러한 하나님을 만난 이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삶의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그전에 염려하며 구하고 찾았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는 바로 하나님을 먼저 구하기 시작했습니다.(마 6:33 참고)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이 존재하는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며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3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것을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부연 설명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이타적인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타적인 삶은 무신론자들이나 타 종교인들에게서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타적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타적인 삶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어야 함을 바울은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가 처해 있던 초대교회의 정황을 고려했을 때,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단연코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타인을 진정 배려하고 존중해 그들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은 결코 범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확신하는 가치와 그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단순히 남이 원하는 것을 다 해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에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한 진지한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꼭 ‘사역’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일상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바울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인종과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복음으로 다가갔습니다. 주변 이웃들의 삶의 안팎을 살피고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긍휼과 환대와 온정으로 그들과 소통하면서, 저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모든 초점을 다 맞췄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강조와 그의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말씀하신대로,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증거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신 그 인간들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이 이 사랑의 계명을 어떻게 실천했는지는 고린도전서 9장 16~23절에서 진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알듯이 복음을 위해 이타적으로 평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자신의 구주이시며 스승이신 주님처럼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자랑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영적 이기심이 없고 이타적이었음을 방증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얻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됐습니다. 역사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교적 이기심과는 거리가 먼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면서 오직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고 사람들에게 깊이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그 덕분에 사도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시기하고 공격하는 많은 이들로 인해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약 3년간의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저는 스스로 많은 것들을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또 지난 반세기의 선교 사역들을 살피고 분석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 역사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의 삶과 사역도 보여주지만 또 아쉬운 부분도 정직하게 드러내 줍니다. 수많은 사역들이 수행됐지만 정작 ‘사람이 빠진’ 선교 활동들도 있었습니다. 비록 동기는 속히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에 기인했지만, 효과와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사람을 얻고자 시작했던 일이 주님이 보시는 ‘사람’이라는 성경적 가치는 빠지고 사람들의 숫자와 자기 자신들의 성취 기록들만 난무하고 만 경우도 꽤 많았습니다. 오랜 기간의 선교 사역을 접고 본국으로 돌아가 선교를 가르치며 목회도 했던 레슬리 뉴비긴과 같은 20세기 중반과 그 이후의 서구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글들을 보면, 그들의 선교학은 그야말로 ‘반성학’이라 부를 수 있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사람에게 깊이 다가가기보다는 사역자 본인들이 추구하는 것에 더 열심을 내었고, 또 많은 경우에 문화적 우월감과 영적 이기심에 기인한 것이 많았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서서히 밀려 들어온 세속주의에 잠식돼가는 본국의 기독교인들을 만나면서 많은 서구 선교학자들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서구 교회들을 무겁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서구 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갖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나요? 아니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나 레위인들처럼, 본인들의 종교적 의무나 자신들의 지위를 우선시해 강도 만난 사람들을 지나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에게도 ‘사람’이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제가 종종 역설적으로 사용하는, 너무도 당연한 말인 “선교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라는 표현은 곱씹을수록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숙어입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개인이나 집단의 경쟁과 성과주의로 점철된 시대를 살면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치 공기를 매일 마시며 살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회심한 이래 줄곧 복음으로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서신서들 전체 맥락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진정 사람의 깊은 곳까지 복음으로 들어가고자 애썼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사도로서 그가 이룬 많은 사역에서도 보이지만, 이보다도 주님을 평생 본받아 살고자 씨름했던 그의 삶의 질과 내용에서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아버지의 가슴으로 사람을 보고 긍휼히 여기며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고전 9:22) 되려고 몸부림쳤던 영적 리더였습니다. 그의 서신서들은 모두 이러한 그의 사람들을 향한 열정의 결과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주님의 가슴으로 다가가고 있나 자문해 봅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주님 앞에 정직하고 겸허히 한 번 더 이 부분을 돌아봅시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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