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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성장 개념-고재수교수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09. 11. 6.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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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성장 개념-고재수교수
교의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성장 개념
우리가 교회성장 하면 Donald A. McGavran의 이름이 얼핏 생각나다. 그는 풀러 신학교에서 선교학(School of Mission)을 가르치고 있다. 1970년에 Understanding Church Growth 책을 써내었다.
10년 후 80년에 개정판이 발간되었다. 맥가브란의 교회 성장은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많은 선교사들이 맥가브란의 방법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현재 많은 나라에서 그들의 기독교 상황에 교회 성장의 원리에 따라 보고되고 있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복음전도에 실제적인 전도경과에 대한 여러 책의 논문들이 논의되어지고 있다. 지금은 이 교회성장 원리의 실제적 결과가 아니고 조직신학적 원리의 출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것에 관한 신학적 복음은 옳은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어떤 전도의 방법을 쓰기 전에 또한 어떤 전도의 방법을 쓰는 동안에도 그 방법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된 것인지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이라는 책의 원칙들을 심사해 보고자 한다. 그의 교회성장에 대한 책을 읽는 사람은 여러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그분의 복음전도의 열정을 이 책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참 좋은 점이라고 생각된다. 본인이 동의 할 수 있는 몇 가지 점을 든다면 맥가브란이 어떤 부류의 사람이 가진 선교사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선교사란 학교, 병원을 짓도록 도와주는 사람, 농부들에게 농사를 짓는 방법에 대해 충고하는 사람이요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견에 대해 맥가브란은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그의 이 견해는 옳은 것이다. 맥가브란이 반대하는 이 견해는 오늘날 기독교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 부류 중에 어떤 이들은 선교사의 중요한 임무란 이 땅에 사회적인 정의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전도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도란 전도를 받는 사람이 속한 고유한 교육이나 문화적인 배경에서 그를 격리시키는 것이며 자기 친족들에게 여러 곤란을 야기하므로 우리는 전도하는 일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상황 가운데서 맥가브란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사의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임무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선교의 중요한 출발저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회적인 불의에 대해 싸우도록 명령합니다만 이러한 사실이 가장 중요한 임무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를 전하는 일을 중시하게 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 본인은 맥가브란의 입장과 같이 복음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둘째로 맥가브란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설득(persuade)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생각은 중요한 생각이다. 모든 선교사는 전도 받는 사람을 억지로 예수 믿게 하려 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어떤 것을 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서 과자 드세요 하는 말과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는 말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다과는 받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꼭 받아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과 개종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그래서 신약에는 설득하는데 대한 아이디어로 여러 번 말한다. 사도 바울이 그의 전도사 역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고후 5장 11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느니...” 여기서 권한다는 뜻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전도자가 애를 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단순히 흥미 있는 이론들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으로 제시해야 한다.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다른 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 한다. 셋째로 세울 교회의 위치를 올바르게 강조한다. 어떤 선교사들은 교회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맥가브란은 그런 선교사들의 말을 반대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나. 이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고려하여 볼 때 옳은 것이다. 신약에서 볼 때 교회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세우셨던 것부터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12사도의 12이름이 있는 새 예루살렘까지 중심 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나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도를 통해서 그의 교회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넷째는 맥가브란은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 때 교회는 그 초신자를 위하여 더 많이 도와주어야 된다고 한다. 맥가브란은 folding and feeding 즉 교회가 그들을 한 우리 안의 양떼로 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도 중요한 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예수 믿는 자가 되도록 애쓴 후에 그 사람이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이 초신자는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대전도 명령을 하셨을 때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라” 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교인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살게 하고 행해야 하는 것처럼 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둘째 이유는 사탄은 어떤 사람이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 사람을 위촉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을 잘 알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새 신자들이 쉽게 사탄에게 속히는 편이다. 그래서 맥가브란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가 특별히 새 신자들도 계속적으로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 지금까지 맥가브란의 좋은 점을 몇 가지 말했으나 맥가브란의 결론적인 교회성장이란 아이디어에 대해 아직껏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동의하는 점들은 교회성장의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본론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지금부터 ‘교회성장’ 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맥가브란이 이상한 의견을 말했다.
그의 교회성장에 대한 견해는 여러 교파 즉 침례교, 칼비니스트, 순복음 등에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교회성장에 관한 원리들은 다 성격적이고 신학적인 것이므로 교파마다 이 원리들에다 자기들의 교리를 알맞게 첨가해야 한다고 맥가브란은 말했다. 교회가 이 작업을 잘 하는데 따라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좌우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의견을 이상하다고 하는 이유는 어떠한 사실이 옳은 지 잘못된 것인지는 그것의 성공여부에 따라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 생각이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옳은 생각이 아주 작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교회성장의 생각이 옳은 지의 여부는 그 학설에 따른 실제적인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학설이 성격적인가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이 교회성장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성경 신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교의학적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 세 가지 측면 인간론 신론 교회론 에서 이 학설이 성격적인지 연구하고자 한다.
맥가브란은 인간론에서 특별한 용어를 많이 쓴다. findable people - 찾아질 수 있는 사람, winable people 얻을 수 있는 사람, receptable people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등이다. 맥가브란은 이 용어들을 쓰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말했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findable people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싶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들의 큰 무리들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기쁘게 받도록 그들의 생활을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그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 이렇게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findable people이므로 그들을 믿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많은 findable people들을 버리는 것이 되고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받도록 일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찾아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어떤 때는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는 사실을 볼 수 있지만 이 사실이 findable people이라는 말을 정당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 복음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느냐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인간에 대해 말하는가? 구약에 나온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힘들여 모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이 같은 힘든 작업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 10 - 18절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이 사실은 신약시대에 와서 즉 복음을 모든 족속들에게 전도해야 할 이 시대에서는 바뀌게 되었는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계시도 인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로 말할 때에도 신약시대에 관하여 비슷하게 쓰고 있다. 에베소서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에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라고 썼다. 엡 2장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보관상 신도의 자녀였거니...” 전에는 즉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는 말을 쓰고 있다. 엡 2장 1절, 5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외친다고 하더라도 죽은 사람들은 능력이 없으며 그들은 findable people, receptable people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원리적인 인간의 계시를 도외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하시지 않았는가? 맥가브란은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심과, 하나님의 보호와 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을 준비하시지 않았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비친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밝혀 주었지만 이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섭리가 복음을 받기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에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타락을 인하여 진지를 막는 사람들이 되었던 사실을 썼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그의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서 분명히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로마서 1장 20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을 거절한다.
그래서 복을 전할 때 바로 이런 사람만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을 이미 거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어떻게 findable people을 만나리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성격적인 기준이 없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도할 때에 복음을 받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리라는 사실을 성경 아무 곳에서도 약속하시지 않았다. findable people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신론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고백한다. 이것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교회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 신자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이고 사실은 또한 전도하는 일에도 지극히 중요하다. 그런데 맥가브란은 이 근본적인 고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전능하신 신이라는 것은 물론 「교회성장학」이라는 책에서 참을 수 있다. 맥가브란은 이렇게 쓴다. “자그마한 교회성장만이 계속되어진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결코 얻지 못한다. 만약 선교회와 교회들이 작은 성장에 만족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간다면 천국잔치는, 하나님의 준비는 허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인용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대한 맥가브란의 광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은 전도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분이시고 우리 인간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일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준비하시지만 우리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준비하신 것이 실패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 맥가브란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들에게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런 생각은 다른 곳에 나오는 그의 예를 통해서 지지할 수 있다. 그는 어떤 불타는 집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만약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을 억지로 밖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가 물어본다. 물론 그 사람이 말하는 집에서 그대로 있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는 머무를 수도 있지만 또한 우리는 그 사람을 설득해서 밖으로 나가게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도록 애쓰고 노력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이 예화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맥가브란이 순 예화로 말하지만 그들이 이 집이 불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와서 구원을 받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강요해서 믿는 자가 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설득하는데 달려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도 크리스찬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3장 5절 이하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썼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요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 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역을 이렇게 구별하였다. 즉 인간 아볼로나 바울은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이나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우리들이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사람들을 믿게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실이 사도행전13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14절에 루디아라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 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믿게 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맥가브란은 인간의 마음을 여는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다시 사도행전 13장 48절을 생각해 보자. 영상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거라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받도록 작정하셨고 복음을 받게 하시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복음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셨을 때 그 사람이.
우리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준비하셨을 때 틀림없이 어떤 신자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끝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맥가브란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의지하고 계신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신자들을 의지하시고 늘 필요로 하시고 또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불신자들 자신의 동의가 필요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의 질문은 이런 것이 된다. 어떻게 맥가브란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근본적인 기독교인의 고백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이다.
셋째로 교회들을 살펴보자.
맥가브란은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을 찾을 수는 없다. 맥가브란은 그의 책제목을 「Understanding Church Growett」라고 했지만 교회 성장학이란 책에서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맥가브란은 무엇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인가 이 문제는 쉽게 대답될 수 있다. 자기들 스스로가 교회라고 부르는 모든 교회로 맥가브란은 교회라고 불렀다. 그는 주로 신교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그 교파들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교회가 자유주의이거나 또는 정통교회이든지 간에 어느 교회든지 성장해야 한다. 어떤 교회든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저는 맥가브란이 교회들에 아무 구별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나의 이 신고는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맥가브란은 교회 사이에 어떤 구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3국가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는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애쓰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애를 쓰지 않는 어떤 교회라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당해는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될 수 없다.” 라고 했다. 그래서 맥가브란의 생각에 의하면 교회의 특징이 하나밖에 없다. 즉 복음을 전하는 행동만이 교회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계시를 전하지 않고 다른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맥가브란은 교회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성경에 대해 에베소서를 예로 들어보라. 엡 2장 20~21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라고 썼다. 이 성경 본문의 주제는 교회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교회성장에 대해 말한다. 21절에 나오는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라는 말은 헬라어로서는 ‘주안에서 성전으로 성장하는’ 뜻이다. 이 성장해 나가는 교회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27절에 보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된 것이다. 교회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다 받아야 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우리의 구주와 왕으로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교회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교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받지 않는 교회가 많다는 것을 안다. 이런 교회가 성장할 때, 이것이 교회성장이라 쉽게 말할 수 있으며 이런 교회 성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



화란의 종교 교육을 물어본다.
저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기독교 계몽의 학교에 갔지만 같은 나이 또래의 이웃집 친구는 다른 학교에 다녔습니다. 네덜란드에는 두 가지 종류의 학교로 즉 국립학교와 사립학교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 학교는 사립학교에 속하여 있습니다. 국립학교는 국가가 설립하여 그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고 기독교 학교는 개인들이 설립했지만 대체로 정부가 그 경비를 치르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는 모든 학교의 수준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 장학사들이 학교들을 다 방문하여 가르치는 수준의 질을 점검하는데 표면상 국립학교와 기독교 학교의 수준은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어떤 학교에 다닐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이웃집의 친구 부모님이 나의 친구를 위하여 국립 학교를 선택하였고 제 부모님은 형과 동생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독교적인 학교를 골랐습니다 제 친구와 저는 다른 방향의 학교를 각각 다녔습니다. 그러면
ㄱ. 서로 다른 학교가 생기게 되었던 상황과
ㄴ. 왜 저의 부모님이 저를 기독교적인 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는가하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ㄱ. 지금은 국립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지만 옛날에는 경우가 달랐습니다. 1806년의 학교 법은 학교에서 성경 읽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교에서는 하루의 수업을 시작하고 끝낼 때 성경을 읽으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정부도 선생님들이 좋은 기회에 성경을 읽고 설명하도록 충고했습니다. 그렇지만 1830년 이후에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학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자기 아이들에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국가는 그런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경 읽는 풍습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때부터 학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여 일반적인 종교 교육 즉, 도덕적인 교육이외에는 허락되지 않아 기독교 교육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때 학교 싸움이라는 것이 나타나 믿는 자들은 자기의 자녀들을 기독교적인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였는데 기독교적인 국립학교를 짓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인 학교를 짓기 위해서는 인가를 얻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가를 얻는 데에는 너무 오래 걸렸고 어려웠습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 국가는 초등학교의 기독교적인 교육은 없어야 된다고 법적으로 결정하여 기독교적인 초등학교의 소망은 좌절되어 버렸습니다. 다만 자식들에게 기독교적인 교육을 하고 싶으면 부모가 자신들이 그 학교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들의 돈으로 그 학교들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자기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두 배의 돈을 내어야 했는데 한번은 초등학교를 위하여 세금으로 돈을 내고 또 한번은 자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돈을 내여야 했습니다. 이 문제는 1888년 까지 끌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정부는 기독교 학교를 부분적으로나마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하여 1917년 비로소 국립학교와 기독교 학교가 재정적으로 균등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싸움은 거의 90년 동안이나 걸렸고 두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첫째 단계에서는 초등학교가 중립적으로 되어 기독교적인 학교를 지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둘째 단계에서는 두 종류의 학교 사이에 재정적인 균등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경우는 이러합니다. 우리 교단 교인들은 많은 학교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등을 설립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어떤 학교를 지을 때에 교인들은 그 학교에 필요한 경비를 수년 동안 스스로 내어야 하지만 그 후에는 국가가 경비의 양도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 학교는 너무 작기 때문에 국가가 보조금을 주지 않아 교인들은 매 년마다 다 같이 그 학교가 필요로 하는 경비를 기부합니다.
ㄴ. 그러면 둘째 문제로 왜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많은 경비와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까지 기독교적인 교육이 그렇게도 중요하다가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 한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다닌 중학교와 고등 학교는 제가 살았던 레이와르든(Leeuwalden)이란 시(市)에서 약 60km의 거리를 두는 시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날마다 저하고 다른 학생들은 기차를 차고 통학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간 친구들은 처음에는 열 명이었는데 나중에는 삼십 명이 되었습니다. 이웃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그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시에도 중학교와 고등 학교가 많이 있는데 왜 다른 시에 있는 학교를 굳이 다니느냐는 것이었지요. 그 당시 어느 날의 한 사건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는 기차를 타고 학교에 가면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가까이 앉아 있던 어떤 부부가 무슨 학교에 다니느냐고 묻길래 중학교와 고등 학교에 간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들은 놀라워하면서. “그렇지만 그런 학교는 우리 시에도 많은데 도대체 어째서 날마다 기차를 타고 다른 곳에 있는 학교에 가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는 “예, 우리는 개혁주의적인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라고 대답하였더니 그 부부는 “당신네들 개혁파 사람들은 항상 그래요. 당신들은 우리보다 더 좋다고 여기고, 당신네 학교는 우리 학교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하고는 화가 난 듯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침울해졌습니다. 우리 시에도 좋은 학교가 많이 있었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교만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그 먼 학교에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학교는 있었으나 개혁적인 학교는 없었으며 교육 수준의 질은 좋았으나 개혁주의 신앙적인 교육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개혁주의 신앙적인 교육 때문에 다를 시에 있는 개혁파 학교를 다녔습니다. 오늘까지 저는 그 개혁주의적인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집에서는 부모님들이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기독교적인 믿음과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집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개혁주의적인 생활관이었습니다. 학교의 학과 공부 중 생활면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개혁주의적인 교회를 다닐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




신앙고백과 교회교육
1. 교회의 가르침
교회는 학교가 아니지만 교회에서도 교육은 중요한 것이다. 처음부터 교회에는 가르침과 배움이 있었다. 구약을 보자면,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크신 사역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애굽에서의 해방을 특별한 행사로 기념해야 했다. 그 행사의 규칙 중 하나는 이것이다. “이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사람을 치실 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숙여 경배하니라.”(출12:26, 27). 그래서 매 해마다 아이는 행사의 의미에 대해 질문해야했고 아버지는 해마다 그것을 설명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역을 암기할 만큼 확실히 알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에게도 가르치는 임무가 있었다. 제사장에게는 술마시는 일이 금해진 일인데 그 이유 중에는 그들이 “여호와가 모세에게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레10:9-11)
신약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셨고, (예, 마 4:23)제자들도 가르쳤으며(예, 행 4:2) 디모데도 가르쳤다. 사실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일이 계속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명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도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2. 가르침의 성경적 규칙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치면 되느냐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두가지 성경본문을 살펴보자.
첫째로 딤전 1:11에서 바울은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고 하였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디모데가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설명하고 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두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로 그것은 사도바울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물론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는 다른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도바울의 말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제자들의 말과 동일한 것이다. 또 예수님 자신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맡기셨다.(행 9:15). 이처럼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이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그 가르침이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가르침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물론 그 가르침에는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도 나와야 한다. 하지만 구원의 복음은 항상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두 번째의 본문은 행 20:27인데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오랫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가르칠 수 있었다.(19:9․10). 그 결과로 에베소에도 교회가 생겼다. 나중에 바울은 그 교회의 장로들에게 자기가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고 말한다. 에베소의 교인들은 복음의 어떤 한 부분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청중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 일을 위한 세가지 규칙을 발견하다.
ꊱ. 교회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ꊲ. 교회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ꊳ. 교회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제시해야 한다.

3. 성경적 규칙들과 신앙고백
이제 이 규칙들을 신앙고백에 적용해보자. 가르침을 위하여 사용된 고백은 초대교회에 이미 만들어진 사도신경과 16,17세기에 생긴 요리문답이다. 영국과 미국교회의 선교를 받은 나라에서는 특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위 두가지 고백 사이의 차이는 크다. 사도신경은 매우 함축된 형식으로 신앙의 내용을 요약하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신앙을 보다 광범위하게 설명한다.
또 형식뿐만 아니라 다루는 방식도 다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사역을 따라 신앙을 요약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로부터 영생까지 교회의 교훈을 제시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보다 논리적 순서를 따라 신앙을 설명하는데 성격, 하나님, 찬조, 범죄, 구원 등을 다룬다. 하지만 둘 다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 내용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는 규칙도 이 고백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도신경은 사실 삼위하나님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성부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사역이 언급되고, 다음으로 성자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의 사역이 언급되고, 다음으로 성령님이 언급되고 마지막으로 교회로부터 영생까지 삼위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시는 일이 언급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의 중심적 자리가 이미 첫 문답에 나타난다. “문: 사람의 첫째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첫째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규칙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 나온다는 것인데, 그 규칙은 복음의 내용을 제한시키려는 위험으로부터 가르침을 지켜준다. 인간의 경향은 자기를 중심하고 자신의 구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창조나 교회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아주 간단해도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적 사건을 고백하고 창조와 교회도 언급한다. 또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구원사역을 넓게 설명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문답8,9,10) 그리고 말씀과 성례의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교회(문답 89-97)가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교회의 신조, 특히 사도신경과 소요리문답은 교회의 교육을 위하여 잘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4. 교회의 가르침과 신조형성의 이유
정확한 신앙고백이 교회의 교육을 위해 왜 중요한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교회사에서 잘 나타난다.
사도신경은 그 원형이 이미 2세기의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당시의 목사들도 교회의 교리를 예비신자에게 설명해야 했고 그 요약으로써 사도신경을 사용했다.
예비신자는 그 신조를 외워야 했으며 세례받기 바로 전에 그 신조를 공적으로 고백해야 했다. 세례는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고백할 때에 받는 것으로서 교회의 교육은 이 삼위하나님을 설명하고 사도신경에서 이를 요약적으로 표현했다.
어거스틴은 신조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성경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그 핵심적 내용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잘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받을 신자가 신조를 외우고 확실히 알 때에 성경 내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암기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목사들은 신조의 내용을 넓게 설명했다. 하지만 중세교회에서 점차로 이런 설명이 없어졌다. 외적으로 신조를 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믿음의 내용이 보통의 신자를 위해서는 너무 어려운 것이니까 신자는 교회가 믿는 것을 외적으로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개혁을 시작했을 때 이 중세교회의 악영향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를 보았다. 처음에 신부이었다가 개혁운동에 참여한 목사들 중에 사도신경을 잘 설명하지도 못하고 때로는 잘 암송하지도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때 루터는 그들이 교회의 교리를 설교로 설명하도록 그의 대요리문답을 썼고, 또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소요리문답을 썼다. 아이들은 사도신경 뿐만 아니라 소요리문답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외워야 했다. 왜냐하면 자녀를 포함한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고 또 행하시는지를 잘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120년 후에 웨스트민스터 공의회는 유명한 소요리문답을 작성했다. 당시에 이미 교육을 위해 많은 요리문답과 같은 것이 있었는데 왜 또 하나를 만들었는가? 그 이유는 스코트랜드교회과 영국교회 간에 믿음의 통일을 이루기 위함이다. 한 교회가 교육을 위해 이것을, 다른 교회가 저것을 사용하게 되면 교회에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공의회는 네가지 요항을 제시했는데 그 중 교육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요리문답을 ‘통일의 네 번째 요항’이라 명하였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돌이켜 볼 때 다시 세가지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ꊱ. 성경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신경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교할 때 사람들은 그 신경을 외워야했다.
ꊲ. 루터 시대에는 암기만으로 충분치 않음이 나타났다. 교회의 교육을 위하여 교리를 설명하는 요리문답이 필요해졌다.
ꊳ. 웨스트민스터 공의회 시대에는 목사들마다 자기 의견대로 교리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그 요리문답의 목적은 교회의 통일이었다.

5. 결론 성경의 규칙대로, 그리고 교회가 수세기 동안 이루어 놓은 지혜대로 신앙고백을 교회의 교육을 위해 사용하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신앙의 내용을 불확실한 말로써가 아니라 잘 숙고되고 그리고 교회가 인정한 정확한 말로 표현하게 된다. 그 결과로 신앙의 내용은 신자의 마음속에 정확한 형식을 갖게 되고,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또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교육할 때 개인의 한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목사와 교사도 제각기 기호가 다르다. 그 결과로 신앙교육이 일면에 치우칠 수도 있고, 또 교파내에서도 생각이 다른 다양한 그룹들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고백은 완전한 교리를 제시하니까 교사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 그는 교백을 따라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결과로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 가운데도 신앙의 일치가 형성된다.
이렇게 온전한 고백을 따라 세계의 모든 교회의 교사들이 가르치고 교인들이 배운다면 온 세계의 교회 안에 바른 신앙의 일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 참고 사항: 여기에 입력된 글은 전 네델란드 선교사로서 고신대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고재수 교수(Dr N H Gootjes)께서 월간 고신과 몇 잡지에 연재한 글입니다(신앙과 교회교육은「교의 신학의 이론과 실제」디다케 출판사 ). 그분은 지금 Canadian and American Reformed Churches의 교단 신학교인 Theological College of Canadian and Reformed Churches의 교수로 계십니다. 주소는 110 West 27th Street, Hamilton, ontario, L9C5A1 입니다.

잘못 입력한 것은 전적인 입력자 본인의 책임입니다. 연락주시면 원문과 대조해서 수정하겠습니다(cskang@kornet.net).
























한국 교회의 연령에 대한 검토

나는 “한국 교회의 진단”이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매우 광범위한 주제이면 단 하나의 글 안에 그것을 다루는 일은-그 글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주재를 보다 제한하고자 하며, 진단의 한 형태만을 다루려고 한다. 사람들은 병원에 가서는 의사에게 자기의 나이를 고려해서 의학적 검사를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면 의사는 그에게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든지 또는 그의 삶의 단계, 즉 나이에 비추어 보아 그다지 좋지 않다든가 하고 말해 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한국 교회의 연령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그에 따라서 한국 교회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건강을 진단함에 있어 연령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진단하는데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것인가? 아마도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이 교회를 살펴보는데 대한 가장 흥미 있는 각도처럼 보이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연령의 문제를 이 글의 기점으로 선택한 사실이 분명히 말해 주듯이 나는 이 문제를 가장 적절한 것으로 여기며, 그 중요도가 다음의 글에서 스스로 밝혀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토론에 들어가지 전에, 왜 내가 그 주제를 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겠다. 사람들과 함께 교회와 교회 생활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종종 한국 교회의 연령에 대한 문제를 대하게 되곤 했다. 나 자신은 네델란드 사람이며, 우리 나라 홀란드에서는 교회는 8세기에 세워졌다. 다른 한편 한국은 (몇몇 로마 카톨릭교도들의 실패로 끝난 시도를 생각지 않는 다면) 1884년 최초로 두 선교사가 이 땅에 상륙했을 때에야 비로소 복음의 문이 열렸다. 네덜란드에는 이제 교회가 존재해 온지 1,000년 이상이 되었으나, 한국에서는 한국 장로교가 독자적인 교회로 설립된 1907년에 와서야 비로소 교회가 조직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내게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교회가 대부분 오래되고 국교화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곳에서 한국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더 많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지요. 한국 교회는 아직 어리고, 따라서 더 자라고 발전해야 해요” 이처럼 그들은 교회들을 세계 각지의 교회들과 비교하고 한국 교회가 비교적 어린 교회라고 말한다. 종종 한국 교회의 연대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교회에 남아 있는 비기독교적 사고의 흔적에 대한, 또 기독교가 아직도 교회 출석자들의 사고에 마땅히 주어야 할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내가 여기서 교회의 연대라는 관점에서 그 건강을 진단하기 위해 교회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체험의 배경에 반대하는 것이다.

1 물론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오래된 교회에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젊은 교회에 대해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로써 성경이 교회라는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를 연구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ristian Church)에서는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거기에서는 오래된 교회인 유럽의 교회와, 복음이 비교적 늦게 도달했으며 교회가 금세기 초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지역의- 주로 제 3세기 국가의-어린 교회와를 구별하고 있다.
또한 분명, 복음을 모두 국가에 퍼뜨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어떤 진행 과정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모든 사역은 팔레스틴에서 시작되었으나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와 로마로 확장되었다. 또한 그것은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로 내려갔으며 동쪽으로는 아마도 인디아까지 멀리 퍼졌을 것이다. 로마로부터 복음은 영국을 포함해서 서유럽 전체를 통해 퍼져 나갔다.
종교개혁 이후, 복음은 17세기 초 새로운 세계인 아메리카에 일단의 청교도들과 함께 건너갔다. 그리고 2세기 이상 지나서 복음은 아메리카에서 한국에 도달했다. 또 다시 그리스도는 국경을 건너 또 다른 국가로 들어가셨다. 그는 이제 그의 추종자들이 은둔자의 왕국에서 나오기를 원하신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분은 정치적 발전을 통해서, 그렇게도 오랫동안 이 왕국을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왔던 격리 상태를 깨부셔 버렸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한국에 들어 오셨을 때, 그것은 그분의 사역에 있어 새로운 단계였다. 그러나,-이것은 중요한 질문인데- 그 때 그 분은 여기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셨는가?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설립하는 일을 계속하셨을 뿐이다”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에베소서를 연구해 보면 우리는 이 원리를 쉽사리 깨달을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회중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에베소 소아시아에 속해 있었으며 결코 유대 국가 내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 곳의 회중은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교회의 회중보다는 훨씬 더 후대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구절에서 그들의 위치를 한정 할 때 그는 그들에게 “여러분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비해 어린 교회입니다. 더구나 옛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더욱 그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와는 다르게 구별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엡 2:1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은 가까워졌다(13, 17절). 매우 가까워졌으므로 그들은 이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과 같은 족속의 일원(하나님의 시민들과 같은 동료 시민)이 되었다. 그들은 같은 권속(하나님의 권속의 일원)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때 그들은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전체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하나님이 백성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자신을 위한 새로운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집에 사는 한국인들도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회는 어린 교회이기는커녕 새로운 교회도 될 수가 없으며 단지 오래된 교회, 즉 예수그리스도의 오랜 교회에 이제 막 가입한 것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교회에 좀 더 일찍 합류했고 한국 사람들은 후대에 와서 합류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언제 했건 꼭 같은 교회에 합류한 것이다”.
교회의 기본적인 통일성(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서는 “하나 됨”)은 그것이 오직 하나의 기초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또한 알 수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꼭 같은 방식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이미 교회의 기초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으시다(마 16:18). 일치에 대한 유명한 구절인 엡 4:4 이하에는 “하나 됨”이 다른 방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와 꼭같은 원리, 즉 유대적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나 이교적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하나라는 원리는 롬 4:11이하, 갈 3:29, 4:28에 나오는 바울의 표현 즉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며 또한 무할례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에도 나타난다. 같은 한 사람의 후예들은 함께 모여 하나의 백성을 구성한다. 이런 식으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해 말하면서 유대에서 온 그리스도인이거나 이방 나라 그리스도인이거나 같은 민족을 구성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새로운 교회”라고 하는 용어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한국 교회에 엄격하게 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아직 어린 교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한국에 있는 교회는 매우 오래된 교회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바람직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도와 선지자라는 터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퉁이 돌이 되시는가? 그것은 실제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예수그리스도 위에 놓여 있으며(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퉁이 돌이시다), 또한 이전에 사도들이 선포했던 신앙(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한국 교회가 아직 너무 어린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오래된 하나님의 집의 법규를 준수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집에 합류한 것이다.

2.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아요. 교회가 어리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가 없죠, 하지만 적어도 한국인들은 비교적 늦게 교회에 합류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최초로 한국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지는 얼마 안 돼요. 그래서 한국에 교회가 설립된 이래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꽤 상당한 결과들은 낳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여전히 성경적 기준을 향해 성장하고 있다고 변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어떤 때는 사람들은  히 5:11이하를 언급하면서 한국 교회가 아직 단단한 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교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반론에 답하여 우리는 우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 과도기가 허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사람들은 반만 그리스도인이고, 나머지 반은 이교도, 즉 불교도나 무속 신앙이나 그 외 어떤 것이든지 그들이 이 전에 가졌던 종교를 가진 채 남아 있을 수 있다. 시간이 경과하면 교회 출석자의 75%는 그리스도인으로 나머지 25%만이 이전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리고 말하자면 100년 후에는 교회가 완전히 기독교화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체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각 개인의 과거와 결별하는 것이며, 그것은 완전한 변화를 포함한다. 바울은 회심이 죽은 후에 다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엡2:1-5). 죽음과 삶 사이에 과도기라는 것은 없다.
신약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변화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신약에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서신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일 것이다. 바울이 그 곳에서 얼마간 설교한 후에 유대인들의 반대 때문에 떠나야만 했다(행 17:2-10). 이 서신서는 디모데가 교회로부터 어떤 소식을 갖고 왔을 때 쓰여졌다(살전 3:6). 아마 그 일은 그가 그 도시를 떠난 지 일년 내에 일어났을 것이다(행 17:5). 데살로니가에 보낸 이 서신서는 이러한 짧은 기간 내에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전체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들의 이교적인 환경 내에서 완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몇 가지만 예로 들어도, 바울은 항상 “택하심”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말을 시작한다. “택하심”이라는 주제는 종종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도 너무나 어려운 주제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실로부터 그들이 택하심 받은 것을 안다고 쓰고 있다(살전 1:4,5). 더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4:14,15, 5:10), 그의 재림(4:16이하), 영원한 심판(4:6)에 대해 언급한다. 심지어 삼위일체의 교리까지도 이 서신서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의 기독교적 생활 양식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라고 바울이 촉구했을 때에(2:12, 4:1) 그 원리가 규정되어진 것이다. 4:3-12에서 그는 간음에 대한 계명과 (4,5) 사업에 있어서의 정직함과(6) 일상적인 일에서의 근면함(11)에 대한 계명을 주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서서히, 점차적으로 복음을 적응해 갈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 교인들에게 복음의 전(全) 내용을 전파하고 편지로 썼으며, 그들에게 그 모두를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히브리서를 살펴보자.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들과 같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생각함에 있어 두 가지 사실을 숙고해야만 한다. 첫째는 저자가 그의 독자들은 듣는 것이 둔해졌다(히 5:11)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역주: 개혁 한글판에는 “둔하므로”라고 되어 있으나 영어로는 have become dull로 되어 있음) 그러므로 여기서는 한 교회가 아직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언급된 것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이 더 이상 복음을 잘 듣지 않는 사실에 대해 언급된 것이다. 그들은 잘 듣고, 잘 이해하는 것에서 피상적으로 듣고, 또 듣기에 편한 것만을 듣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이해력에 있어 철저함은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이 서신이 언제, 또 누구에게 쓰여진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은 성전 파괴 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파괴 후에 쓰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1세기가 끝나기 전에 쓰여진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는 70년 이내, 아마도 불과 40-50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퇴보가 스며들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 깊게 듣고 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했다.
첫 번째 것과 관련된 두 번째 비판은 독자들이 복음의 충분함을 이해하는 데 어렵다는 것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가 그의 메시지를 완전하게 다 쓰지 않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서신을 읽는 사람들이 듣는 것에 둔하다는 사실이 저자로 하며금 “당신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나는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소”라고 말하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히 5:11을 시작한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해석하기 어려우니라”그리고는 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지식의 부족에 대해 훈계한다. 하지만 이렇게 경고를 하고 난 후에 그는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광범하게 설명을 쓰고 있다(7장이하). 저자는 듣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자기의 가르침 중 일부를 빼먹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의 풍요함에 귀를 열 것을 촉구한다. 메시지의 특성이 수신자에게 적합하도록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수신자들이 복음의 보다 복잡한 부분까지 파악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에는 계시록에서 찾을 수 있다. 계시록이 신약에서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책이라는 것은 거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마 요한은 A.D. 95년경에 이 계시를 받았을 것이다. 이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7개 교회의 회중에게 보내는 7개의 짧은 편지만은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신 것은 “네가 내 말을 지키고, 견딘 것” (2:2,13,24이하, 3:8)이며 그 분이 비난하신 것은 그들이 믿음의 말씀을 버렸을 때(3:2, 15) 또는 회중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허용했을 때(2:14이하, 20)이다. 또 그분이 명령하신 것은 “계속 충성하라”또는 충성된 삶으로 돌아오라“(2:4이하, 10, 25, 3:3)는 것이다. 부분적인, 또는 심지어 완전한 방종이 얼마나 쉽사리 교회로 잠입해 들어오는가, 이러한 일이 소아시아에 있는 몇몇 교회에, 교회가 설립된 지 채 50년도 안되는 새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방종함에 대해서 예수그리스도 자신께서 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이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낼 수 있다. 1)한국 교회는 어린 교회로서 판단 받아서는 안되며 오래된 교회의 규칙에 의거해서 판단 받아야 한다. 2)복음이 한국에 비교적 늦게 도달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가 언제든지 복음에 적응할 일정한 기간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3 이제 잠깐 점검해 보기 위해서 세 가지 주제를 선택하겠다.
첫 번째 주제는 낙태의 문제이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낡아빠진 문제이다. 아마 거의 임신에 대한 문제만큼이나 오래된 문제일 것이다. 이전에 살던 세대들도 그들이 원치 않은 임신을 중절하려고 애써 왔고, 그것을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사용해 왔다.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은 임신 중절이 병원에서, 의사에 의해 청해 지면, 널리 보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몇몇 나라에서는 정부가 자유로이 임신 중절을 하도록 허용하며, 심지어는 임신 중절을 복돋기까지 한다.
그래서 많은 나라에서는 소위 말하는 “생명 지지 운동”(Pro- life movements)이라는 것이 일어나 왔는데, 이는 태아가 임신 중절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행이도 생명의 가치는 아직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낙태 반대 운동의 핵심 인물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창조주로서 인식하며, 우리는 여성의 자궁 내에서 행해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낙태가 거의 모든 병원에서 행해지는 아주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항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몇몇 나이든 목사님들이 낙태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그 목사님들이 오늘날 그에 대해 설교하고, 무슨 일이 나고 있는 지 설명하며 회중들에게 임신 중절을 반대하는 경고를 한다고 내게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어느 누구도 임신 중절에 대해 즐겁게 느낄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은 조용히 허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낙태에 대해서 기독교적 양심이라는 것이 없는 듯이 보인다.
여자들은-그리스도인 여자들도 마찬가지로-임신중절이 죄라는 경고를 받지 않는 채 임신 중절을 행한다. 내가 알기로는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낙태를 허용한 적이 결코 없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역시 원래의 입장이었다. 교회는 자기 입장을 바꿨는가? 아마도 원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낙태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은 아무런 경고나 평가 없이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다시 타락한 것이 아닌가?
두 번째 주제는 가족 계획이다. 이것은 물론 첫 번째 주제인 낙태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부 사람에게 있어 낙태를 해야 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인구 조절 때문이다. 낙태는 인구 폭발을 억제하기 위해 필요하다. 오늘날까지 많은 나라에서 취했던 정책은 “둘만 낳기”운동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심지어“하나만 낳기”운동까지 퍼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기독교적 관점은 어떠해야 할까?
나는 인구 폭발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를 부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넓고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나라가 아니라 인구가 매우 조밀한 홀란드에서 왔다. 그곳에서는 거의 2킬로마다 마을이 하나씩 있다. 고국에서 나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인구 때문에 야기된 여러가지 문제들을 쉽사리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래,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 따라 인간을 벌주신 이래(창3장) 우리는 모든 것에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자동적으로 잘 되어 나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구 성장에 대해서만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이것은 거의 항상 잊혀져 있는 것인데-숫적으로 안정된 인구와 쇠퇴해 가는 인구에 대해서도 문제는 있다. 인구 대책으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감정적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다. 한가지만 언급해 보자. 만일 일을 할 수 있는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부족하다면 누가 노인들을 부양하고 먹여 살릴 것인가? 하지만 이를 따라서, 우리의 주제는 가족 계획이라는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상을 자녀들에게 열어 보이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세상에 여러 생물들이 기꺼이 받아들여 졌다고까지 말씀하신다(창1:28).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 근본적인 축복이 폐지된 곳은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가족 계획의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린아이들을 받으며 하나님을 위해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의 크기에 있어서도 역시 중요하다. 이는 부모들이 모두 대규모의 가족을 거느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고려해야만 하는 개인적 제한도 역시 있다. 때때로 질병 때문에 어떤 부모들은 한 명이나 두명 이상의 어린애를 가질 수 없을 때도 있다. 또한 고려해야만 하는 문제는 단지 자녀를 낳는 것 뿐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부모들은 이 점에서 다른 부모들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가족의 규모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방법적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다만 개략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가족 계획이라는 문제에 대한 완벽한 처리법을 제공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근본적인 시발점 즉 부모들은 하나님을 위해 양육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들을 받는 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가족의 규모에 대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요즘 나는 나이든 목사님들이 가족의 규모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단순히 대가족을 강조하신 그 분들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약간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기독교적 관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한국의 교회는 가족 계획에 대해 교회가 기독교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한국의 교회는 가족 계획에 대해 교회가 기독교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다만 주변 사람들 간에 풍미하는 사조를 따라가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인구 폭발을 억제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는 복지 사회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문제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것 같다. 인구를 억제하는 이유는 우리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다거나,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복지 사회에 이르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비록 이러한 진술의 타당성이 의심되긴 하지만 논증을 위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녀를 갖고, 양육하는 데 있어,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안락한 복지 국가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섬길 것인가 하는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요점은 그들이 사도들의 터 위에 거하면서 그들의 가족 내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 번째 주일 성수의 문제이다. 한국이 네비우스 방식(Nevius­method)에서 규정한 원리에 따라 복음화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네비우스라는 선교사는 또한 일요일을 지키는 것을 매우 강조했으며, 이것은 한국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 매우 엄격하다.
하지만 오늘날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어디서나 일요일날 일을 해야만 하는 무거운 압박감이 작용하고 있다. 일요일 문을 닫는 가게들은 아마 장사하기 가장 좋은 날을 놓치는 셈일 것이다. 공장 근로자들은 공장이 계속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일요일도 일을 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은 어떠한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이제 그는 3학년이 되었다. 그는 일요일도 억지로 학교에 나와야만 했다. 그가 단 한 번 학교에 나오지 않았을 때, 회초리로 얻어맞았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에도 입시 준비를 하기 위해 이 학교에 나가고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물론 그 이유는 학교가 학생들로 하여금 최종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독교 학교는 그 시험 결과를 하나님께 신실하고 그 분을 경배하는 것보다 더 중시했던 것이다. 교회에서 외치는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그러한 정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가? 아니면 다만 침묵을 지키고만 있는가? 교회는 주일 성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만방에 알리는가? 아니면 그 문제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도록 하는가? 그렇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한국 교회의 구세대 사람들이 너무나 엄격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주일을 지키지 않는 현상은 내가 보는 한에는 주일 문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한 데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부주의에서 연유된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예를 들어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왜 내가 특별히 이 예들을 선택했는지 의아해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이유는 그것이 코리아 타임즈(Korea Times)지에 언급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인 요소도 있다. 나는 한국 교회에 대해 내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교회 사람들과 이 문제들에 대해 여러 번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또한 나는 이 문제들이 오늘날의 학생들에게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이것들은 우리 사회에 있는 문제들이며,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적 대답을 찾아야 내야 한다. 학생들 자신도(만일 지금 현재 이미 이 문제에 부딪치고 있지 않다면) 몇 년 내에 그들의 삶에서 바로 이와 꼭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점을 예로 선택하는 데에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다. 모든 사람이 훌륭한 일이라고 동의하는 일을 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비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하지 말라고 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 가지 점들에 대해 기독교가 정말로 여기 교회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볼 수 있다. 내가 교회에 대해 알고 있는 바로 미루어 볼 때, 나는 그들이 꼭같은 경향을 보여 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 가지 예는 모두 꼭 같은 패턴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그 원래의 위치로부터 멀리 떠나고 있는데, 그러한 변화를 통해 그 위치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만 보면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전혀 없다. 어디서나 끊임없는 위협과 교회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노년과 쇠퇴의 징후이다.
그렇다면 그 치료책은 무엇일까? 오직 교회가 그 유일하게 견고한 기초, 즉 성경 위에 확고히 서는 것만이 치료책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그대로 교회의 기초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모퉁이 돌이시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서, 스터디 그룹에서 온전히 그대로 공부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온전히 그대로 강단에서 설교되어야 하며, 신학교에서 가르쳐져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회는 자신의 근본적 위치를 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로부터 삶과 사회의 문제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긴급한 논제들에 대해서 그 문제들은 분명하게 결말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집에 사는(엡 2:19)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그 집의 규칙 즉 하나님의 규칙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를 진정 그 모퉁이 돌로 모시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분을 우리가 순종할 수밖에 없는 하늘의 왕(엡 1:21)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만일 한국 교회가 이러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 할만큼 나이를 먹은 것이다.


참고 문헌
제 I 부는 J. Kamphuis 교수가 1975년 한국에 머물렀을 때 부산에 있는 고려 신학원에서 했던 강의 중 하나에 기초하고 있다. 그 강의들은 “Signalen uit Kerkgeschiedenis”라는 제목으로 1975년 Groningen에서 출판되었다. 특히 p. 9-18을 보라.
제 II 부를 쓰기 위해, 나는 데살로니가서, 히브리서, 계시록에 대한 몇 가지 주석을 사용했다. 특히 Van Leeuwen(데살로니가서), Grosheide(히브리서), Greijanus(계시록)의 주석을 참고.
제 III 부에 관해 한국 교회에 대한 탁월한 진단서는 P.R.M. Pattison이 지은 “Crisis Unawares, A doctor examines the Korean Church” OMF 1981이다. 그러나 나는 그 치료법에 대해서 Pattison 박사님과 의견이 다르다.
특별히 진술한 세 가지 주제를 택하게 된 것을 1983년 6월 29일자 Korea Times에 게재된 이 주제들에 대한 몇몇 기사 때문이었다.
낙태의 문제에 대해서는 세계에 있는 pro-life 생명지지운동(Pro-Life more ments)로부터 훌륭한 교육적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 대해서는 F.A.Schaeffer, C.E.Koop의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1979와 J.Douma의 Abortus, Amsterdam1975(충분히 이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화란어로 쓰여졌으며 번역되지 않았다), 그리고 “월간 고신” 1982년 8월호에 실린 이 보민 교수의 신중하게 쓰여진 훌륭한 글을 보라.
가족 계획의 문제에 대해서는 R.J.Rnshdoony의 The myth of over-population Nutley, New Jersey 1969(괄목할 만한 글이지만 자료 제시에 있어 약점을 갖고 있다)와 J.Douma의 Christe lijke ethiek, Capita Selecta I Kampen 1976에 있는 Milieubescherming 특히 4,6과 4,8을 보라(이것 역시 화란어로만 되어 있다).
주일 성수에 대해서는 Collectod Writings, I의 p205-230에 있는 세 가지 글이 있다.

*편집 자 주
위의 글은 「복음과 지성」 1983년 6월호 통권 39호의 “한국 교회의 연령에 대한 검토”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저자 소개  
N.H.Gootjes의 한국 이름은 고재수이며 화란의 Kape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80년 화란개혁 교회로부터 고신대의 겸수겸 선교사로 파송된 이래 현재까지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시다(1999년 10월 현재는 Canadian and American Reformed Churches의 교단 신학교인 Theological College of Canadian and Reformed Churches의 교수로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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