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선 목사의 생애와 신앙인격


강용원 (고신대학교 교수 기독교교육학)


Ⅰ. 서론


 주남선 목사(1888-1951)에 대한 자료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심군식 목사가 집필한 주남선 목사의 전기인 ‘해와 같이 빛나리’인데, 이 자료 외에는 의외로 그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필자는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필자 자신도 그 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제한된 자료이지만 그에 관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과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글은 제한된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곳에 나타난 주남선 목사에 대한 느낌과 인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 것이다.



Ⅱ. 생애


 주남선 목사는 1888년 9월 14일 거창에서 한학자 주회현의 3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17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그 후에는 그 지방 군수의 비서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1년 9월에는 3개월간의 잠업실습소를 수료하고, 누에 사육의 일을 하게 된다.


 그가 기독교와 접하게 된 것은 1908년, 그러니까 그가 스무살 때였다. 그는 시장에서 전도하는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받게 되었고, 기독교에 입신하였으며, 1911년 12월에는 호주 선교가 맹호은으로부터 학습을, 그리고 다음해 6월에는 같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그는 1914년 4월에는 거창읍 교회의 서리집사에 임명되었으며, 1919년 2월 28일에는 동 교회의 장로로 장립하게 된다.


그는 1914년 5월 10일에 남술남 사모와 결혼을 하였으며, 슬하에 4남 2녀를 두게 된다. 그는 복음을 더 잘 공부하고, 효과적으로 교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가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또 장로가 된 1919년 3․1 독립운동이 발발한 해였다. 거창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20일에 일어났는데, 그는 오형선, 고운서 등과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해 8월에는 국권회복운동에서 관여하였다.


그 후 주남선은 독립군 자금지원과 의용병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 후 주남선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게 되는데, 이 어간의 그의 구금과 옥고, 그리고 신학교 입학 연대 산출에서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들을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이상규, 8).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거창읍 교회의 전도사와 권서인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에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다음 해인 1931년부터는 거창읍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1938년 12월에는 거창읍 교회의 위임목사직에서 강제 해임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여러 차례 경찰의 호출을 당했고, 1940년 7월에는 일제 검거에서 체포되어 해방이 된 이틀째인 1945년 8월 17일까지 진주, 부산, 평양 등에서 영어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 주남선 목사는 다시 거창읍 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하였으며, 경남노회의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특히 그는 고려신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이사장으로, 또한 고려고등성경학교의 설립이사로 활동하였고, 거창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의 일을 맡기도 하였다. 주남선 목사는 6․25가 발발한 다음해인 1951년 3월 23일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Ⅲ. 신앙의 면모


1.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


 그는 6․25가 발발하였을 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돌보았다.(심군식, 207ff). 그는 적들의 총부리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교우들을 독려하면서 예배를 계속하였다.


박손혁 목사는 주남선 목사의 장례식에서 행한 약력소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사변 발생되자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드린 후 피난을 단념하시고 동역자들을 역방(歷訪)하시면서 교회와 양떼를 사수하기를 권장하시고, 폭탄과 총탄이 비오듯하는 때라도 아직도 남아 있는 교인이 있지나 않나 하여 집집이 찾아다니셨고, 8월 29일 함양지방으로 순회하시든 중, 개평교회서 복음진리를 힘서 증거하시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구금을 당하셨다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놓임을 받으시고․․․”(박손혁, 35) 이와 같이 주남선 목사는 한마디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주남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대 운동에 앞장서므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것 역시 그가 그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 죽음을 주관하시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가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는 하나의 예는 평양형무소에 있었을 때의 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1941년 11월 10일부터 그의 머리 뒤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점점 더 험해갔다. 부스럼은 목 뒤 급소에 생겨 목을 움직일 수 없이 통증을 가져오게 되었다. 발치대종이었다.


의사가 와서 치료를 하였는데, 수술을 해서는 안되는 종기에 칼을 댔기 때문에 더욱 악화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를 치료한 의사는 주목사에게 병보석으로 나갈 것을 권했으나 주목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죽기로 각오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목뒤의 종기로 너무 괴로워 견딜 수 없게 되자 의사는 다시 간곡히 병보석으로 나갈 것을 권했지만 주 목사는 반대하였다. 그가 꿈에라도 바라는 것은 순교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서도 12월 2일에는 법정에 출두하는 검사출정명령을 받게 된 것이다(심군식, 185F). 한마디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죽을 것을 각오한 사람이었다.


 2. 명예를 앞세우지 않은 사람


  죽음을 초월해서 산 주남선 목사는 인간이 주는 영광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가 국가를 위해서 행한 애국적인 일들은 표창 받아서 마땅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정부는 3․1절을 기념하여 주남선 목사에게 애국표창을 하겠다고 제안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위하는 일은 국민의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서는 꼭 식장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목사가 갈 곳이 못됩니다.”(심군식, 271)


 이와 같이 주남선 목사는 자신이 받는 영광에서 관심이 없었다. 개인적인 명예나 복지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된 후 초대 국회의원을 선거하는 과정에서도 주 목사의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국회의원의 출마를 종용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표현태씨를 대신 추천함으로써 그 분의 후광으로 표현태씨가 무투표 당선되기도 하였다. 만일 주남선 목사가 명예나 물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들 그다지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자신의 명예와 영달에 관심이 있었다면 처자를 버려두고 7년간 옥중 생활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남영환, 38)


 그는 개인의 영광에니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반면에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전성도 목사는 주남선 목사에 대해서 술회하면서 “주 목사님은 교회와 교단을 생각하는 마음이 뜨거운 분이었다.”(전성도, 37)고 묘사하고 있다.


그 당시의 불편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나 기타 교단일이 있게 되면 거창에서부터 가능한한 참석하였고 애쓰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자기 교회만 그런대로 되면, 상회 일이나 공동의 일에는 무관심한 교역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도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주남선 목사는 해방 후에 경남노회의 노회장, 고려신학교의 초대 이사장 등의 직분을 맡았으나, 그는 이 일을 명예나 영광으로 알기보다는 하나님과 교단을 섬기는 한 방편으로 받아들였음에 틀림이 없다. 오 병세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주 목사님은 자신을 나타낸다거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선전효과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너무나 자기 선전에 급급하는 이 시대에 주목사님 같은 분이 사모가 된다. 그는 실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분이었다.”(심군식, 8)


 여기에 덧붙여 주남선 목사는 후배를 아끼는 마음, 신앙의 동료, 형제, 교인에 대한 깊은 배려와 사랑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남영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1951년 건강이 돌이킬 수 없이 쇠약하였을 때, 이 사람의 목사안수를 위해 눈보라가 치는 밤에 장작을 실은 트럭을 타고 부산까지 오셨다. 그 분이 종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시고 별세하시기까지 고통가운데서도 한국교회와 신학교와 거창교회를 염려하셨다.”(남영환, 39)



 3. 외유내강의 인격자


 주남선 목사를 알고,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주남선 목사를 온화한 인격의 소유자였으며, 겉은 부드러우나 속이 강한 분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공석이나 사석 상에는 남을 공격하는 언사를 쓰지 않았다. 옳고 그름은 분명히 하였으나, 남을 헐뜯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영환 목사는 “주남선 목사님을 만나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온화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만났을 때는 환갑을 지낸 2년 후였으니 나보다는 30년이나 선배셨다. 그러나 권위의식이란 털끝만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언제나 교회에서 장로들과 함께 있을 때도 동역자처럼 대해 주었다. 내게만 아니라 모든 전도사들에게도 그와 같이 대해 주었고 그런 인품이 주목사님과의 거리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남영환, 38)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당황하거나 근심을 띠지 않았으며, 유우머는 없어도, 다가오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 한 예로 경남노회가 모였을 때에 모 목사가 훨씬 연배인 주 목사에게 입에 담기도 힘든 폭언을 하였어도 시종일관 웃음으로 넘겼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남영환 38). 물론 그에게도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인격과 포용성 앞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거창교회도 주목사님의 전임이 김길창 목사였으므로 은연중에 조선신학교의 세력이 일부 장로들과 청년들 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주목사님의 온화한 포용성과 인격에 압도되어 힘을 쓰지 못하였던 것이다.”(남영환, 39)


 전성도 목사도 주남선 목사를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분”으로 회상하고 있다.(전성도, 36). 오병세 교수 역시 주 목사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어른은 평화스럽고 말씀은 조용히 하였으나 어려움이 올 때에 강철 같은 신앙의 소유자였다. 참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심군식, 8)



 4. 진리를 파수한 사람


 주남선 목사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충직한 복종이었다. 예배를 인도할 사람이 입게 될 옷의 옷고름이 뜯어졌을 때에도 그는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바느질을 하지 않고, 그냥 동여매고 예배를 드렸다는 일화는 그가 말씀을 얼마나 중요하고 여기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심군식, 147).


무엇보다도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종이었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그가 기록한 옥중기의 초반에서 서론격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사참배는 일본국신(日本國神)을 숭배하는 일종의 우상예배와 종교의식이다. 유일신(唯一神)종교인 기독교신자로서는 양심으로 생각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나 생명을 내놓을 지언정 신사참배는 절대로 못할 것으로 나는 각오하였다.”(박윤선a, 22)


주 목사는 신사참배의 강요라는 현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기도와 말씀 묵상에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특히 그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해답을 얻게 된 것으로 스스로 서술하고 있다.


 “1938년 4월부터는 거창경찰서로부터 나와 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므로 거절하였으며 6월경에 이르러서는 거창 가조리 기도실에서 2일간 금식기도 하면서 묵시록을 수십독 하는 중 신사참배는 말세에 나타난 바벨론 우상예배로 더욱 인식이 되며 배격할 용기를 얻는 남아에 그해 9월에 이르러서는 평양서문외예배당에서 모인 총회에서까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즉시 각 노회대표로 평양신궁에 봉고제를 실행하게 된 것을 본 나로서는 오호라 조선교회의 전도를 생각하여 눈물의 탄식기도를 아니할 수 없었다.”(박윤선a, 22-23)


 그의 옥중기를 보면 요한 1서 4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제목의 설교 요지가 나타나고 있다. 이 설교는 세 개의 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독생자를 주셨고, 성신을 주셨고,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우상예배인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박윤선a, 24)


 옥중기에 보면 그가 검사로부터 받은 심문의 내용을 스스로 정리해 주고 있는데, 1941년 12월, 1944년 12월, 1945년 5월에 있었던 심문의 내용이다. 이것을 대화식으로 다시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검 사: 일본 역대 천황은 현인신인 줄 아느냐?

주 목사: 일본 역대 황제는 하나님께서 일본국가를 통치하라고 낸 통치자로 압니다.


검 사: 역대 천황의 신을 어떻게 아느냐?

주 목사: 사람의 죽은 신은 사람의 죽은 신인 고로 사신일 줄 압니다.


검 사: 천조신은 여호와와 같은 신인데 왜 다른 신인줄 알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느냐?

주 목사: 여호와의 신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창하시는 참신이시며 그 외의 모든 신은 사신이요 거짓 신이라.


검 사: 예수가 재림하여 천년왕국이 되면 천황폐하가 통치권이 있겠느냐?

주 목사: 천년왕국 시대에는 예수 믿는 사람만이 통치권이 있을 것이니 천황폐하는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통치권이 있을 수 있다.


검 사: 일본은 신사참배를 숭배하는 국가인데 천황폐하가 예수는 않 믿을 터이니 어떻게 되겠느냐?

주 목사: 물론 예수 안 믿으면 통치권은 없을 것이다.


검 사: 예수 재림시에는 일본국가가 파괴되겠느냐?

주 목사: 물론 일본국가 뿐만 아니라 전세계 불신국가는 망할 것이다.


검 사: 전번 심문한 사실대로 재심을 하고도 지금도 아무런 변동이 없느냐?

주 목사: 하등의 변동이 없다.(박윤선a, 25-27)


 진리를 파수하는 일에 그는 칼날처럼 예리하였다. 성경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온유한 자였으나, 말씀 앞에서는 엄숙하며, 진실하였던 것이다. “어쩌만 이와 같은 면 때문에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던 배성근 목사나 손순열 목사의 눈에는 무서운 독재자로 비쳤을지도 모른다.”(남영환, 39)


 해방 후에 남 목사는 국기경배에 대한 문제를 그의 설교에서 언급했는데, 우리는 그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적으로는 국기 경배문제가 또한 그 하나이다. 총회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지우기 위하여 정부에 교섭위원을 파견하였다. 신문지상․․․의 발표에 의하건대 안호상 문교부 장관은 ‘국기 경배는 당연히 하여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이 문제를 인연하여서 경향 각지를 막론하고 교육계에는 심대한 영향이 미치고 있으니 그 내용인즉 학교당국자들이 국기에 경배하지 않는 학생에게 대하여 퇴학처분을 내리는 해괴한 처사를 단행하는 그것이다․․․ 패망한 일본이 강요하든 교육노선을 우리나라의 교육계가 답습할 이유는 무엇인가?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주남선b, 9)


우리는 이런 기록들을 보면서, 고신측 인사들이 가졌던 성경에 대한 충직성과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는 충직한 말씀에의 복종을 읽을 수 있게 된다.


 5. 기도의 사람


  주남선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전기를 보면 그가 기도의 종이었으며,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젊었을 대, 누에를 기를 때의 한 이야기가 그러하다. 1912년 9월 진주 잠업 강습고 수료 이후 한번은 양잠을 하는데 누에가 전명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동료들의 비방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딴 방으로 가서 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결과 누에들이 완전히 소생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어 당시 총독을 상장가지 받았다는 신앙일화가 있다.(박손혁, 34)


 또한 그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에 장질부사에 걸린 일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형무소에서 장질부사로 많은 죄수들이 사망하는 중 나도 장질부사에 걸려 20일을 신음하는 오열이 극도로 달할 때에는 한 감방에 있는 죄수들이 상제노릇을 하겠다고 말하였으나 나는 말하기를 내 생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니 염려마시오 하고 기도하기를 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이 흐르도록 기도하셨으니 이 복을 통하여 다소 체험하게 됨을 감사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 후로 열기가 점점 물러가고 병이 쾌차함을 얻었다.”(박윤선a, 26)


 그를 가까이 했던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평소에 별로 소리를 내어 기도하지는 않았으나, 조용히 옆에서 보면 언제나 흐느껴 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기도하고 일어나는 자리는 언제나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 남영환 목사는 그의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 때는 교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격동기였으므로 어려운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러한 어려움 때문이라기보다 항상 남의 죄를 책망하기 전에, 자신의 죄에 대해 자책을 느끼지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분의 통회하시는 겸손한 모습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부끄럽고 가슴이 뜨끔해 진다.”(남영환, 39)


 특히 그의 생애는 기도의 확신과 응답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긴 옥고의 기간 중에 그는 제목을 정하여 기도하였으며, 그의 기도는 조목조목마다 성취되고 말았다. 주남선 목사가 감옥생활을 하는 주에 기도한 제목들을 “① 말세에 바벨론 우상제국이 파괴되고② 신앙자유를 허락하여 달라고 했으며 ③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루어 달라고 하였으며 ④ 일본 신사는 소멸되고 ⑤ 조선교회 지도자 교양을 위하여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며 ⑥ 거창에 성경학원 하나 설립․․․”(박윤선a, 27)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도는 해방과 그 이후에 성취된 것이다.



6. 무언의 실천가


 주남선 목사는 “생활로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길이길이 무언의 설교를 하시는 분”이었다.(전성도, 36). 그는 어렸을 때에도 효자상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주경중, 35), 삶 속에도 배운 바를 행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실천에 대한 예는 허다하다.


그는 손님대접을 잘하였다. 그의 장남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종종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은 많았다. 이들의 대접을 최선을 다하여 하다 보니 자연 자녀들에게 대해서는 등한할 수 밖에 없었다.”(주경중, 34)

무엇보다도 그가 동료 교역자들을 독려하며, 전쟁 중에도 피난하지 않고 교인들을 돌본 일이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서 기도자로의 본을 보인 것은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주남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따라간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전의식이었다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였던 것이며, 또한 우리가 행하는 선도 돌아오는데, 그것 역시 선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다(주남선a, 19f)


그가 설교에서 인용한 이야기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것이 있다. “미국 워싱톤에 있는 중앙청 안에 어떤 회의실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상한 사진이 항 장 걸려 있다고 한다. 그 사진은 전면에서 보아도 그 사진의 눈이 바라보는 이를 내려다보고 우편에서 보아도 똑같이 바라보는 이를 내려다본다고 한다. 따라서 그 방안에서는 그 사진의 눈이 어느 곳이나 다 보고 있는 것 같이 느낀다고 하는 데 하나님의 눈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요! 피할 수는 절대로 없고 은익 할 수도 없는 것이다.”(주남선c, 13)


 오병세 교수는 “그 어른의 설교에는 많은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웅변은 아니었으며, 부흥사도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고, 강한 무기가 있었으니 곧 진실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수단 방법 등은 찾아 볼 수 가 없는 것 같았다. 그 어른에게 시원스럽다는지, 훤하다는 것은 엎어도 그에게서 참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었다.”(심군식, 7f)고 회고하고 있었다.



 7. 지도자 양성의 꿈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기도한 중요한 제목 가운데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수도원의 설립과 거창에 성경학교를 세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와 거짓 신의 파괴, 조선의 해방과 신앙의 자유와 더불어 지도자 양성에 대한 꿈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복음사역의 초창기에 자기 자신이 30여 교회를 돌면서 일하던 상황 속에서 지도자 양성의 과제는 절실하게 다가왔으며, 잘못된 신앙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절실한 과제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교육의 과제를 의미있게 취급함으로써 교회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주었던 것이다. 물론 고려신학교 건립에 있어서의 주도적인 역할은 한상동 목사가 맡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가 옥중에서 교육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옥중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해방 직후 평양 산정현교회 하층에서 유하면서 한상동 목사의 말씀이 신학교를 설립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동감이 되었으나 나는 동년 12을 20일 경에 남한으로 나오게 되고 한상동 목사님은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다가 1946년 3월 남한에 와서 마산에서 만나 진해 해군 수양소 좋은 건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진해를 동반하여 건물을 본 즉 적당한 고로 신학교를 설립키로 작정하고 한상동 목사께서 경성에 체재하는 박윤선 목사를 모시고 와서 진해에서 하기 신앙강좌를 2개월간 계속하면서 경남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신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동년 9월 20일에 부산진 금성중학교 상층에서 개교식을 거행하고 수업 중에 마침 미국으로부터 한부선목사가 나와 교수로 돕게 되었다. 신학교 부속기관으로 고려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게 되어 교장 오종덕 목사가 취임케 되었다. 거창 시찰구 직영으로 보통성경 학원을 설립하게 되었으며 1950년 3월 경남노회에서 인증을 받게 되었다.(박윤선a, 27)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거나 부각시키고 있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어쨌든 그는 설립자 중의 한 명 이었으며, 초대 이사장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부속기관이었던 고려고등성경학교의 설립이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그의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학교설립에 대한 진솔한 진술을 보면서, 여기서도 그의 충직하고도 진실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주남선 목사는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그의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는 이상규 교수의 표현을 다르면, “관계적”차원의 봉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 교수는 주남선 목사의 한상동 목사의 이념적 일치와 경남 노회의 지도적 인사라는 점에서의 협조적인 관계, 그리고 거창이라는 당시로서는 내왕하기에 어려운 거리관계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이상규, 9). 물론 그가 더 오래 생존하였다면 그 관계의 질이 다르게 발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해방이후의 여러 가지 어련 상황 속에서도 말씀의 순수한 회복과 신앙양심의 청결한 회복을 위한 회개 운동을 주도함으로 고려파 운동을 낳게 하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혹시 우리가 그와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나 한상동 목사와의 관계를 추적해 나감에 있어서, 외부로 드러난 일만을 가지고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런 평가는 그가 살아온 가장 기본적 삶의 태도와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주도권을 잡았으며, 누가 전면에 나서서 일했느냐를 그렇게 중요한 기준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Ⅳ. 결론


 주남선 목사에 관한 소수의 자료를 읽고 정리하여 보았다. 주남선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다가 간 충직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박손혁 목사는 주남선 목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목사님은 성품이 외유내강하시고, 사명에 충실하시며, 진리변호에 일점도 타협하시지 아니하시나, 그러나 의리에는 강직하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여 무언의 실천자였으며, 환난에는 선히 인내하였고, 교회의 타락과 민족의 부패를 인하여 눈물의 기도로서 그 생활을 일관하신 이 나라 민족과 교회를 위한 제물이 되신 겸손의 사람이시었다.”(박손혁, 36)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죽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주남선 목사를 감히 순교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한 평생이 주님을 위한 삶이었다면, 그는 충분히 순교자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죽지 않는 순교자’였으며, 우리는 그의 후예가 됨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끝으로, 1952년 3월호 「파수군」의 권두언을 인용하고자 한다.


 “순교는 기독교인의 최고의 축복이요 최대의 은혜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최고 최대의 것이기 때문에 이 축복 그 자체가 또한 비할 데 없는 고난이기도 한다. 주를 위하여 그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보통 신앙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순교라는 것을 비상한 때에 있는 일이다. 언제든지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신앙의 길에는 비상시와 범상시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비상인 것이다. 고로 참 신앙자에게는 그 생활이 날마다 순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순교생활이 없는 곳에 참 순교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오인(吾人=박윤선)은 주남선 목사의 일생이야말로 외형으로는 비록 순교자가 아닐지라도 순교자에게 바치는 존경과 찬사와 흠모를 아끼지 않는 바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 목사를 순교의 제불로 받으시지 아니하고 순교 생활자로 일생을 마치시게 한 것을 또한 감하는 바이다.


옥중생활 수년이요 인민국 점령하의 무서운 목자생활을 경과하신 목사님의 다난하신 신앙생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는 인(人)을 매혹하고 황홀케 하는 화려한 것이 없다. 침묵이며 실천이며 그 양을 위하여 생명을 개의치 않고 사수한 한결같은 충성뿐이다. 그리하여 평범한 병사(兵士)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같은 범인으로 하여금 누구든지 이 주 목사님의 생애를 모본하여 그 일생을 순교생활로 바치게 하는 도표가 되게 하신 것이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아-멘.”(박윤선b, 5)



<참고도서 목록>


남영환, “개혁주의 신앙의 구루터기”, 월간고신 (86. 4), pp. 38-39

박손혁, “주남선 목사 약력”, 파수군 15(1952.3), pp. 34-36

박윤선(a), “고 주남선 목사 옥고기”, 파수군 15 (1952.3) pp. 22-27

박윤선(b), “권두언 - 순교생활”, 파수군 15 (1952.3) p. 5

심군식, “해와 같이 빛나리” 서울: 소망사, 1976

이상규, “초대 이사장이며 설립자 주남선 목사와 고려신학교”, 고신대학보 208(1996.1.11), pp. 8-9

전성도, “무언의 설교자”, 월간고식 (86.4), pp 36-37

주경중, “따뜻한 가정을 가져 볼 겨를이 없었던 아버지”, 월간고신 (86.4), pp. 34-35

주남선(a), "선이 돌아옴“, 파수군 61 (1957.3), pp. 19-22

주남선(b), "예수는 돌이시다“, 파수군 3(1949), pp. 7-10

주남선(c), “죄가 돌아옴”, 파수군 60(1957.2), pp. 12-16

주남선(d), “중대한 하나”, 파수군 64(1957.3), pp. 7-11

주남선(e), "하나님의 사람아“, 파수군 15(1952.3), pp 31-34




출처: 고신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