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변절한 교회는 순교자에게 무엇도 뺐지 못했다

교회사

by 김경호 진실 2025. 7. 7. 08:34

본문

[7월의 신앙인물/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 정신, 신사참배 맞서
건국훈장 독립장, 현충원 안장

1936년 7월, 황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기세가 한껏 높아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는 꺾이지 않는 신앙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의 이 땅에서 마지막 행보는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비장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선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이 주기복이었던 그는 맏형을 따라 1910년부터 웅천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진학해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과 교장 조만식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애국신앙을 키웠다.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중생의 체험을 한 후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1922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시작한다. 졸업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은 뒤에는 1926년 부산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할 무렵 그의 나이는 마흔이 됐다. 그 시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정책은 점점 강도가 세지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선교사들은 추방됐고, 저항하는 기독학교들은 문을 닫아야 했다. 강압에 이기지 못한 교회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하지만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마저 주기철 목사의 기개를 꺾지 못했다. 앞서 1919년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체포된 경험이 있는 주 목사는 신사참배 강요정책 앞에서 꿋꿋이 맞섰다. 산정현교회에 부임하기 직전인 1935년 12월 19일, 주기철 목사가 자신의 모교인 평양신학교에서 설파한 그 유명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메시지에는 그의 강력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예수를 버리고 사는 길은 정말 죽는 길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길은 정말 사는 길이다.”

그는 산정현교회를 신앙의 결기로 가득 채웠고, 전국의 집회들에도 담대히 서서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서 힘차게 외쳤다.

부산 초량교회를 담임하던 시절 주기철 목사가 사용한 강대상.
경남 창원에 건립된 주기철목사기념관.

 

자연히 주기철 목사는 일제가 눈여겨보는 존재가 됐다. 1938년 제1차 검속을 시작으로 경찰서에 붙들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일이 주 목사에게 반복됐다. 특히 의성농우회 사건과 연루해 벌어진 제2차 검속은 주 목사의 건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핍박은 이후로도 계속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철 목사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5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지루한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맡깁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1944년 4월 21일 오후 9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던 몸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죽음을 앞두고 평양 형무소에 면회 온 아내 오정모 사모에게 건넨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는 그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그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한국교회는 주 목사 앞에서 보란 듯이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으로 부족해, 그의 목사직까지 빼앗아버렸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주 목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그의 자리를 마련했다. 2015년 경남 창원에 주기철목사기념관이 세워진 데 이어, 올해는 옛 의성경찰서가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으로 변신하여 개관했다.

 

[이 달의 신앙인물] 변절한 교회는 순교자에게 무엇도 뺐지 못했다 < 이 달의 신앙 인물 < 크리스천+ < 기사본문 - 주간기독신문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