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상림 목사 일대기

최상림 목사는 서기 1888년 11월 27일 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결혼 후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십리 길이 넘는 기장읍교회에 도보로 출석하시다가 이듬해 고향에 죽성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의 길에 나선 그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30년에 남해읍교회에 부임하여 남해군 복음화를 위해 전도집회를 하시며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했다. 1938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바람이 거세어지자 그 당시 경남 노회장이었던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노회를 해산시켜 전국 노회 중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가결하지 않는 노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길로 연행되어 형무소에 수감되기를 49회나 번복하면서 옥고에 시달리다 광복을 눈 앞에 둔 1945년 5월 6일 새벽 3시에 평양형무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평생을 주님의 뜻을 받들며 정의와 겸손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다가 순교하신 최상림 목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남해읍교회 교우들이 순교의 비를 세운다.

1998년 5월 15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진주남노회 남해읍교회

경남노회를 이끌어 오신 최상림 목사

최일구(전 총회장, 재건서면교회 원로목사)

글을 시작하면서

나의 선친이 되는 최상림 목사에 대한 전기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순교자 기념 사업부에서 발간한 [순교자 전기] 제 11권에 이미 발표된 바 있다. 그 때는 내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묻혀있던 자료들을 내가 아는 대로 제공했고 또 아버님이 생전에 시무하던 교회들의 기록에서 발굴해서 김요나 목사가 책을 펴냈다. 그러나 내가 평생 몸담아 봉사한 재건교회 역사 편찬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아버지에 관한 글을 쓰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내 나이가 83세인데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효도를 하는 셈으로 글을 써 보고자 한다.

아버지의 역사는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세월은 50여 년이 흘러갔다. 머지 않아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인데 행여나 이 글이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아는 만큼 글로 남기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 믿고 엮어보기로 한다.

나라가 망하고 교회가 가장 어려울 때 생명을 바쳐 신앙을 지키다가 외롭게 가신 한 선각자의 삶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1. 출생에서 성장기까지

나의 아버지는 1888년 음 11월 27일 경남 기장읍 달발 마을에서 조부 최영석과 조모 박효심 사이에 첫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위로 딸이 둘이 있는 집안인지라 아들의 출생은 가정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최씨 가문이 언제부터 기장읍에서 10리 떨어진 이 월전리 바닷가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는 조그만 배로 고기를 잡고, 약간의 밭에 보리를 심어 식량을 하던 그리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려 나가셨다.

하지만 자식 농사는 풍년이어서 아버지 위로 고모님이 두 분과 아래로 삼촌 세 분이 계신 4남 2녀로 자식 부자 집안이었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라 이름도 항상 푸른 숲 같으라고 "尙林"이라고 하신 것 같다. 어려서부터 신장이 유달리 작았으나 매우 영리하고 성격이 진취적이어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교육이란 6-7세가 되면 동리 서당에 가서 천자문이나 소학을 배웠는데 가정이 넉넉지 못하여 아들을 서당에 보낼 생각도 못했고, 할아버지도 일자무식이었으니 집에서 배울 길도 없었다. 또래 나이의 아이들은 서당에 가서 글을 배우는데 아버지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할아버지를 따라 고기잡는 배를 타고 따라 다녀야 했기에 처지가 서글퍼 뒷산에 올라 울기도 했다.

"왜 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아버지는 왜 내가 공부하는데 관심이 없을까?"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저녁이면 동리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는 서당으로 달려가서 문 밖에서 귀동냥으로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고, 틈이 나면 친구들에게 한문책을 빌려다가 베껴 썼다.

산에 나무하러 가면서 읽고 또 읽었으며, 나뭇가지로 땅에 글을 쓰면서 천자문을 쉽게 익힐 수가 있었고, 소학도 숙독하게 된 것이다. 소학은 주자(朱子)가 아동들을 교육하기 위해 지은 책으로 태교로부터 시작해서 오륜(五倫)에 이르기까지의 사람이 되는 길을 엮은 책이다.

성인이 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 해서 [장가드는 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었다. 아버지는 이 책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주자의 글에 "朝問道하면 夕死可也"(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는 글을 터득하여 학문을 깨우치고, 학문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기독교로 개종하고 난 후에도 항상 구도자의 자세로 사시게 된 것은 젊었을 때 읽은 유학의 교훈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는 한문을 깨우치게 되자 갖가지 책들을 구해서 독파해 나갔다. 주역을 배워서 관혼상제의 택일과 죽은 묘자리도 봐주는 풍수설에도 일가견을 이루게 되어 젊은 나이에 그 지방에서 유식한 선생으로 대접받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청년이 되었지만 친구들이 거의 장가를 들어 어른 행세를 할 때도 가난 탓에 장가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22세가 되던 1909년 가을의 어느 날에 기장군 남면 송정리에 사는 친척집에 볼 일이 있어 가다가 동리 어귀에 있는 우물을 곁을 지나면서 물 길러 나온 처녀의 뒷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머리채가 유난히 길고 윤기가 흐르는 처녀를 보고 친척에게 중매를 서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 처녀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5남매와 함께 사는 19세의 노처녀였다. 연분이 닿았음인지 혼담이 순조롭게 진전되어 1910년 정초에 혼례식을 올리게 되었다. 혼례식을 올렸다고 딴 살림을 차린 것도 아니요, 부모님과 6남매가 사는 집에서 식탁 위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는데 불과했다. 그런데 선을 보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이 규수는 곰보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름다운 첫 인상이 머리에 새겨져 있었으므로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곰보 처녀가 나의 어머니되는 김달옥 그 분이시다.

2. 입신 과정과 전도사의 출발

부산의 변방인 기장에는 1905년에 동부리 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를 거점으로 하여 시골 구석 구석까지 복음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당시 부산과 동해안 지역을 담당한 선교사는 왕길지였다.

그는 한국인 조사 장덕생(張德生)을 대동하고 울산 지방을 돌면서 전도했는데 믿는 자가 몇 사람만 생겨도 교회를 세웠다. 그들에게는 매서인 박씨라는 분이 언제나 동행하면서 성경책을 팔기도 하고 쪽복음 책자를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장날을 이용하여 전도강연을 하고 모여드는 농어민들에게 책을 팔기도 했다.

이 때 월정리 이장 직을 맡아보고 있던 아버지의 귀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와 예수를 증거하고 각처에 교회를 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날 기장면장인 박재형씨가 한문 성경책을 주면서

"최이장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게, 내가 서양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어을빈 의사에게서 받은 것인데 우리가 믿어온 불교나 유교의 경전하고는 너무 다른 점이 많네. 서양 기독교의 성경인데 좋은 말씀이 많이 쓰여 있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솔밭에 쉬면서 성경의 첫 장을 펴보았다. 그 곳의 첫 장에는 놀라운 구절이 쓰여져 있었다.

"起初上帝 創造天地"(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불경이나 유학의 책에서 이러한 글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오면서 만난 많은 서찰들은 인간의 도리나 윤리의 가르침은 많았지만 이렇게 천지의 근본이나 우주의 원리에 관한 것은 만나 보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기대와 설레임으로 귀가한 아버지는 초롱불을 밝히고 성경을 읽어내려 갔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 전혀 다른 세계로 끌려가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이제껏 알지 못했던 신비의 세계에 빨려들어 갔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신약을 읽으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이것이다. 유교나 불교에서 찾을 수 없는 구원의 진리가 여기에 있구나!"

아버지는 보물을 찾은 것처럼 환성을 질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어떤 큰 힘이 자기를 휘몰아치는 것 같은 갈급한 마음으로 읍에 있는 동부교회의 장덕생 조사를 만났다. 그리고 그동안 성경을 읽고 의문나는 것들에 대하여 질문을 했다.

당시 기장면장 박재형은 월정리에 인접한 두호 부락에 살면서 면사무소까지 출퇴근을 하였고 주일에는 동부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박 면장의 인도를 받아 주일예배에 출석하였다. 교회에 출석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그는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다함께 예수 믿자고 전도를 시작한 셈이다. 평소에 아들에 대한 신뢰도가 컸던 조부님은 아들의 조리있는 설득에 압도당하여 승낙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온 식구가 예수믿는 일은 수월하게 마무리가 된 셈이다. 그리고 그가 한 최초의 일은 이제까지 가장 소중하게 간직했던 유교의 각종 서적들을 불태워 버렸고 몇 권을 땅에 묻어버렸다.

이 무렵에 아버지가 예수를 믿는다는 소문이 양산 통도사의 주지로 있던 최구고 씨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분은 아버지의 당숙이 되는 분이다. 그 분은 어느 날 마을에 내려와 조카와 대면하였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부처님의 은덕으로 살아왔는데 서양 예수를 믿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다 집안이 망할 징조야"

화를 내며 나무랐으나 아버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저씨 불교는 수양하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생명을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어느 종교보다 내세관이 확실합니다."

통도사 주지는 3일 동안이나 조카를 설득했지만 아버지는 도리어 당숙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양보하지 않았다. 논쟁은 무승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카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해야 옳을 것이다.

그 해 11월 29일에 아버지는 첫딸을 얻게 되었는데

"우리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라는 뜻으로 "최복음"이라 이름하였으니 이것으로도 아버지의 신앙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믿음은 뜨거웠으나 예배당이 너무 먼 것이 이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박 면장과 아버지는 왕길지 선교사에게 월정리에 예배당을 세워 달라고 호소를 했다.

당시 {朝鮮예수敎 長老會史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東來郡 月田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崔尙林 朴在衡 信後하고 引家歸道하야 機張邑敎會에 來往 禮拜하더니 至是하야 禮拜堂을 新築하고 敎會를 設立하니라"

몇 사람되지 않는 신자들은 저들의 힘에 과분하도록 헌금하여 비어있던 동리 회관을 매입하여 [月田敎會]라는 간판을 달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첫 예배에 참석한 신자는 아이들까지 36명 정도였으며 장덕성 조사가 겸임하였다. 아버지보다 먼저 믿은 박재형 씨를 영수로 세우고 교회의 살림살이를 꾸려가게 되었다. 예배당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아버지께서는 자기 장래에 대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논밭대기 약간으로는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기도 어렵고 더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봉사하기는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1912년 이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전국에 토지 조사령을 내려 전 국토를 측량하기 시작했다. 각 지방마다 강습소를 개설하여 측량기사 교육을 시킨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아버지는 부산으로 내려가 시험을 치르고 입소를 하게 되었다.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측량기사가 되어 일인들과 함께 조를 이루어 기장군 일대의 전 토지를 2년에 걸쳐서 측량했다.

이 일을 하면서 놀라운 것은 무등기 상태의 이른바 "주인 없는 땅"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었다 왜인들은 그런 것들은 무조건 국유지로 등기하여 저들이 불하 형식으로 챙겼다. 어떤 측량기사들은 왜인 못지 않게 착복하여 벼락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 한 평의 땅도 챙기지 않았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면 가난한 경작자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2년 이상 이 일에 종사하면서 아버지는 갈수록 극심해지는 일제의 착취와 횡포에 울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이 시대의 노예같이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아버지는 기도하면서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고자 애썼다. 유대 민족도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했지 않은가 이 백성도 우상섬기고 가난한 백성을 늑탈하다가 나라가 망했으면 하나님의 손길이 다시 역사해서 이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방법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 저들의 학정에 분노만 터뜨리지 말고 이 백성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자. 내 조국, 내 백성에게 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처신은 바로 이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전도사가 되려고 결심했다. 다행히도 총독부는 1914년에 접어들면서 지방행정구역을 재정비하기 시작하여 종래의 기장군은 이웃의 동래군에 통합하게 되는데 이 지역을 맡고 있던 호주 선교부는 관할지역의 팽창에 따라 여러 사람의 조사를 채용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응시하였으나 아버지와 세 사람이 합격하여 기장읍교회 소속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에게서 성경을 배우고 평일에는 동래군 일대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 가정을 심방하고 주일이 되면 지 교회에서 예배 인도를 했다.

아버지는 자기가 설립한 월전교회에 목회자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주일마다 이곳에 가서 설교를 했다. 그 당시 이 교회에는 아버지의 부모님들과 동리의 친구들이 열심히 출석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의 민주당 총재였던 박순천 여사도 13세의 소녀로 가족들과 함께 출석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공부 못한 한이 되었던 터라 가는 곳마다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쳤으며 또 청년회를 조직하여 교회와 부락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도와주었다. 시간이 나면 동리 인근의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유교와 불교의 관습에 젖어있는 분들에게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구원관을 설명하여 교회로 이끌었다. 처가가 있는 송정마을에서도 전도하여 처가 식구들을 주께로 인도했다.

3. 단독 목회와 목사가 되기까지

1916년 9월 20일 열린 제 1회 경남노회에서는 시취에 합격한 21명의 조사를 임명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나이가 28세 때의 일이다. 그를 추천한 왕길지 선교사는 통영시찰회의 왕대선 선교사에게 아버지를 소개하며 통영의 대화정교회의 조사로 정식 청빙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교회는 1905년에 세워졌는데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統營郡 大和町敎會가 成立하다. 初에 釜山府 草梁에 駐在한 宣敎師 孫安路가 熱心히 傳道한 結果로 權熙渟이 信敎하고 그 私邱에서 禮拜하더니 敎人이 점점 增加되어 禮拜堂을 新築케 되니라."

敎會가 설립된 지 10년이 넘었건만 손안로 선교사는 이 교회에만 매여있지 않고 많은 도서에 다니면서 선교에 열중했기 때문에 진학범 영수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상태였다.

아버지는 큰누나인 복음만 데리고 부임하여 통영읍 변두리에 셋방을 얻었다. 당시 이 교회는 최덕지 선생의 아버지가 집사로 있었는데 그 분의 집 윗채를 얻었으니 이는 자기가 멀리 출타시에 어린 딸을 보살펴준다는 전제에서였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선교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통영 앞 바다에 산재해 있는 여러 섬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다.

때로는 월요일에 출발하여 토요일에 돌아오기도 했다. 집을 비우는 날이면 복음 누나는 9세 연상인 최덕지 집에서 마산 의신학교 고등과에 진학하면서 떨어지게 되지만 두 집안의 친교는 끊어지지 않아 아버지는 최덕지를 중매하고 주례까지 서는 데까지 돈독해졌다.

이해 9월 10일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딸 둘을 두고 얻은 아들이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랐다고 했다.

한 해가 지난 1917년 12월 19일 제 4회 경남노회가 마산 성남교회에서 열렸다. 아버지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시에 응하여 김만일, 진종학, 김길창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한 노회에서 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르고 함께 신학교에 입학했건만 20년 후에는 김만일, 김길창 목사 등은 신사참배에 동조하고 정반대의 길을 걸을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는가? 당시의 신학교 학제는 봄 3개월을 계속 공부했고 내용은 두 학기로 나눠져 있어 나머지 8개월은 목회에 종사했으며 수업 연한은 5년이었다. 매월 학비가 30원 가량이었으나 시골교회 목회자들에게는 과분한 짐이었다. 아버지는 선교부의 왕대선 목사의 도움을 받았으나 그래도 가족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9년 만에 신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기미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아버지는 학교를 휴학하고 7월 1일부로 고성읍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아마도 통영교회에 목사가 부임하게 되어 노회에서 인사 이동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의 이 교회의 교세는 영수 1명, 집사 5명에다 40여명의 교인이 전부였지만 목회자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고성중앙교회에서 반 부담을 하는 열악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열심히 심방하고 전도하며 지난날 익혔던 유교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불신가정들을 파고 들었다. 새로운 목회 계획을 작성하여 제직회를 새로 짜고 매 금요일마다 순회 기도회를 가졌으며 초신자를 위하여 "성경 이야기반"을 신설했다. 3월부터 병설 유치원을 개설하여 어린이들에게 종교교육을 시켰으며 문맹자를 위해서는 "부인야학회"를 열어 한 주일에 이틀씩 한글을 가르쳤다. 또 교회 사무실을 신축하여 각종 서류를 보관하고 교인들의 모임이나 회의를 이곳에서 열었다.

해가 저물어 1921년에는 부산진교회에서 개최된 제 11회 경남노회에서 장로 시취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신학교의 학제도 봄, 가을의 두 학기로 바뀌었고 연한도 3년으로 단축되었다. 이 해는 춘추 두 학기를 모두 평양에 가서 공부를 했다. 교회도 날로 성장하여 좁은 예배당으로는 수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침내 새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건축을 시작했다. 장로회사기 상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1921년(辛酉年) 固城邑敎會가 崔尙林을 長老로 接手하니 助師職을 兼務하다. 是年에 敎會 大振하여 金 五千余원을 연보하여 半洋式으로 禮拜堂을 雄大히 建築하였다."

건축비가 오천여원이 소요됐으나 많이 부족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 고성군내에는 교회가 여섯 개밖에 되지 않으니 보조를 요청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매양 선교부만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때에 번개처럼 떠오른 아이디어가 당시 유행하던 만년필을 도매상에서 구입하여 경남 일원에 교회에다가 팔아보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이를 즉시 시행했다.

부산의 무역도매상에서 대량으로 구매하여 통영, 고성뿐 아니라 경남일원의 교회에다 내다 팔았다. 남 집사들도 가세하여 군내의 유지들이나 청년들에게 산매를 하여 공사가 중단됨이 없이 필역하여 1922년 12월 성탄절 전에 헌당식을 거행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장로로 세움 받았으며 그 해 8월에는 2세 교육을 위하여 대지 270평의 13칸 가옥을 매입하여 유치원을 개설하고 통영에서부터 익히 아는 최덕지 선생을 보모로 초빙하였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고성에서는 큰 교회가 되었고 아버지의 목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부임당시 목회자의 생활비도 자담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60평 예배당을 신축하고 병설 유치원도 갖게 되었다.

1924년 제 16회 경남노회에서 서기로 피선되었는데 아버지는 이때까지도 신학생이었고 지방교회의 장로 전도사였으나 목사가 받아온 노회 서기직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실력과 활동성을 인정한 선교부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성교회 6년 목회기간에 예배당 신축, 유치원개설, 장로 2명을 세우고 또 여집사를 최초로 세우며, 청년회를 조직하여 전도 일선에 내세웠고, 야학을 열어 문맹자 퇴치에 앞장서는 눈부신 활동을 했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는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는 처방문을 갖고 계셨는데 당시에는 양의원이 태부족하던 때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민간요법을 가르쳐서 고성읍에서는 아예 "최의원"으로 통할 정도였고 이로 인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4. 부산 목회와 노회활동

동래읍에 위치한 동래읍교회는 1905년 왕길지 호주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로 목사가 네 분이나 거쳐갔으며 신학교 동기 입학자인 김만길 목사가 떠난 후로는 1년 동안 후임자 없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김목사는 경남노회 서기를 네 번이나 역임한 중진이었고 또한 부자였다 그의 부인 한만년은 기생출신으로 권번에 있을 때 큰돈을 모았는데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목사의 부인이 되었었다. 따라서 김목사는 부인덕으로 신학교도 정상적으로 졸업했고 이 교회에 재직시에 자기 땅 동래 남문 앞 수안동 476번지의 170평에다 새 예배당을 짓기도 한 분이었다. 그러나 김목사는 예배당을 지은 그 이듬해에 사면하고 통영의 대화정교회로 옮겨갔었다.

1924년 정월 엄동설한에 추위 속에 8명의 대가족을 거느리고 동래읍교회로 부임해 보니 교회의 대지는 김목사 명의 그대로 되어 있었고 아마도 이것 때문에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 않나 추측이 되었다.

동래로 이사하고 한 3년은 셋집에서 살다가 김목사의 비어있던 사저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8세였으니 어렴풋이 나마 기억에 남는 것이 더러 있다.

동래는 고성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번창한 곳이어서 일본이 가깝고 부산에 인접해 있어 급속도로 성장해 가는 도시였다. 아버지는 부임하자 이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두 가지 방안을 세웠다.

첫째는 교인들의 신앙부흥 운동이었다. 목회자가 1년 이상 비어 있었고 또 여러 가지 불화가 있었던 터라 교인들의 신앙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으므로 가가호호를 심방하여 출석률을 높이고 말씀과 기도로 뜨겁게 달구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주변의 주민들 속에 파고들어 전도하여 사람들을 예배당으로 모으는 일이었다. 주일을 지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전도에 매달렸다. 주변에는 절에 다니는 불교신자들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전에 읽었던 유교의 가르침이나 불교의 교리를 역이용하여 복음의 우수성을 증거했다. 또한 자기의 당숙이 양산 통도사의 현직 주지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불교의 구원관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아버지는 가정에 들어가면 먼저 그 가정의 어른들을 전도했다. 이제까지 잘 들어보지 못했던 미지의 종교에 관한 전도를 듣고 처음에는 입안에서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렸지만 아버지의 논리에 대항하지는 못했다. 몇 번이고 계속되는 동안에 저들의 마음 속에는 불교나 유교는 사람의 가르침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월등히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아버지의 능변에 현혹되어 예배당을 찾는 노인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두 번 나와보면 다음에는 동네의 이웃 친구들을 데리고 왔고, 어린 손자나 손녀의 손을 잡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들이나 딸이 나오게 되고, 맨 나중에는 아들까지 따라 나오게 되며 교인의 가정이 점점 불어 나갔다. 이 때 나는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보살할머니들이 예수를 믿고 버린 염주가 상자에 수북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던 고복수라는 청년도 가수가 되어 서울로 가기까지는 이 교회에 출석하는 열심쟁이였다.

이 해 7월에는 소위 "을축대수해"라는 물난리가 나서 뚝섬과 용산이 침수가 되고, 경부선 열차가 10일 간이나 끊기는 대혼란이 발생했다. 다시 9월에는 태풍까지 엄습하여 경남노회 지역인 김해, 창원, 밀양 등지가 바다를 이루어 농작물은 침수가 되고 많은 가옥들이 허물어졌고 밀양의 다죽교회는 건물이 떠내려가고 10여 명의 교인이 사망하는 재난이 발생했다. 아버지는 경남노회 임원(서기)로서 수해 지역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각처에서 모금한 구제금과 의류 등을 전달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노회 산하의 229개 교회에 통지해 구제품과 구제금을 보내주도록 독촉하기도 했고 그 해 9월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 14회 총회에 총대로 참석하여 수해현황을 보고하고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해가 바뀌어 1926년 새해가 밝아 왔다. 입학하고 벌써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에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금년 가을학기에는 졸업하기로 결심했다. 함께 입학한 김길창, 김만일, 진종학은 벌써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활약 중이었다. 아버지는 영적 은혜는 풍성했으나 육신적으로 무거운 짐이 있었다. 작년에도 딸이 태어났으니 딸이 다섯에다 아들 하나까지 합하면 여덟 식구로 이들을 먹이고 학교까지 보내면서 언제 자기 공부까지 뜻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또 해를 넘길 수 없다고 결심한 아버지는 드디어 평양신학교 제 20회 졸업생으로 12명과 함께 졸업을 하고 1927년초 제 22회 경남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10년만의 경사라 아버지는 몹시 기뻐하였다. 거기에다 동래 일신여학교 교목으로 부임해 달라는 요청까지 받았으니 아버지 목회 생애의 최고의 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1892년 호주 선교회가 3명의 고아를 데려다가 부산진교회에서 시작한 것이 동래로 옮겨 한국 여성들에게 종교교육을 시키는 어엿한 기관으로 발전하였고 이제 그 학교의 교목으로 초빙되었으니 아버지에게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예배는 경건회라는 이름으로 매일 드려졌고, 아버지는 열성을 다해 설교하며 이들이 장차 이 나라의 여성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불어넣어 고매한 인격자들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담당하는 목회자로서 분주한 생활 속에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정성을 쏟았다. 그리하여 이 학교 출신으로 박순천 여사, 공덕귀 여사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5. 마지막 목회지 남해읍교회

1931년 아버지는 7년간 시무하던 동래교회를 사면하였다. 이유는 목회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집안 문제였고 그것은 일신여학교에 다니던 둘째 누나 도애가 동래고보에 다니는 한 청년과 연애사건이 터진 것이다. 요사이 같으면 별일도 아닌데 당시로서는 부덕의 말썽거리였고 더구나 목사의 가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크게 고민하셨고 부끄럽게 여기시다가 누나를 황급히 일본으로 보내어 약혼되어 있던 청년과 결혼식을 올리게 하여 사건을 무마했으나 상처는 그대로 아버지의 가슴에 남아 강단에 설 수 없게 만들었다.

11월에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사표를 제출하고 5년 동안 10회기에 걸쳐 봉사한 경남노회 서기직도 끝을 맺고 부산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1932년 진주성경학교를 끝마치고 나서 남해섬을 시찰했다.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선소에서 내려 남해읍 북면동에 있는 남해읍교회에 가 보니 교인들은 30명도 안되는 빈약한 교회였다. 그리고 강채경이라는 조사가 남해군 4개처 교회를 순회 목회하다가 작년에 사면하고 무주공산의 상태였다.

네 개 교회란 읍에 소재한 남해읍교회, 남면 당항리의 당항교회, 평산리의 평산교회, 창선도의 창선교회였다. 교회란 말뿐이지 몇 사람의 신도들이 모여 인도자도 없이 예배를 드리는 처소에 불과했다. 이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아버지는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소명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봉사할 곳은 바로 여기로구나!" 아버지는 여생을 이곳에서 봉사하다가 뼈를 묻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주일을 읍교회에서 드리면서 아버지는 정성을 다하여 설교했다. 여태껏 한국말이 서투른 선교사에게 설교를 듣다가 성경과 한학에 능통한 조선목사의 설교를 들으니 성도들은 너무나 기뻐하고 좋아했다. 저녁을 밝히면서 아버지는 한희성 영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수님 부족하지만 내가 남해에 부임하여 개척전도를 담당해보고 싶습니다."

영수는 흥감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생활비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속히 오시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동래로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일할 데가 정해졌으니 빨리 떠나야 한다면서 이삿짐을 꾸렸다. 선교부에서는 남해지역에 전도목사로 떠나니 약간의 전도비를 보조해 달라는 보고서를 띄우고 평소 친했던 분들에게도 하직을 고하고 5월의 어느 날 남해를 향해 출발했다.

가족 중에 누나 두 명은 이미 출가했으며 나는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다녔고 일곱째 인애는 큰누나에게 가 있었지만 출생한지 4개월 밖에 안되는 정애까지 합해 7명의 대식구가 부산 남포동에서 순행선을 탔다.

부산에서 남해까지는 뱃길로 7시간이 걸린다. 항로 중 낙동강 하류에서는 언제나 파도가 거세었다. 그 날도 예외 없이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이 거세어졌을 때 아버지는 홀로 갑판에 나와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흡사히 자기가 배타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사도바울과 같은 형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은 이 항해에서 풍랑을 만나 고생했으나 로마에 무사히 도착했으며 연금상태이면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일시적으로는 방면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낯선 땅 남해에서 14년간 주의 일을 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는 마지막 목회자가 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남해에 도착한 아버지는 사택이라는 초가삼간에 짐을 풀었다. 방이라야 단 두 칸 밖에 없었다. 하나는 아버지가 서재 겸 침실로 썼고 나머지 한칸 방에 아들 딸 넷을 기거케 했으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궐같은 동래의 집에 비하면 사람의 거처라 말하기가 부끄러운 정도였으나 아버지는 가족들보다 빨리 적응한 것은 남해군의 복음화라는 사명감에 불탔기 때문이었다.

우선 기존 4개처 교회를 중심하여 인근마을을 상대로 전도집회를 가졌다. 아버지는 믿기 전에 유교에 책들을 많이 탐독했기 때문에 전도시에 많은 활용을 했다. 주로 명심보감이나 소학 등에 나오는 도덕훈들을 척척 외우면서 기독교 윤리들과 상반되는 점을 역설했고, 또 어떤 때는 예수님도 공자나 석가와 같이 동양인이라는 점을 들어 기독교가 서양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지형적인 사정 때문에 동양에서 먼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양 쪽에서 먼저 수용했기 때문에 저들이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도 인식시켰다. 또 시골사람들이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천도복숭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어느 곳에 노모를 봉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노모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고 백약이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간청을 했다. 추운 겨울철에 어디서도 구할 수 없어 산천을 헤매고 있는 것을 신령님이 이 아들의 딱한 사정을 불쌍히 여겨 하늘에서 복숭아를 하사하였다. 그것을 가져다가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거짓말같이 완치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 천도복숭이 무엇인 줄 아는가? 그것은 바로 天道福聲 즉 하늘의 길인 복된 소식이다. 기독교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복된 소식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루는 어느 동리에 전도집회가 열렸는데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여기 오면서 보니 동리 어구에 당상나무가 있는데 나무도 늙어서 속이 썩어 궁글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나무에게 나무야 나무야 너도 목사 일했나?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렇게 다 썩어 궁글었느냐? 내 물음에 나무는 이렇게 대답하더라. 그런게 아니오, 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마다 절을 하면서 복을 달라고 하는데 내게는 그런 힘도 없고 재간도 없소.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복을 달라 하니 속이 상해서 이렇게 썩어버렸소"

이렇게 구수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우상을 섬기고 조상에게 제사하며 복을 달라해도 모두가 소용없는 허무한 일이니 참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전도집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으며 기존 4개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고 드디어 1933년 봄, 남해 4개처 교회는 최상림 목사를 담임목사로 경남노회 청빙을 했고, 노회는 흔쾌히 그것을 허락했다.

아버지의 목회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자립목회요, 생활목회였다. 사도 바울의 자비량 목회를 본받아 거의 모르는 일을 손수 해내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바닷가 출신이기 때문에 생선 요리에는 도가 트인 분이었고, 여자들의 전담사인 바느질까지도 대단히 익숙하여 때로는 많은 딸들의 옷까지도 손수 지어 입히기도 했다. 또한 민간 요법을 연구하여 병원이나 약방이 희귀한 당신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내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다가 방학으로 집에 내려와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설천면에 산다는 낯선 남자가 아버지를 찾아와 대문을 들어서면서

"약국 어른 계십니까?"

아버지가 목사인 줄도 모르고 약국 어른으로만 소개를 받고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가 아는 대로 처방문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또 아버지는 비좁은 사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손수 집을 지으셨다. 교회와는 500m에 거리에 불과한 지금의 남해 터미널이 있는 곳에 한재설이라는 교인의 땅을 희사받아 집을 건립했다. 흔한 밤나무나 잡목을 베어다가 기둥과 석가래로 사용하여 방을 세 칸을 꾸미니 비록 조잡하기는 했지만 공간이 넓어 식구가 많은 우리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얼마 후에 앞 쪽 밭을 매입하여 여러 가지 채소를 가꾸어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6.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독실한 신앙가들

아버지는 그 자신이 신앙인으로서 훌륭한 인격자였을 뿐 아니라 신앙의 후계자를 키우는데 있어서도 탁월한 분이시다. 통영이나 고성, 동래의 목회에 있어서도 신앙의 영향을 받은 인사들이 많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니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남해 지역에 목회하면서 그의 감화를 받아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 교회에 충성한 성도들은 여러 사람이지만 그 중에 몇 사람을 소개코자 한다.

첫째는 남해읍교회의 김만두 장로이다. 이 분은 이동면 용소라는 시골에서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으면서 아버지의 전도를 받고 용소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이름이 한약국이지 한의사의 조수를 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처방문으로 약국을 차렸으니 별로 인기가 없었다.

아버지는 김만두에게 읍에 나와서 약국을 해 보라고 권유했다. 당시는 면허를 취득하여 개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국의 허가로 개업을 하던 때인지라 아버지 남해경찰서 위생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읍교회에 출석하는 분에게 부탁하여 지장없이 영업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김만두 씨가 한의학 지식이 부족한 것을 간파하고 동의보감을 구해다 주면서 열심히 공부하게 하였다.

김만두 씨는 아버지의 배려에 감격하여 열심히 의서를 공부하면서 또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열과 성을 다했고 또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명성이 알려져 손님이 줄을 이었다. 김만두 집사는 몇 년 사이에 큰돈을 모으면서 남해읍의 유지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1935년에 남해교회는 노회에서 장로 1명을 허락을 받고 다음 해에 김만두 집사는 장로 시취에 합격하여 큰 일꾼이 되었다.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길 뿐 아니라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많이 도왔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경찰에 연행되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할 때에도 우리 가족에게 행한 그의 성도 섬김은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남해 내산 기도처에서 숨어 기도하던 성도들의 뒷바라지에도 힘썼고, 신앙을 지키던 이동이나 물건의 교인들이 약 사러 점포에 들리면 전송하는 체하며 뒤따라 나와 손에다 돈을 쥐어 주더라는 박재준 목사의 회고담을 들은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아버지가 남해읍교회에 부임하던 당시 19세의 청년이었던 김선일 장로이다. 이 분은 용소교회 김지평 장로의 아들로 남해등기소에 급사로 들어가서 후일에 등기소 직원이 된 분이다.

그는 22세에 결혼을 할 때도 아버지가 주례를 하였기에 늘 아버지를 신앙의 아버지로 따랐다. 성경의 가르침도 철저히 받으며, 깨달은 것은 철저하게 실천하며 살았는데 그가 아버지를 유달리 흠모하여 따른 것은 남다른 사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친부가 장사를 하다가 병이 나서 고통을 당할 때 아버지의 전도로 용소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병이 완치되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합심하여 용소에다 예배당을 건립하고 초대장로가 되었으니 그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그는 아버지가 왜경들에게 붙잡혀 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한 때는 신앙의 동요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생명도 초개같이 내어놓는 주님의 종들을 보면서 도리어 신앙을 굳게 가다듬었고 아버지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목놓아 울었다.

1948년 남해읍교회의 장로로 세움을 받고 그는 마음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1997년 아버지가 섬기던 남해읍교회 뜰에다 1,400만원의 자비로 추모비를 세웠다. 한 생애를 주를 위해 바친 스승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순교 신앙을 함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도 사법서사로 일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이상철 장로이다. 이 분은 남해읍에서 세탁소를 경영하면서 아버지의 출장시에는 자주 설교를 대신하셨다. 어려운 일제치하에서도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아 1943년 10월 19일에 장로로 장립을 받아 교회를 섬겼다. 6.25사변 후로는 남해읍에서 고아를 수용하는 자애원을 세워 운영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자애원을 거쳐 남녀 청년들이 5백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신앙을 기리기 위해 고아원 안의 부지에다 "최상림 목사 기념예배당"을 건립하였고 원아들과 직원들과 함께 날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다.

네 번째는 삼동면 물건교회를 열심히 섬기던 이학섭 집사이다. 그는 아버지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고,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했을 때 여러 번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지만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그 자녀들 중에는 이찬종 집사가 재건물건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자녀들, 손자들 중에는 장로와 목회자가 여러 사람 배출되었다.

다섯 번째는 이동면 무림리에 살던 곽영삼 집사이다. 이 분은 이미 1971년에 소천했지만 그 곳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면서 비교적 여유있게 살았는데 그 신앙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인도와 감화를 받은 분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여러 번 남해경찰서에서 조사도 받고, 매도 맞았으나 끝내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한 번은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유치장에서 15일 금식을 시작했는데 약이 오른 경찰들이 곽집사를 집단폭행을 하여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를 못했다. 폭행한 왜경들은 당황하여 남해읍교회에 연락을 취했고, 사찰 일을 보던 이상배(고 이주용 목사의 선친)씨가 손수레를 갖고 가서 집으로 실어다가 치료하기도 했다.

남해에서는 평교인들까지도 색출하여 경찰서에 잡아다 족치는 바람에 한번 잡혀가 문초를 당한 성도들은 왜경들의 눈을 피하여 내산 깊숙한 골짜기 도장굴에 숨어들었다. 그 곳에는 김소갑숙이라는 삼천포교회 전도부인을 하던 분이 먼저 들어와 움막을 치고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다. 내산, 물건, 지족, 난음, 이동 등지에서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은 성도들은 토요일 밤이면 성산으로 모여들었다.

산길을 이용하면 발자국이 나게 되고 그러면 일본 순사들이 개같이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고 해서 신을 벗고 물이 흐르는 고랑을 걸어서 기도처에 모여들었다. 쌀, 보리로부터 생선이나 채소 등 무엇이라도 새로운 것이나 좋은 것이면 메고 이고 주의 종에게 먼저 갖다 드리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주일날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밤 12시가 넘으면 야음을 틈타서 집에 돌아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일주일을 집안 농사에 몰두하는 생활이 해방이 되는 그 날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남해에서도 전쟁 말기에는 예배당에 가미다나가 들어오고 그 앞에 절하는 의식이 행해졌으나 오직 한 곳 내산교회만은 가미다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또 주일예배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정한 시간에 드려졌다고 이 곳 출신인 박재준 목사는 증언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 재건운동이 일어났을 때 수진 성도들이 생활했던 내산, 물건, 난영, 이동, 지족, 남해, 구미 등에 재건교회가 섰으니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줄 믿는다.

1932년 남해에 부임하여 1940년 체포되기까지 8-9년 동안 헌신적으로 노력한 아버지의 구령운동은 그가 순교한 후에 열매가 되어 남해군에는 재건교회가 7개처요, 배출된 목사가 11명(선교사 1명)이며, 장로가 15명 가량되며 전국 각처의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있다.

7. 경남노회장 피선과 신사불참배 결의

일본 신사의 한국 상륙은 양국의 무역 조약이 체결된 후에 일본인들이 부산에 체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부산의 금도비라산에 작은 사당을 지어 섬기다가 1894년에는 거류지 신사로 개칭되었다가 1900년에는 용두산 신사로 개명했다. 이런 류의 신사가 한일합병 당시에는 급속히 증가하여 전국에 31개소에 이르게 된다.

1915년 총독부는 신사에 대한 의무를 규정 공포했으니 소위 말하는 "신사 사원 규칙"이다. 거기에는 "신사는 국가의 종사로서 존엄한 우리 국체의 성립과 빛나는 국사의 발자취와 표리 일체를 이루며 경신의 본의를 명지하고 이도의 흥륭을 꾀하는 것은 역시 국민사상 함양상 간절하고 중요한 일이다"고 명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신사라고 하면 神社, 神祠, 小祠 등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1919년에는 한반도 안에 神社가 36개, 神祠가 41개였으나,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는 一面一祠의 방침에 따라 2,300개의 신사가 전국을 뒤덮고 있었던 셈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라 일본 귀신들의 전각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이 신사참배가 기독교에 강요된 것은 대체로 1932년부터라고 짐작된다. 그 해의 춘계황령제(春季皇靈祭)에 평양의 각종 학교에 참석을 요청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장로회 총회 학부모는 사안이 중차대한 만큼 제 21회 총회에 다음과 같은 헌의를 올려 결정토록 했다.

"교회학교 학생이 신사 및 여러 제식에 참배할 수 없다는 것을 총독부 당국에 교섭할 것"

교섭위원으로 총회는 세 사람을 파송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1933년에는 전북, 황해노회에서 신사참배에 관한 총회의 입장을 분명히 해달라는 안건이 제출되어 다시 교섭위원들이 총독부를 방문하여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하여 신사참배 문제가 앞으로 한국교회에 환난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주의 종들에게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 예감이 1936년에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총독부 학무국은 신사참배 지시를 거부한 책임을 물어 숭실중학교, 숭실여학교의 미국인 교장들을 파면한 것으로 총독부가 한국교회를 박멸시키고자 정면도전을 걸어온 것이다.

10월에 접어들어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하여 모든 단체나 학교에서 봉창케 하고, 12월에는 일본 천황의 사진을 배포하여 학교의 교실마다 부착토록 지시했다.

이처럼 총독부는 치밀하게 작전을 세워 모든 신도들에게 저들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사면에서 조여 들어왔다. 전국의 교회나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상반된 양론으로 분열되기 시작했고, 선교사들도 찬반 양론으로 갈라져 논쟁을 했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했으니 결사 반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했으니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수용자가 있었다. 양쪽의 주장자는 맥큔과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이 때에 아버지는 결사반대의 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경남을 선교구역으로 하는 호주선교사들도 처음에는 찬반 양론으로 논쟁을 하다가 끝에 가서는 찬성 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져 갔다.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선교사들이 주로 현실참여 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자신들만 고개를 숙이면 학교가 문을 닫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6년 2월 8일에 호주선교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다사다난했던 1937년이 밝아왔다. 마산 신정교회에서 개최된 제 38회 경남노회 정기회에서 이약신 목사가 노회장으로 피선이 되고 아버지는 부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총독부는 3월에 들어서자 일본어를 철저히 사용하도록 모든 기관에 시달하더니 4월에는 조선총독의 五大施政方針이 발표되었다. 5월에는 일본 정부가 한인 노동자 10만 명을 이주시킨다는 결정을 내렸고, 6월에는 修養同友會 事件이 터져 150명의 서북교계 지도자들이 잡혀 들어가 장기간의 취조를 받았다. 7월 16일에는 드디어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지나사변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는 전시 체제령을 내려 백성들을 들볶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부산 초량교회 이약신 목사를 만나러 갔다. 공식적으로 부노회장이 노회장을 만나러 간 셈이다.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노회 일과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사택에는 방이 없어서 아버지와 나는 마루에 요를 나란히 깔고 자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자기 요를 걷어서 나에게 주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요를 깔고 자겠느냐?"

당시에는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이 때부터 자기의 운명에 대한 짐작을 하시고 계셨던 것 같다.

그 해 12월 7일에 제 40회 정기노회가 부산 항서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선출된 임원은 회장에 최상림 목사, 부회장에 김석진 목사, 서기 김영환 목사였다. 아버지가 드디어 경남노회장이 되신 것이다. 아버지에게 주의 일을 하게 하는 마지막 자리가 주어진 셈이다. 3일 동안에 많은 안건을 처리했다.

그 중에는 한상동 목사가 목사 장립을 받고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한 일과 남해읍교회의 김만두 집사가 장로 시취에 합격한 일이다. 30년 동안이나 장로가 없던 교회였으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봉장으로 후일에 이름을 떨친 최덕지, 최경애 전도사를 진주 여성경학교의 교사로 선임한 일이다.

그 다음은 1938년이 경남지역이 복음을 받은 지 50년 즉 희년의 해이므로 성대한 기념행사를 하도록 가결했고 끝으로 가장 중대한 안건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노회가 공식적으로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미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다가와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당석에서 어느 회원이 교섭위원을 선출해서 당국과 교섭을 해보자고 제의하여 회장이 3인을 자벽토록 했다.

아버지는 심사숙고하여 항서교회 김길창 목사, 부산진교회 김석진 목사, 그리고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를 교섭위원으로 발표했다. 이런 교섭은 총회에서도 시도하여 아무런 소득이 얻지 못했으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1938년은 한국교회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해다. 9월 10일부터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제 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니 교회가 솔선해서 이행해야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불법으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서 경남노회는 6월 초에 봄노회가 열렸는데 아버지는 하루 전에 부산에서 항서교회 김길창 목사를 만났다. 지난 노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경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해서였다.

"김 목사에 대해서 이미 들은 바가 있지만 신사참배는 엄연한 우상숭배의 죄이니 이번 노회에 경찰측 요구를 거절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 어떻겠소?"

"형님, 이 문제는 우리의 사활이 달린 중대사입니다. 우리 모두가 옷을 벗을 각오라면 해결은 간단합니다."

하며 이미 수용하기로 굳어버린 김 목사를 보면서 안타깝게 하숙으로 돌아와 밤 8시에 개회가 되고 첫날의 회무가 별탈 없이 끝났다. 형사들도 돌아가고 총대들도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가 교회당에 엎드려서 애절하게 울부짖고 통곡하며 기도하는 것이 신호가 된 듯이 여러 목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리내서 철야기도에 돌입했다. 이날 밤의 기도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모든 참여자들이 크게 힘을 얻었다. 이제까지 친일파로 지목받던 김 목사가 일어나서 소리쳤다.

"우리는 다같이 행동합시다. 같이 죽읍시다. 주님을 위하여 죽을 때가 왔습니다."

오후에 회무가 진행되는데 김길창 목사가 무슨 생각에선지 발언을 청하여 자기들이 작성한 신사참배를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하게 되었다. 회장은 안건이 나왔으니 가부를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보고서에 어떻게 할까요?"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보고서 받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한상동 목사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 동의 재청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약신 목사가 재청하여 이 보고서는 부결되고 만 것이다. 당황한 것은 동래 경찰서장과 고등계 형사들이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경찰서로 연행되어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도록 사전에 모의를 했느냐? 누가 그 주동자냐? 하며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시종여일하게 하나님의 계명 위반이니 할 수 없다는 것과 목사들의 신앙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지 누가 선동했거나 교사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신사참배를 시달하고 설유만 했지 거부하는 인사들을 잡아다가 가두거나 고문하지는 않는 때라 아버지는 수일만에 풀려나서 남해로 돌아왔다.

8. 경남을 중심한 불참배운동

남해에 돌아온 아버지는 교인들과 함께 기도에 더욱 열을 올려 새벽기도회때마다 눈물의 간구는 끊일 줄을 몰랐다. 그러니 어찌된 셈인가 총회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인사들을 검속하기 시작하여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아래 평양의 주기철 목사가 구속되더니 아버지도 구속되어 총회가 끝날 때까지 풀려나지를 못했다.

27회 총회에서는 총독부의 각본대로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니 솔선 시행한다고 가결하고 말았다. 이 총회에서 신학교 입학 동기인 김길창 목사가 부총회장에 당선되었다. 평상시 같으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것은 이제까지 총회의 임원진은 서북파라 일컬어지는 이북목사들이 거의 독식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친구들이 신사참배 반대로 구속되어 있는 상황인데 김길창 부총회장은 각 노회장을 인솔하고 평양의 조선 신궁에서 참배를 하고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그 시대의 한국교회의 두 얼굴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 해를 넘기고 1939년 4월 20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남북의 동지들이 평양에 모였으니 주기철 목사가 의성농우회 사건으로 7개월 옥고를 치르고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 자리에 모인 인사들은 주기철 목사 내외, 한상동, 채정민 목사, 오윤선 장로, 방계성 장로, 이광록 집사, 박의흠 전도사, 안의숙 선생, 김의창, 최봉석 목사 등이다. 물론 아버지도 동참했었다. 그 자리에서 이제부터는 개인적인 투쟁 방식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반대 운동을 펴기를 결의하고 각자의 지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8월에 접어들자 경남에서도 한상동, 이인재, 조수옥, 윤술용 등의 동지들이 해운대에 모여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게 된다.

(1)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말 것.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말 것.

(3) 신사참배한 교회에 헌금하지 말 것(단 반대 운동하는 일에 사용할 것).

(4) 신사참배 하지 않는 교인들끼리 모여서 예배할 것(가정예배).

이상을 결의한 저들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신앙의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예배를 드렸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예배가 아니라 옥중, 산중, 골방으로 숨어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1940년 1월 2일 진주에서 내려와서 김주학의 집에서 아버지와 대면하고 지금까지의 반대운동의 활동상에 대하여 보고를 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아버지도 이 취지에 흔쾌히 호응하여 남해군내의 성도들에게 신사참배가 죄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시키고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그 후로 한 목사는 아버지를 만나러 3월, 5월, 6월 3번이나 남해에 내려온 것으로 기억된다. 1940년 1월 1일 신정에 한 목사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이인재 전도사를 데리고 최덕지 전도사를 찾아가서 마산 제비산에 있는 태매시 선교사의 집에서 장시간의 기도와 토의를 거쳐 다음 사항들을 합의한다.

(1) 신사참배한 노회는 해체토록 한다.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는다.

(3) 불참배 신도만으로 신 노회를 조직한다.

(4) 불참배자 그룹 예배를 드리고 동지들을 규합한다.

최덕지 전도사는 경남의 여성 동지들을 모아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5월에 열릴 경남 부인전도회의 임원선거에서 신사참배 거부인사들은 선출하는 작전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 목사는 부산, 진주 지방을, 최 전도사는 마산 지방을, 염애나 전도사는 김해 지방을 맡아 사전 선거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감투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회를 활용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5월에 부산 항서교회에서 열린 경남 부인전도회에서는 최덕지 전도사가 압도적으로 회장에 피선되었다. 최 전도사가 앞장서자 경남일대에는 가는 곳마다 호응자가 불어나고 가정기도회 모임이 조직되어 나갔다. 경찰당국이 이 냄새를 맡기 시작하여 박인순 전도사가 구속되고 진주여자 성경학교 선생들과 학생들이 다수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6월에 최덕지 회장은 창원지방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가정기도회를 조직하다가 진주 경찰서 고등계의 김을도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1940년 6월 말, 악질형사 김을도가 남해도에 나타나 아버지를 연행해 갔다. 진주 경찰서 감방이 만원이라 아버지는 사천 경찰서에 수감되었는데 이때까지 아버지는 그의 목회 중 49회나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고 나에게 진술했다. 2월 3일에 한상동 목사가 이미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여 그가 평소 접촉한 인사들의 이름을 모두 불어버렸기 때문에 무려 200여명이 검거된 것이다.

이들은 거의가 심한 고문에 못 이겨 앞으로 신사참배 하겠다고 서약을 하고 풀려났다. 사천경찰서는 감방이 몇 개 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구금되어 있는 옆방에는 전도사가 한사람 구금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새벽이 되면 전도사를 깨워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렸다. 아버지가 주로 많이 부른 찬송은 434장이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이 찬송은 아버지가 육신의 옷을 벗고 천국에 가는 순간까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문을 당하고 갖은 수모를 겪었어도 그로 인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불탔으며 하나님을 위한 충성심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1941년 3월 13일 사천경찰서에 구금된 지 8개월만에 경상남도 경찰국으로 넘겨졌고, 진주 지방에서 수감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부산 남부경찰서에 구치되었다. 가정예배에 한두 번 참석했다가 연행된 평신도들은 거의 훈방 조치되었고, 도경으로 옮겨진 인사들은 주도자들이거나 지역 책임자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앞으로 검찰국에 기소되고 재판에 회부되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신앙생활 때문에 영어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에게 인생의 중대사 치루어야 할 딱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혼사문제로 내 나이가 25세였으니 당시로 봐서는 혼기를 넘긴 노총각 신세였다. 나의 큰누나가 남해로 이사하여 남해읍교회에 다니고 있으면서 중매를 하여 이명이 집사 딸 이명춘 양과의 혼담이 성사가 되어 1941년 4월 22일 진해 경화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무리 불가피한 인륜대사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옥중에 계셨기에 우리 가족의 마음은 편치를 못했다. 혼례를 마치고 우리 부부는 남부경찰서로 찾아가 아버지께 첫인사를 올렸다. 그것도 형사들의 입회하에서 이루어졌다.

"아버지 이번에 결혼한 며느리입니다."

아버지도 우리 부부도 눈물을 참느라고 무진 애를 먹었다. 여러 가지 사돈댁에 관해서 물으시고는 "예수님을 끝까지 잘 믿으라"고 당부하며 유치장으로 되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양성봉 장로 댁을 찾아갔다. 유치장에는 성경이 반입이 안되기 때문에 어떻게 양 장로의 힘을 빌려볼까 해서였다. 나의 부탁을 기억하고 있었던 양 장로는 아버지를 면회가면서 베드로전후서를 성경에서 찢어 아주 조그만하게 접어서 형사의 눈을 피해 아버지께 전달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것을 몸 속에 숨겨두었다가 기회만 생기면 꺼내 읽었다. 얼마나 읽고 외웠든지 평양형무소로 옮길 때에는 전문을 암기하여 마음 속의 심비에 기록하여 가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려운 시련의 고비마다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또 힘을 얻었다.

1941년 7월 11일, 이 곳에 수감된 지 4개월만에 드디어 부산을 영원히 하직하게 되었다. 당시에 총독부 경무국은 평양과 경남의 불참배 운동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계되어 있는 동일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의자들을 한 곳에 모아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어떻게 알았는지 성도들이 부산역에 나와서 눈시울을 붉혔다. 주남선 목사, 이현속 전도사 등도 함께 포승줄에 묶여서 열차를 타게 되었다. 유치장에서는 면대하지 못했으나 뼈와 가죽만 남은 초췌한 모습에서도 눈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했다. 초량교회의 성도들이 많이 나왔었다. 양성봉 장로는 삼량진까지라도 함께 할 생각으로 표를 샀고, 강유식 장로는 따라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 때 한 양복 신사가 맞은 편 건물 기둥 뒤에서 일행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가 신학교 입학동기이며 경남노회 임원을 함께 역임했으며 38년 봄노회시에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고 보고서를 작성한 김길창 목사였다. 이 세상에서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양 장로와 그의 부인은 삼량진까지 함께 하면서 송치되어 가는 주의 종들에게 준비하여 온 커피를 대접하면서 형사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마신 마지막 커피였을 것이다.

9. 평양형무소 수감에서 순교까지

1941년 8월 25일 저녁 8시경, 아버지를 태운 열차는 평양역에 도착했다. 호송해 간 한부장과 형사들도 함께 내려 역 광장으로 걸어 나가자 오정모 사모와 안이숙의 어머니 두 분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두 분은 인솔 책임자에게 간청하여 일행에게 냉면을 대접하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 밤에 평양경찰서에 인계되었다.

이 곳 유치장은 지하에 있었으며 가운데 복도를 내고 양쪽으로 감방이 여섯 개씩 있었다. 간수가 복도 가운데 앉아있으면 12감방이 모두 보이도록 설계된 것이다. 감방마다 정면은 통나무로 되어 있으니 바깥에서도 감방 안을 훤히 볼 수 있고 안에서도 마주보는 방의 동태를 잘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방마다 주의 종들로 배정되어 있었는데 1방에는 이광록 집사, 2방에는 최권능 목사, 3방에는 이인제 전도사, 4방에는 주기철 목사가 있었는데 공산주의자 주영하도 한 방에 있었다. 5방에는 방계성 장로, 6방에는 채정민 목사, 7방에는 오윤선 전도사, 10방에는 안이숙 선생이 수감되어 있었다. 경남에서 올라간 한상동 목사는 주목사 방에 배정되었는데 밤새 둘이서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 날 조수옥 전도사와 함께 대동경찰서로 이감되었다.

평양에서의 수감생활은 그런 대로 나은 편이어서 이발도 시켜주고, 옷도 갈아입게 했다. 연로하신 최권능 목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감방 안을 떠나가게 했으니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오" 사탄의 권세가 성도들을 묶어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 감방 안을 압도하는 분위기였다.

1941년 8월 25일, 아버지는 드디어 평양형무소 미결감방으로 이송되었다. 고등계 형사들이 나타나 유치장 안에 있는 불참배 운동자들을 모두 불러내어서 기다리게 하고 음식을 구입해 가지고 온 가족들과 나누게 했다. 경남의 주의 종들도 함께 어울려서 요기를 했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형무소로 가는데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윽고 형무소에 도착하여 뜰에 수갑을 찬 채로 대열을 지어 있을 때 아버지가 큰 소리로 "주기철 목사님의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일제히 주목사를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목사의 얼굴에는 환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20여명이나 되는 수진 종들의 얼굴에도 광채가 일어났고 모두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다. 천사의 얼굴이 따로 있으랴? 스데반의 얼굴이 이들과 무엇이 다르랴? 일행은 사복을 벗고 푸른 미결수복으로 갈아입었고 최권능 목사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우리 주님은 홍포를 입으셨는데 우리는 청포를 입네!" 주남선 목사가 한 마디 더 보탰다. "지금은 청포를 입지만 곧 홍포를 입게 될 것입니다."

형이 확정되어 기결수가 되면 홍포를 입게 된다는 말이지만 주의 종들에게는 그보다는 주님과 같은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모두 이 말에 웃었지만 눈물을 머금은 감격의 웃음이었다. 번호표를 받고 간수의 인도를 따라 각기 분산되어 수감되었다.

10년의 만주 선교를 통해서 30여 교회를 세웠다는 최권능 목사는 벽돌담 안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예수 천당"을 외쳐댔는데 간수들의 제지도 박해도 그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형무소 안에서 또 한가지의 시련은 매일 아침 점호시에 동방요배를 강요하는 일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여기까지 온 주의 종들이 이를 고분고분 따를 리가 없었고 그들의 주장은 확고부동하며 논리정연했다.

"신사는 우상이니 절을 못한다" 하자

"동방요배는 살아있는 천황에게 인사하는 신하된 자의 예의가 아닌가? 옛날에도 임금이 서울에 있을 때 북향사배를 했는데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 따르는 형벌도 무자비하여 사람을 세워놓고 양팔을 뒤로 묶고 무거운 쇠뭉치를 달아서 굴복할 때까지 서 있게 했다. 때로는 양팔을 뒤로해서 수갑을 채워놓고 밥통을 갖다 놓으면서 개같이 입으로 핥아먹게도 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동방요배를 하겠다고 굴복하기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해방이 되어 출옥한 성도들에 의하면 뼈가 굳어져서 팔을 앞으로 가늠하지도 못했다고 하며, 어떤 이는 장기간 수갑을 차고 있어서 겨드랑과 팔목이 헐어 구더기가 생겨났다고 한다. 더욱이 2차 대전이 터지고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에는 죄수들의 식량이 형편이 없이 감량되고 조잡해져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감기나 어떤 질병에 걸렸다 하면 회복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거기다 수감된 지가 벌써 4년이나 되었지 않은가?

담당은 모리(森) 검사가 했으나 바쁘게 서두를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죄명이라야 [치안유지법]과 [불경죄]인데 길어도 3-4년형이다. 서둘러 기소해서 형을 살고 나가면 또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다닐 것이 뻔하니 차라리 미루어서 족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에 지쳐서 굴복하면 좋은 일이고, 감방에서 죽으면 그것은 더 좋은 일이니 주의 종들을 예심에 붙여서 3-4년을 끌어온 셈이다.

주의 종들도 처음에는 수양 온 셈치고 한 5년 정도 있으면 나가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지만 그것은 착오였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일본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사상범들을 더욱 학대하기 시작했고 몸은 날이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그래도 젊은 목사들은 버티어 나갔으나 박관준, 최권능, 주기철, 그리고 아버지같이 50고개를 넘은 분들은 눈에 띄게 시들어갔다. 그래도 평양이 가까운 분들은 가족이나 교인들의 면회도 있었고, 음식도 차입되었으나 경남에서 올라간 분들은 아무도 돌보거나 위로해 주는 가족이 없었다. 나도 금융조합에 취직을 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으니 그저 마음뿐이고 편지를 통해 간혹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해가 바뀌어 1944년이 되었다. 주기철 목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더니 8일 후에는 최권능 목사가 그리던 천국에 가고 1945년 3월 13일에는 박관준 장로 마저 별세를 했다.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본 세력도 마지막 고비였고, 장기간 복역 중인 주의 종들에게도 마지막 고비였다.

아버지는 1945년 봄에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병동으로 옮겨졌다. 어차피 살아날 수 없다고 진단이 되었든지 당국은 가족의 요청만 있으면 병보석을 시키겠다고 통보해 왔다. 나는 급히 평양으로 달려가 병보석을 신청하여 4월 30일에 가석방이 되었고 그 즉시로 평양기독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수일간 치료를 받으니 몸이 조금씩 회복이 되어 부자간에 대화도 나누고 성경도 읽고 찬송도 부르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6일째 되는 날 밤에 산정현교회 오윤선 장로가 찾아왔다. 오장로는 조만식, 김동원, 유계준 장로들과 더불어 주목사를 섬기던 유명한 분이며 또 숭의상업학교를 세운 재력가였다. 두 사람은 서로 기뻐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버지는 부산에서 양성봉 장로가 몰래 차입해 준 베드로전후서를 모두 암송했노라고 자랑하면서 둘이서 암송을 하고 항상 애창을 하던 434장 찬송을 함께 불렀다. 3절을 부르면서 두 분은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은혜스럽고 감격적이었다. 오장로는 늦게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부자는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일찍 잠에서 깬 나는 인기척을 내었으나 아버지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여 아버지를 흔들어 보았으나 기동을 하지 않았고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버지를 껴안고 흔들어 보고 고함도 쳐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어찌할 수도 없었다. 병원 당국에 알렸으나 어떠한 이야기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숭실학교 동창인 정창덕에게 연락하여 협조를 구하고 그의 부친이 상여를 준비하여 돌박산 기독교인 묘지에 장례를 치렀다. 아버지는 향년 58세의 일기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채 그렇게도 염원하던 천국으로 가셨다. 오로지 한국교회와 자신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바치신 것이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60년이 가까워 온다. 내 나이가 83세이니 그 당시의 한국교회의 영욕을 담당했던 주역들은 이미 세상을 다 떠났을 것이다. 지금 주님 앞에서도 저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어떻게 변명하고 있을까? 지금도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니 죄가 아닙니다."라고 늘어놓고 있을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국에 가면 꼭 이 대답을 들어보고 싶다. (끝) (2001. 6. 21. 카페 '재건교회목회자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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