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열린예배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에서 정립하라

신비주의

by 김경호 진실 2023. 7. 20. 09:07

본문

열린예배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에서 정립하라
 
  1장. 서 론 1. 연구의 동기와 목적
한국 교회의 성장은 이미 세계 교회에 알려진 대로 급성장되었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일 것이며 좋은 현상이다. 특히 7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 국가적으로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와 더불어 교계 한 쪽에서는 축복 개념의 팽창이 일어났다. 즉 예수 믿고 병 낫고 사업 잘 되고 돈 번다는 의식이 강하게 들어와서 너나 할 것 없이 교회로 몰려오는 교회 팽창 현상까지 일으킨 것이다. 거기다가 실천 신학 이론으로 교회 성장학이 생겨서 학문적으로 성장을 뒷받침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그런 저런 이유들로 해서 70 년대와 80 년대에 교회 성장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좋다. 성장이 나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 목회 풍토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갔으니―성장 위주의 목회―문제이다. 그것도 양적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교역자를 위한 세미나나 강의의 대부분이 교회 성장을 위한 △△ 을 통한 교회 성장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목회 성공의 비결. 등등의 이름을 달고있다. 목회자들은 그 비결들을 전수 받아 목회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어느 목회 현장의 사례가 나의 목회 현장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요즘은 너무나 목회 방향이 갈팡질팡이다. 성경공부 또는 △△훈련. ××찬양 모임이 어느 교회에서 잘 되어 교회 성장을 했다고 하면 아무 여과 없이 너도 나도 받아들여 실시 한다.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성장이 목회의 최우선 과제가 될 수 없다. 항상 바로 하는가를 염두에 두고 결과적인 양적 성장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어느 목사의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이 오늘 목회 현장에도 있기에 서글퍼 진다. 또 성장을 위해 양 도둑질.까지 한다고 하니 슬픈 일이다. 그기에다 최군에 미국에서 불어 닥친 열린예배의 붐은 또 다른 문제점들을 낳고 있다.   사실 예배의 문제는 예배자의 문제이지 예배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다. 예배 드린 후에 교회 밖으로 나가 사업과 직장 생활. 가정에서는 신앙과 관계 없는 생활을 한다.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마저 팽개쳐 버린 채 살아가는 그런 신앙인도 많다.
  오늘의 교회 위기는 강단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목회자는 늘 가지고 있다. 목회자가 받는 유혹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이 원하는 설교를 할 것인가. 아나면 교인들이 들어야 하는 설교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예배를 두릴 것이냐를 교인드로 고르게 해서는 안된다. Ⅱ. 개혁주의적 예배의 성경적 신학적 근거
개혁주의적 예배는 성경적이며 또한 신학적이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배와 안식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정해주셨으므로 그 자신의 계시된 뜻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지시에 따라 어떤 가견적인 구상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규정되어있지 않는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성경적 계시에 따라서 예배의 범위와 방법을 한정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수성과 그리스도의 중보적 유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배는 두 개의 맞물려 있는 축과 같기 때문에 예배가 혼탁해지면 기독교도 혼란스러워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께 최상의 가칠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시편 기자의 말에서 보듯이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시29:2) 따라서 "예배는 생명있는 종교가 가지는 유일하고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최근에도 새로운 예배의 문화와 프로그램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그 중 최근에는 토론트의 축복이라고 하는 열광적인 예배의 붐이 일더니 최근에는 열린 예배라는 미국식 복합적 예배프로그램이 곳곳에서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는 추세이다. 대개의 경우가 그러했지만 이러한 유행은 또 얼마가지 않아 또 다른 예배 프로그램으로 대치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1)구약에서의 예배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히브리인의 예배는 "희생제사"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에 규정된 대로 양 한 마리 혹은 황소 한 마리를 정해진 예물로서 지정된 장소에 가지고 갔다.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지하는 그림자였다. 유월절에는 많는 경배자들이 성전에 동물을 가지고 가서 목을 따게 된다. 동물을 죽임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드리는 것이다. 목을 딴 동물들의 피는 은그룻이나 금그룻에 받았다. 그리고 이것을 제단에 붓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유월절이 되면 25만마리의 양들이 죽는다고 했다. 곳곳마다동물의 피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물을 죽이고 피를 뿌린 다음 그것을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것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동물 시체를 막대기로 찍어서불에 태우는것이었다. 구약의 이 모든 예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끝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희생은 필요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와 모든사람을 위한 중요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양이었다. 신약은 지금도 우리몸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 드려야하는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산몸인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희생제사에 의한 예배와 "영적"인 예배를 함께 놓는다고 하여 모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의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에서 사용되는 예배라는 용어들을 살필 때 더욱 드러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 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신약에서의 예배
예배는 굉장히 귀중한 것이다. 이것이 예배의 본성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귀중한 것을 아낌없이 드리게 될 때 많은 비난들이 우리에게 오게 된다.
  우리는 종종 어떤 형식 때문에 본질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히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의미 있다고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도전하는 말씀이 바로이 말씀이다. 여러가지 비난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배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것을 깨뜨리는사건이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한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하는 성경 말씀대로 옥합을 깨뜨리기 전에 마음을 주님앞에 드리는 것이다.
  참된 예배는 내마음을 깨뜨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자존심을 깨뜨려야한다. 우리 속에 있는 여러가지 본성들을 깨뜨려야하는 것이다. 내 자신이 만족하고 있는 것을 깨뜨려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신이 모든 의지를 완전히 깨뜨려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통회한다'는 것은 눈물을 흘리며, 내마음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심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2)개혁주의적 신학에서의 예배
영어에 있어서 "Worship"이다. Worship은 본래 앵글로 색슨어의 "weorthscipe"에서 유래 했는데,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 (ship)이라는 말의 뜻을 가진 합성어로서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을 좀 더 구체화시키면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to ascribe to Him supreme worth)이란 뜻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에배에 있어서도 예배자는 예배 가운데서 생각되어져야 할 신학적인 초점들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이고 유약하며 예배가 없는 신학은 냉랭하고 그 자체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건전한 신학은 예배의 교정자로서, 참 예배는 신학의 원동력으로서 이바지 하게 된다. 실제로 예배는 하나님과 의식적으로 사귀는 경험이고, 신학은 그 경험의 뜻을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이다.
  예배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제공되고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께 응답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예배는 우리 인간들의 목적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서 부터 시작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그 다음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며 어떤 사물도 아니다. 예배는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항상 예배에 있어서 알파(alpha)이며 오메가(omega)가 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더불어 교제할 사람을 창조함으로써 예배에 솔선하셨으며 존재의 근거로서 생명의 원천이며 보존자가 되신다. 그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사람과 만나고 또한 사람을 심판하시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사람이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과 사랑을 새롭게 들어내셔서 사람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예배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배는 기독론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은 완전한 예배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서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 의식 (Christion cult)은 예수께서 성육신에서 승천까지 이르는 그 동안에 이룩하신 완전한 예배 행위인 그의 직무 (ministry)에 근거를 들 수 있다는 것이 개혁주의 에배의 신학적 근거인 것이다. .  2.역사신학적 근거 1)예수님의 예배관과 초대교회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로마서를 통해서는 복음이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서에서도 특별히 로마서 9∼12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이다.
  구원은 언제든지 우리를 예배로 인도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섬겨야하는가를 보이신 일이다. 만약 우리가 행동이 없이 예수님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 신앙에 대해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 몸의 대가를 전부 치르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그 사역의 삼분의 이를 우리몸과 우리몸에 필요한 것을 위해서 사셨다.  로마서 12장 1절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드리길 원하고 계신다.
  헬라어로 '드린다'라는 말은 'παραστησαι' 이다. 이 단어의 시제는 한번 드린다음에 완전히 끝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마지막으로 완전히 드렸다는 뜻인 것이다. 영원히 주님 앞에 드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기본은 하나님앞에 내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을 때 우리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나간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가면 우리 속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외치는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네속사람을 변화시키도록 하라"고 말한다. 변화되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도전받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도록 하라는 것이다.
  먼저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이 개혁주의적 에배의 핵심이다. 우리의 모든 기능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능력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성 자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2) 종교개혁과 예배 주지하다시피 16세기의 종교 개혁이 그 출발에 있어서 신학의 개혁을 목적으로 했으나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개혁의 필연성은 의미를 상실한 미사에서 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일차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음을 인정할 때, 자연적으로 예배란 교회 기능의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이 변질되거나 퇴색될 때, 언제나 교회는 문제를 갖게 되었다. 루터 (Luther)는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가장 주저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은 자주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추종자들이나 또는 그 자신이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공공연히 논박을 하였다. 그러나 차츰 루터는 새로운 예배 형식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 자신 스스로가 예배의식을 만들어 1523년에 미사전례 (Fomula Missae)를 발간했으나, 결과는 라틴어를 포함하여 기타 여러가지 과거의 예배요소들을 그대로 갖고 있는 로마미사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그는 예배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재현이나 성상의 사용을 극구 반대하는 입장으로서 그의 극단적인 개혁은 예배 가운데 오르간을 비롯한 제반 악기의 사용이라든지 시편 교독을 대신하는 회중들의 찬송들을 모두 삭제한 것에서 나타난다.   반면에 그는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써 성경 봉독과 기도와 죄의 고백, 그리고 설교만을 강조한 예배형식을 내세웠다. 그는 성만찬을 기독교 예배 형식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지 않았으며 자주 성만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보고, 1년에 네번만 성만찬이 있는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개혁 신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는데 예배식의 개정에는 루터보다 더 용감하였으나 쯔빙글리보다는 급진적이지 못했다. 그는 예배의 두 중심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두고서 새로운 예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간편한 예배 순서속에서 초기 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살리는 예배를 마련하기 원하였으며, 이 일을 위해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독자적인 예배형태를 개발하지 않고서 결국 부처가 사용했던 예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채 예배의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만찬의 중요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매주마다 거행할 것을 주장했다. 칼빈이 이처럼 예배의 두 초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둔 것은 중세의 미사가 주는 엄청난 비 성경적 요소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우 간소하게 만들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물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는 정형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예배가 가진 최고의 단점은 예배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지 '보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형식 파괴는 결국 중세의 미사를 통한 '보여주는 예배'와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현대교회의 예배 교회의 부흥은 사람으로 가득찬 건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찬 사람안에 있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예배관이었다. 이러한 개혁주의적 예배관은 최근의 신학자 짐 그래함 목의 책 "잠자는 거인을 깨운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올바른 교회관을 가진 목회자라면 사역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또한 그는 교회의 목표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인 만큼, 예배를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을 극복하기 위해선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예배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아야 하고, 교파와 제도를 초월한 초대교회의 이상과 비전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열린 예배에 대한 비판 1) 열린 예배의 기원
열린 예배는 잘 알려진대로 미국의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 새들백벨리커뮤니티교회 등 미국교회에서 시작된 예배형태이다. 전통적인 예배 형태에서 벗어나 현재적인 문화요소를 접목시켜 지루하지 않은 축제적인 예배를 지향한다. 메시지를 제시하는 수단으로서 드라마, 멀티비젼 영상, 토크쇼, 리드미컬한 밴드 연주, 마임, 만화프레이즈등 시선을 끌만한 요소들로 시선을 딴곳에 팔지 않도록 하는데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열린 예배(Open Worship)는 또 구도자 예배라고도 하는데 그 기원으로는 미국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인 빌 하이빌스(Bill Hybels)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열린 예배의 특징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났는지를 모르는 것과 누가 사회자이고 누가 설교자인지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기존의 교회 에배에 식상한 구도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주고 있다. 1973년에 빌 하이빌스 목사는 사우스 파크(South Park) 교회에서 청소년을 위한 수요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이들 청소년을 위한 특별한 행사를 기획하던 중에 믿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매주일의 특별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예배를 통하여서는 흡수되지 않던 청소년들이 이러한 특별예배에서 많이 회심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자 이를 일반적인 목회와 예배에 접목하기 시작 하였다. 2) 열린 예배의 근거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는 있는가? 이에대해 찬성론자들은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로 이사야 66장 19절과 시편 96편 3, 10절, 57편9절, 신명기 26장 10-11절등을 든다. 을 예로 들고 있다. 특히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남은 자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 96편 3, 10절의 말씀과 시편 57편9절의 말씀을 참고하면 시편 기자도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받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신명기 26장 10, 11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어떻게 예배할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 할 지니라"고 하신 말씀등에서 근거를 찾는다. 즉 너희중에 우거하는 객은 가나안 족속을 말하며 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때부터 구도자 예배 즉 열린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기뻐할 수 있는 그러한 장을 만들라는 것이다. 로마서 15장 9-11절, 시편 86편 9절과 67편5, 7절도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잠재적인 예배자로 보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열린 예배란 타당한 것인가? 사실 미국교회의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란 명칭을 한국적인 이름으로 개종시킨 것 자체가 무리가 있었다. 우선 영어의 '서비스(service)' 단어가 일반적인 예배를 가르키는 '워십(worship)" 보다는 가벼운 개념이다. 그기에다 '구도자(Seekers)'란 단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열린 예배'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문제가 있다. 사실 불신자나 초신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를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배에는 "신령과 진정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불신자라 하더라도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神)개념이 있기 때문에(시 14:1, 행 17:22, 23) 그러한 개념을 열린예배를 통해 올바로 이끌어서 복음의 실제에 접근하도록 하자는 것이 바로 열린예배의 취지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열린 예배의 대안 열린 예배는 그러면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가? 일에 대해 이상규 교수는 몇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선포가 아닌 토크쇼와 같은식의 설교는 드리는 예배로서의 성경적 인 예배가 아닌 보여주는 "쇼"와 같은 예배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예배형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의 숫적 성장 둔화 현상을 극복하고 신세대들에게 신앙적 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예배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권장할만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보다 참되게 섬기고 예배할 것인가에 대한 '바른 예배'에 대한 동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회중'에게 더 흥미로운 예배를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설교에 있어서도 본문(Text)에 대한 관심보다는 상황에(Context) 더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결국 말씀의 원의미를 가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배형식에 있어서도 이런 현상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회중들은 예배를 드린다는 생각보다는 예배를 "본다"는 의식이 강하다. 결국 예배형식의 변화라는 것이 자칫 즐거움을 더하는 "우리의 방식"의 예배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셋째, 형식의 변화가 내용을 변질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물론 형식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기존의 예배형식 그 자체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 형식(型式)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내용의 변질만 없다면 형식을 고정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은 형식 그 자체가 때로는 내용을 변질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해묵은 지적이지만 맥루한 매체가 메시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그 실제적 변형의 경우를 지적한 바 있는데, 예배에세도 형식이 내용을 대신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 변질이란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보는 예배, 그리고 보여주는 예배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정일웅 교수는 "예배는 실제로 세상에 대해 열려 있는 예배이며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도록 개방된 예배"라고 전제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본 다면 교회의 예배는 참으로 열려진 예배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신자만이 모여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예배하는 환경이 되도록 예배한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열린 예배가 진실로 새신자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면 예전 중심의 변화로 수용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이러한 수용의 가능성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예배를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의 삶 속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들에 대한 꾸밈없는 우리의 반응이 예배이다. 실로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성과 활동을 계시해 주시기 전에는 우리가 그에개 전혀 진실되게 예배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Spirit)과 진정(truth)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4)고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에게 예배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예배하는 방법에 관한정확한 지시를 내리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그는 그가 받으실만한 제사의 형태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후에 주님께서는 바리새인 예배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교훈과 전통에 기초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셨다.
  진정한 예배는 확실히 하나님의 본성과 계시 그리고 그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팔동에 근거되어야 한다. 월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모든 본성의 복종이다. 그것은 곧 그분의 거룩함에 의한 양심의 소생이고 그의 진리로 인한지성의 양육이며 그분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마음의순화이고 그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그의 목적에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이 모든 것이 예배에 집결된다. 인간의 본성으로 가능한 가장 헌신적인 감정이 생겨나고 따라서 우리의 원초적인 죄와 모든 행위의 죄의 근원인 자기본위에의 치료가 있게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히13:16).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돈과 소유의 문제를 항상 심각하게 다루었다(마6:21).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우리는 이점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예배 공동체이다. 그들은 이 목적 때문에함께 부름받았으며 이러한 본래적인 임무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고 그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사역에서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상실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할 때에 그분은 우리를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이점에 대해 세가지 특징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진정한 예배는 언제나 그리고 분명히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다. 예배는 성직자나 음악가나 무용가나 그밖의 어떤 사람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다. 세상의 종교와는 달리, 오순절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는 살아계신 주님의 현존과 전적으로 그분만을 향한 예배의 이름에 적합한 모든 것에 의해 구분된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 한분 만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을 예배자들에게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찬송과 기도, 설교와성찬은 모두 주님의 광대하심과 연결되어야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시34:3). 이것이 예배이다.
  둘째로 진정한 예배는 항상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야 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을대표하여 모든 일을 해나가는 한 특정인에 의해 좌우되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배는하나님 백성들의 찬양의 연합된 표현이어야한다. 그래야만 백성들의 예배가되는 것이다.
  크리스찬들이 모였을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관해 교훈을 주는 말씀에서 바울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달리 말하면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활동적인 부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모든 것읏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고전14:26). 성경의 이 한장에서 그는 일곱번이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관해 이점을 명백히 강조하고 있으며 말씀 전체에 걸쳐서도 이점에 관해 암시적으로라도 말하고 있다. 이제 활동적인 예배 내용을 위한 점검이 있다. Ⅳ.  결론
21세기를 향한 진정한 준비는 예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가장 한국적인 예배 한국적인 문화요소가 포함된 예배가 필요하다. 무조건적으로 구미에서 성공하였거나 유행하면 분별없이 도입하여 유행시키는 이러한 운동은 결코 개혁주의적 예배관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식 구도자 예배는 한국교회에 접목되기에는 문제가 많이 있다. 미국교회는 다양한 형식의 예배를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예배는 장로교 예배였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교회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예배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준비된 예배의 형식을 지금처럼 공예배시에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으로 보아도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열린예배는 신중하게 연구 되고 분석 되어져야 할 대상이다.

 

열린예배에 대한/개혁주의 입장에서 정립하라 > 선교자료, 전도자료 | 기독정보넷(cjob)-기독교 대표 생활정보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