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불행했던 고난의 시대에 태어나 민족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당하며 신앙으로 그의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간 고당 조만식 장로는 민족의 위대한 거목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사랑과 평화를 몸으로 실천하면서 교회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낸 정치가 조만식 장로를 그리는 것은 사뭇 가슴이 뜨거워진다.
-신앙인 조만식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 배위량(Baird) 박사가 세운 숭실학교에 입학한 조만식은 방황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기독교의 박애 정신과 애국애족의 뜨거운 열정을 깨달았다. 1921년 평양 YMCA 총무가 되었고, 그 무렵 1922년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 임직을 받았지만,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일제의 감시를 당하면서도 산정현교회 장로직에 전념하였다.
고당 조만식 장로의 겸손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주기철 목사를 평양 산정현교회에 청빙 하기 위해 마산 문창교회를 찾아왔다. 주기철 목사는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조만식 장로의 제자였다. 조 장로는 젊은 주기철 목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산정현교회에 청빙을 요청했다.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그가 제자 앞에 끝까지 무릎을 꿇은 겸손에 주 목사는 감명을 받고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했다. 어느 주일, 주 목사는 예배 시간에 늦은 조 장로에게 “장로님은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말고 서서 예배를 드리세요.” 옛 스승에게 가혹한 것 같았으나 제자의 견책(見責)에 순종하였고, 교인들 앞에서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회개하였다. 학교로는 조 장로가 선생이요, 교회로는 주 목사가 선생이다. 그는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기까지 순종하고 교회를 묵묵히 잘 섬겼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 주 목사로 하여금 주 목사가 되게 한 것은 오정모 사모의 격려와 조만식 장로와 산정현교회의 힘이 컸다고 사가(史家)는 말한다. 그 목사에 그 장로였고, 그 장로에 그 목사였다.
고당 조만식(1883년 2월 1일~1950년 10월 18일 )
-교육자 조만식
숭실학교를 졸업한 조만식은 일본으로 건너가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여 영어를 습득하였고, 명치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미국 유학을 꿈꾸던 조만식은 포기하고 고국에 돌아와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학교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1915년 이승훈이 투옥되자 조만식이 33세의 나이에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청년 교장 조만식은 학교에 기거하면서 교장이며, 교사였고, 사환이고, 교목이었다. 그는 일반과목뿐 아니라 성경 과목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라를 살리려면 사람이 변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변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문하에는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박형룡, 송창근, 김홍일, 홍종인 등등 목회자와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교육사업에 정열을 갖고 있던 그는 후일 숭인상업학교 교장직을 맡았으나 6.10만세 사건으로 교단을 물러나게 되었다.
-조만식의 애국애족(愛國愛族) 운동
신앙인으로서 조만식은 애국애족 정신으로 살았다. 조만식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교장직을 물러났으나 독립운동의 가담자로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맡아 국산품애용을 장려하는 애국조직을 이끌었고, 당시 평양노회는 농촌부에서 이 운동에 협력했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여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고취하는 운동에 중앙위원 겸 평양 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1931년에는 관서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체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시도하였다. 또 한 1937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애국애족 운동으로 활발했던 조만식에게는 일제의 수많은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정치인 조만식
조국이 해방되자 일제는 물러가면서 신변 보호를 위해 평남지사는 책임자로 조만식을 앉히기 위해 승용차를 보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이 타던 차를 탈 수 없다”고 거절하고 스스로 평양에 도착했다.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최고 영도자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공산당이 득세하여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앉히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조만식은 그와는 반대로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그 또한 소련의 압력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1916년 1월 조만식은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그를 구출하려는 민주당 당원들의 권유에도 본인은 거절하였다. 1945년 이승만은 친서를 보내 함께 일하자는 권유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는 감금 상태에서도 신앙으로 고초를 이겨내면서 당원들을 만나면 남으로 가라는 권고를 했다. 또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 미국의 브라운 소장은 조만식을 만나 남하를 권하자 일천만 북한 동포를 버리고 나 혼자만 남하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조만식은 예수 믿고 나라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고, 그때부터 양복은 벗어버리고 한복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오직 민족을 사랑하는 간절한 애국심과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위로가 그를 지배하였다.
조만식 장로는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라는 정치적인 면과 종교적인 기독교 신앙과의 정교(政敎)의 조화를 이루면서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곧고 바르게 외길로 살았던 민족의 등불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치 화란의 칼빈주의 개혁자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사상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귀한 선배 조만식 장로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오늘 우리 시대에 부끄러운 자화상을 돌아본다. 오! 주여!
김형원 / 수필가, 서울영천교회 은퇴장로, 에피포도 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상, 고려문학상 대상 수상, 에세이집 「고향의 강」, 크리스챤 한국신문 발행인, 한국기독언론협회 회장 역임,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 역임. 고려문학회 회장 역임.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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