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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와 바빙크: 하나님의 주권과 사회 참여

사회

by 김경호 진실 2025. 4. 2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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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네덜란드 개혁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는 현대 사회의 급속한 세속화와 도덕적 혼란을 목도하며 개혁주의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삶의 영역은 한 치도 없다’는 신념 아래, 신자가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보았다.



카이퍼는 칼빈주의를 “전 우주적 삶의 체계”로 이해하여, 종교 개혁의 정신이 정치·사회 전반에 적용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퍼진 세속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개혁신앙에 기초한 대안적 사회질서를 제시하고자 했다. 카이퍼에 따르면, 국가는 교회와 구별되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의해 설립된 기관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창조질서가 부패했어도, 하나님은 일반 은총으로 세상에 질서를 유지시키는데, 국가의 존재 목적이 바로 사회 정의와 질서 유지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는 사회 각 영역(가정, 교육, 경제, 정치 등)의 주권을 조율하고, 악을 억제하여 선한 삶이 가능하도록 법과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긍정적 이해는, 비록 국가가 교회처럼 구속 사역을 하지는 못해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 받는 도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이퍼는 국가가 자기 역할을 상실하고 타락할 가능성도 경고했다. 정부가 참된 정의와 질서를 지키지 못하고 부패하여 폭정이나 혼란의 원인이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탈은총화’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즉 하나님이 주신 공적 은혜를 국가가 배신하는 상황으로, 이러한 경우 국가는 교회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거나, 사회 전체의 평화로운 발전을 해치는 불의한 질서가 된다​. 카이퍼는 바로 이런 때에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고 강조했다​. 교회에 대한 직접적 박해뿐 아니라, 사회가 불의하고 혼란스러워서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는 경우에도 신자는 가만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 증거에 방해가 될 때만 정치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정의롭고 평화롭지 못할 경우에도 기독교인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카이퍼 자신도 언론인과 정치인으로 활약하며, 1901년에는 네덜란드 수상이 되어 기독교적 가치에 입각한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의 행동은 신앙인이 국가공동체의 선을 위해 책임을 져야 함을 몸소 보인 사례다.



다만 카이퍼는 교회와 성도가 어떻게 사회에 참여할 것인가에 있어 중요한 원칙적 구분을 했다. 그것이 유명한 “교회 기관과 유기체”의 구분이다​. 카이퍼에 따르면, 제도적 교회(공교회)는 특별 은총의 기관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속사역(복음 전파와 성례, 양육)을 수행하는 것이지, 직접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여할 권리가 없다고 보았다​. 교회 본연의 임무는 예배, 말씀, 권징 등 영적 사무이므로, 교회가 집단으로 정당을 만들거나 성직자가 정치권력을 잡는 것은 교회의 근본 사명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어서, 카이퍼는 교회가 “언덕 위의 도시”로서 간접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성도들의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의 방식 자체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기에, 그 모범과 빛을 통해 사회의 어둠을 책망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태복음 5장 13-16절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떠올리게 한다.

 

제도적 교회 밖에서의 적극적 사회참여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몫이라고 했다​. 유기체 교회란 곧 세상 속에 흩어져 있는 중생한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이들은 각자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가 각자의 직업과 사회적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할 때,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 바깥에서도 살아있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사는 이 세상 전체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므로, 신자는 정치까지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해야 할 소명이 있다는 것이 카이퍼의 주장이다​. 그는 세속을 등지고 오직 영혼 구원에만 몰두하는 이원론적 태도를 비판하며, 현세 역사 속에서 청지기직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책임이라고 역설했다​. 요컨대, 목회자와 교회는 강단에서 성도를 양육하여 세상으로 파송하고, 평신도 성도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개혁주의적 교회와 사회의 바람직한 관계이다.

 

헤르만 바빙크도 카이퍼와 발을 맞추면서, 신학적으로 “은혜와 자연의 균형”, “특별 은총과 일반 은총의 조화”를 강조했다​. 바빙크는 죄의 심각성과 일반 은총의 실재를 동시에 직시하여, 성도들이 세상의 학문과 예술,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세속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취해야 함을 가르쳤다​. 그는 재창조되진 않았지만 보존된 인간 본성의 선한 요소들을 인정하여, 교회가 세상 문화 속 진정한 미덕과 진리를 존중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철학, 과학, 예술,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이 주신 지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변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신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는 근본적 대립이 존재함을 잊지 말라고 한다​. 믿음과 불신의 대조는 분명하지만, 공동의 인간성과 하나님의 보편은혜로 인해 신자와 불신자는 같은 인간 문화 속에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균형이다.



바빙크는 개혁파는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과 절대성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계속 베푸시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을 경멸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은혜로 남아있는 선을 활용하여 세상을 변혁하되 죄의 현실을 간과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빙크와 카이퍼 모두 교회가 세상 속에 스며들어 사회를 새롭게 하는 유기체적 사명을 강조한 반면, 교회 제도 자체는 거룩함과 복음전파에 전념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유했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의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는 만유의 주”라는 대원리를 사회에 적용하려 했다. 이런 사상은 훗날 네덜란드 개혁운동(반혁명당, 기독교 학교 설립 등)과 전세계 개혁파 교회들의 사회참여 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카이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도가 사회의 부패에 맞서 싸우는 것을 회피하지 말라고 도전했다. 실제로 그는 언론인으로서 펜을 들고, 정치인으로서 연단에 서서 세속주의와 맞서 싸웠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일반 은총이 심각히 훼손되어 사회가 급속히 악화될 때, 성도들이 어떤 각오를 가져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진리에 반하는 것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유혹을 경계하고, 때로는 갈등과 대가를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의 원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 이재욱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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