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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과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

에드먼드 클라우니

by 김경호 진실 2010. 2. 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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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이전의 몬타누스주의나 중세의 분파 운동, 종교 개혁 시기의 재세례파(“열광주의자들” 또는 신령파)와 비슷한 갈등을 정통교회에 대해 일으키는 카리스마 운동이 교파의 경계를 넘어서 세계로 퍼져 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 성경에 충실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클라우니는 성경과 개혁파 전통에 충실하게 성경의 충족성에 근거한 입장을 분명히 한다. 모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일일이 나열한 후에 클라우니는 “신자로서 우리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하며(158=178), 그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신학은 무엇인가 하면서 성경의 입장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구약에서도 성령님께서는 온전하게 하나님 백성들 안에서 작용하여 사막에서도 그들을 가르치시며(느 9:20),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살피셨으며(사 63: 10-11; 행 7:51), 그 성령님이 그들 안에 계속해 계신다고 했다(학 2:5)(54=61). 그리하여 클라우니는 “오늘날과 똑 같이 그 때에도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속에 역사하였으며,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그 때에도 오늘 날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워필드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소개하고 있다(296=333). 그러므로 본질상 성령님의 사역은 구약이나 신약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 아니하다. 물론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구약 성도들이 성령님 안에서 받고 믿고 고대해 온 그 약속이 성취된 상태에 들어가게 하시는 더 큰 복을 주셨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더 복은 바로 그들이[구약 성도들이] 찾던 복이었으며, 그들이 앞으로 우리와 함께 받을 복인 것이다”(55=63).


  

둘째로,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도 클라우니는 성경 주해에 근거하여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과 일치하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명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69=79). 왜냐하면 성령 세례는 성령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이라는 최초의 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또 성령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세례와 충만은 새 언약의 인침이고,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모방하여야할 제자들의 영적인 발전의 한 일화가 아니고, 구속사의 새로운 시대 시작을 보여 주는 것이다”(69=79). 또한 성령 충만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충만케 되는 것과 떼어낼 수 없는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충만케 된다는 것이고, 구주와 그의 사랑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70=80).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더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더 깊이 누려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계시적 목적에서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졌던 사도적 이적은 중단되었음(The cessationsoftheapostolicsigns)을

클라우니는분명히한다(241-44=269=173. 특히 244-272f.). 물론 성령의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오늘날에도 이적이 있을 수 있지만 오늘 날에 일어나는 이적과 사도적 이적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개혁파 사상에 충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일어 날 수 있는 오늘날의 이적과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서로를 권면하는 것은 전혀 계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예언의 은사에 대한 클라우니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클라우니는 오늘날에도 예언이 있을 수 있음을 가장 온건하게 주장하는 웨인 그루뎀의 주장을 잘 검토한 후에 그런 주장도 논박하면서 전통적 개혁파의 이해를 잘 대변한다: “그의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계시의 최종성과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궁극적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할 때의 성경의 충족성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는다”(268=300).

  

그러므로 클라우니는 구루뎀이 말하는 ‘작은 예언’(a small prophecy)이라는 용어를 성령의 조명이라는 고전적 용어로 대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의 조명에 대한 온전한 인식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연구하고 설교하는 일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의 인도를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구하는 빛을 받은 지혜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268= 300). 왜냐하면 “성령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지혜의 은사를 통해서 교회를 진리의 지식과 순종의 길로 이끄시기” 때문이다(268= 300, 강조점은 필자의 것임). 성경의 충족성을 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새로운 계시가 있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주어진 계시에 충실한 신학을 하고, 그 성경의 충족성에 충실해야만 한다.



이승구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이승구 교수님이 쓰신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개혁파적 교회론(1-4)'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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