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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수 교수의 『세례와 성찬』(개혁 신앙 강좌 4)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09. 11. 6.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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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수 교수의 『세례와 성찬』(개혁 신앙 강좌 4)
정병길  (강변교회 목사)

 
우리가 잘 알듯이 개혁 신앙을 받은 교회는 ‘설교’하고 ‘성례’를 행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구속(救贖)의 은혜를 주시는 은혜의 수단이 ‘말씀’과 ‘성례’라고 성경의 교훈을 따라 믿기 때문이다. 성신께서는 목사의 입을 통하여 선언되는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여 회개와 믿음을 일으켜 새사람을 만드신다. 또한 새사람으로 거듭난 신자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말씀과 함께 성례도 사용하신다. 성례는 믿음을 일으키거나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는 못하지만, 믿음을 강화하고 인(印) 치도록 주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방도이다.
 
성례는 교회가 선택하거나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바르게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성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성례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단순한 연극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정교하게 의도된 ‘보이는 말씀’이다. 성례에 대한 교훈은 심오하여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많고, 그래서 이 교훈에 대한 논쟁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길지만, 성례가 교회에 주는 유익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을 결정할 만큼 지대한 것이다.
 
16세기의 개혁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주의 말씀에서 성례에 대한 바른 교훈을 잘 드러냄으로써 그 당시 성례를 변용하고 오용하여 기독교를 인간 종교화 한 로마 가톨릭의 그릇된 교훈을 물리치고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였다. 오늘날 심지어 개혁 신앙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 대신에 중생 여부를 묻고 주의 만찬이 없는 성도의 사귐을 도모하려는 것은 성례에 대한 교훈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단순한 부주의를 넘어선 이러한 무지의 시대에는 작은 바른 교훈도 큰 빛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올바른 교훈을 정착시키려면 근본부터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재수(N.H. Gootjes) 목사의 『세례와 성찬』은 교의학적으로 그리고 주석학적으로 이 주제의 논쟁사 및 해석사를 살피고 성경을 깊이 있게 주해하여, 주께서 성례를 제정하심으로써 교회에 주시려 한 선물이 무엇인가를 밝히 드러낸다.
 
본서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부록으로 도르트 회의에서 작성하고 화란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유아세례 예식문과 성찬 예식문에 대한 번역문이 붙어 있다(이 점은 예식문에 붙은 각주 참고).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세례 때의 약속들
                      제2장 부모들은 확신할 수 있는가 
                              - 도르트 신경 제1장 17조의 배경과 의미
                      제3장 주님의 만찬의 의미
                      제4장 표와 인
                      부록 1. 유아세례 예식문 
                            2. 성찬 예식문
 
제1장 ‘세례 때의 약속들’에서 저자는 유아세례 시 유아에게 성신의 약속이 있음을 선언하는데 그 뜻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지금 아이에게 성신이 임하였다면 그 아이는 이미 중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고 따라서 금명간에 자동적으로 공적(公的) 신앙고백에 이를 것이 아닌가? 아니면 우리는 아이의 상태를 잘 모르고 그 약속은 다만 선택된 일부의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선언적인 것인가?
 
저자는 이것은 언약의 약속이며 이 언약 위에서 유아세례를 베풀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고 또 개혁자들의 교훈임을 밝힌다. 유아세례의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이지 아이 안에 내재해 있거나 발생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아세례는 성신이 세례 전에 유아를 중생하게 하였을 가능성에 근거하지 않고 언약의 실체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을 보면, 믿는 자의 유아들은 언약에 속한다. 따라서 그들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언약을 다 이루사 신실함을 보이신 하나님께서 이를 믿음으로 붙잡고 순종하는 자에게 유아세례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다.
 
저자는 자신이 처한 목회 상황에서 ‘추정된 중생’이나 하나님의 선택이 유아세례를 베푸는 근거라고 오해한 사람들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기 입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도 결국 믿음의 도(道)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 이처럼 세례의 유용성을 결과론으로 판단하는 것은 저자가 다룬 문제와 상통한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자녀로 하여금 유아세례를 받도록 하지 않고 자녀를 주의 교훈으로 가르치지 않고 방치한다.
 
유아세례의 근거가 ‘언약’에 있기에 그 언약을 ‘믿음’으로 붙잡고 ‘순종’으로 실천하여 의무를 다 수행해야 한다는 성경의 교훈은 부모를 유아세례 서약문 앞에 세운다. “그대들은 지금 이 아기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바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친히 사람의 본분을 이 아기에게 보이기를 힘쓰며, 이 아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와 함께 기도하고, 우리의 믿는 도리를 따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시렵니까?” 저자는 학자답게 무언으로 교인들에게 이를 강력히 호소한다
 
제2장 ‘부모들은 확신할 수 있는가 - 도르트 신경 제1장 17조의 배경과 의미’에서 저자는 성례에서 선택론을 앞세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그의 확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 그러나 선택과 언약은 함께 서고 함께 넘어지는 하나의 교리이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도르트 신경 제1장 17조의 작성 과정을 살피며 변증한다.
 
제3장 ‘주님의 만찬의 의미’에서는 주님의 만찬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고찰한다. 칼빈 선생의 가르침과 그 토대에서 작성된 예식문의 뜻을 살피고, 현시대에 나타나는 오류들을 지적한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일 뿐이라는 리델보스의 해석학적 오류와 주의 만찬을 다만 식사로 여겨 결국 기념설적 약점을 드러내는 에릭슨의 교의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주의 만찬의 요소와 시행의 뜻을 기독론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즉 교회와 구원의 출발점과 완성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평범하지만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볼 때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개혁 신앙을 토대로 한 성경의 교훈 위에 굳게 서서 주의 만찬의 여러 면을 해명한다.
 
제4장 ‘표와 인’은 성례의 본질을 논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표와 인으로 불러야 할 이유를 교리사적으로 개괄하고 해석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성례를 표라고 부른 것은 어거스틴 선생에게서 기원하는데, 교회에 따라 그 표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달랐다. 그렇게 의미를 달리하는 주요 요소는 ‘성례와 은혜의 관계’라는 객관적인 요소 ‘성례로 전달되는 은혜가 어떻게 수혜자의 것이 되느냐’ 하는 주관적인 요소이다. 로마 가톨릭은 성례 자체가 은혜를 담고 있고 수혜자 속에 들어가서 믿음과 상관없이 은혜를 전달한다는 마음 편한 주장을 한다. 그런가 하면 취리히의 신학자 츠빙글리 수혜자의 믿음을 강조하여 결국 표를 아무 의미가 없는 빈 껍질로 만들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하여 이 문제에 대한 루터 선생의 기여를 다루고 이어서 우리의 신학자 칼빈 선생의 성경에 따른 균형 잡힌 성례관을 소개하면서 그가 사용한 표와 인이라는 명칭 설명한다. 표는 그 자체가 은혜의 실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표상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덕과 연결하는 것이다. 또 표는 그리스도의 은덕이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수혜자에게 임했음을 확인하고 보증하는 인 침이다.
 
그러나 저자의 만족과 동시에 불만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칼빈 선생은 표와 인이 성례임을 바르게 지적했을지라도 표와 인을 따로 구별한다. 즉 ‘표는 제시하고 인은 확인한다’고 하여 결국 표와 인을 다소 떼어 놓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칼빈 선생 앞에 성경을 들이밀며 따진다. 로마서 4:11을 따라 표와 인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면 그 배경이 되는 창세기 17장에 올라가 표와 인의 관계를 좀 더 면밀히 살펴서 이 고귀한 용어를 그 실질에 맞게 일호(一毫)의 빈틈도 없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표징과 실질의 관계를 살펴 주해한 결론은 “바울은 인을 표를 보충하는 말로서 사용하지 않고, 표의 의미에 대한 해명으로 본다. 곧 인은 인 치는 표이다. 여기서 표와 인의 기능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성례론에서 상식적으로 구별되는 두 용어는 성경의 용례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두 단어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자는 ‘표와 인’이라는 칭호에 접속사 ‘와’가 들어간 것도 불만일 지경이다. 필자는 여기서 누구 편을 들 입장이 아니다. 다만 칼빈과 저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교회 안에 영향을 끼치는 오류를 씻어내고 주의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교훈을 취할 때 우리는 성례가 얼마나 정교하게 의도된 은혜의 방도이며, 성례 자리에 그리스도와 성신께서 함께하시며 그 방도를 사용하여 나를 주의 것으로 삼으셨음을 확증하심으로써 모든 생활에서 죄를 버리고 믿음을 좇아 살게 하시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감사하게 된다.
 
끝으로, 편집자는 저자가 속해 있는 화란 개혁교회와 캐나다 개혁교회의 유아세례 예식문 및 성찬 예식문을 부록으로 붙이고 있다. 이는 저자가 신앙고백과 이 예식문의 파수자(把守者)로서 이 글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이 글을 잘 읽도록 하려는 것이 첫째 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식문 자체가 성례에 대한 개혁 신앙의 결정물이기 때문에 주의 진리를 사랑하고 그 위에 서서 살고자 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종합적인 지식을 얻어 바른 교훈과 반성에 이르라는 뜻이 있는 듯 보인다.
 
본서는 본격적으로 성례의 모든 것을 전하려는 목적에서 쓴 책이 아니다. 저자가 목사 겸 신학자로서 교회에 제기된 문제들에 답하기 위하여 쓴 것이고, 그래서 책에 수록된 각 장의 논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만큼 현실적이고 목회적이다. 저자는 깊은 학자적 통찰력으로 성례의 이 면 저 면을 가르쳐 결국 성례의 참뜻을 깨우치게 한다. 저자는 성례로 신학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개혁 신학에 대한 확고한 믿음 위에서 쓰고 있으므로 이 글은 상당히 신학적이기도 하다.
 
본서는 학자적인 깊은 통찰력과 함축 및 길고 치열한 역사적 논쟁을 그 바탕에 깔고 있어서 어떤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모든 지식과 지적 상상력을 동원해 가면서 읽으면 결코 그 노력이 헛되지 않고 오히려 개혁 신앙의 깊은 세계와 하나님 말씀의 오묘를 맛보게 될 것이다. 잘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으려면 때때로 상당한 수고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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